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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갈게요. 맞선





은우는 태경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홀린 듯 쳐다보았다. 농구 경기의 전반전 내내 활약한 태경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에게서는 짙은 수컷의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언제나 동경해 왔던 태경의 몸, 태경의 얼굴, 그리고 태경의 마음.

한 번만, 딱 한 번만 안고 싶었다.

“이은우, 뭐 해? 물 줘야지.”

“으응.”

주뼛거리며 아이스박스에서 막 꺼낸 생수를 건넸다. 태경은 씨익 웃으며 냉수를 꿀꺽꿀꺽 삼켰다. 요동치는 목울대에 저도 모르게 은우는 침을 삼켰다.

“나, 잘했지?”

“어?”

“못했어?”

“아, 아냐.”

“못한 게 없는데 왜 표정이 별로야? 지금 우리 학교가 이기고 있다고.”

마음이 고스란히 읽힌 것일까. 평소와 다르다는 걸 태경은 눈치채고 있었다. 은우의 뺨에 붉은 핏기가 확 쏠렸다. 태경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고 은우에게 어깨동무한 채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스테판 커리처럼 너무 잘해서 감탄한 거야?”

장난스러운 말일 뿐인데도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전율이 흘렀다.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영영 고백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무모한 용기는 지금이 적기라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최태경.”

“응?”

좋아해. 내가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래전부터……. 세상이 날 손가락질하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네게 고백하고 싶어.

용기를 낸 은우가 입을 떼려는 순간 태경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잠깐만, 경은이야.”

“경은?”

“우리 사귀기로 했어. 네게 제일 먼저 말하는 거야. 아직 다른 녀석들에겐 비밀이야. 경은이가 당분간은 우리 과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으……응.”

은우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무참히 짓밟힌 용기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실낱같은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15년간의 짝사랑이 슬픈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커서가 깜빡이는 것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냉정해지자고 되뇌며 자판을 두드렸는데, 버석한 결심과는 다르게 은우의 마음이 아릿하게 가슴을 적셨다. 손톱으로 심장을 할퀴는 통증이 느껴져 눈을 감았다. 곧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눈두덩을 짓눌렀다. 캐릭터의 아픔에 몰입하다 보면 글의 균형은 깨어지기 마련.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지호는 노트북의 문서 창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이 막혔을 때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목이 말랐고 마침 배도 고팠다.

지호는 1층으로 내려가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에 도착했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 한 병과 사과 하나를 꺼냈다. 물을 마시다 거실을 흘깃 곁눈질하니 세 모녀가 테이블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린 엄마는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고, 언니 지수와 동생 지유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지호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사과를 아작 깨물었다. 그러고는 곧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누가 나갈 기고?”

박정숙 여사의 근엄한 경상도 억양에도 지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유로움을 시전했다. 반면 지유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척일 뿐이었다.

“당연히 큰언니지. 안 그래, 언니?”

지수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미소가 설핏 어리었다.

“장유유서.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니까!”

지유는 엄마의 쏘아보는 시선이 언니 지수에게 향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그래. 니가 나가라.”

그 어조는 마치 ‘니가 가라. 하와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엄마, 나도 나가고 싶은데, 큰 결격 사유가 있어.”

“니가 무슨 결격 사유가 있다고 그러노? 잘나가는 로펌 변호사인데.”

“나 말고 이 남자.”

정숙은 의아한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고? 잘나가는 의사…….”

“연하잖아.”

엄마의 말을 자르며 지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연하가 어떤데?”

“그것도 세 살이나 어리다고. 난 연하는 취미 없어.”

“양지수, 니!”

“어린 남자를 부둥부둥 해 주면서 만나기엔 인내심도 바닥이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아니이이, 닥터 강은…….”

“아무리 어른스러운 남자라고 해도 별로야. 나 초등학교 다닐 때 내가 전혀 초등학생처럼 굴지 않는다고 엄마가 불평했잖아.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는 말도 했던 것 같은데.”

“야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노! 너네 아빠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마래이.”

하긴 지수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지수가 6학년일 때 어린 두 동생을 맡기고 부부끼리만 중국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큰딸의 애늙은이 같은 신중함 덕분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번 작심한 것은 절대 철회한 적이 없는 지수가 저렇게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이 타깃은 막내딸이었다.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이라면 분명 닥터 강의 마음에도 쏙 들지 싶었다.

지유는 큰언니의 발언을 귀담아듣고 있다가 엄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앙다문 입술을 재빨리 열었다.

“엄마! 나도 결격 사유가 있어.”

“연상은 취미 없다는 말은 하지 마. 창의력 없어 보여.”

지수가 냉큼 끼어드는 통에 지유는 큰언니를 꼬나보았다. 같은 배를 탄 동지끼리 이러면 안 되지. 큰언니야!

“난 이 남자 직업이 싫어.”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의사가 어때서?”

엄마가 한심한 눈을 하고 되묻기에 지유는 작은 머리통을 여러 번 굴려야 했다.

“그래서 정말 싫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해라. 의사 싫다는 사람 못 봤거든.”

“나야, 나. 엄마, 잊어버렸어? 나 어렸을 때 병원 가기 싫다고 엉엉 울었잖아. 요즘 건강 검진 할 때도 안색이 제일 먼저 파래지는 사람이 바로 나야.”

“근거가 빈약해. 병원 가기 싫다면서 쌍꺼풀은 어떻게 했을까?”

재미있어하는 큰언니의 목소리에 지유는 투지가 활활 불타올랐다.

“날마다 피를 보는 남자와 맞선이라니! 생각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아.”

“니가 매일 피 보는 것도 아니니까 염려 붙들어 매라. 양지유, 니가 나가.”

엄마의 엄포에 지유는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사귀는 사람 있어!”

“뭐라꼬?”

엄마는 꽤나 놀랐는지 눈이 퉁방울처럼 커졌다. 지유는 지수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밀리면 울면서 겨자를 찍어 먹어야 한다.

“엄청 사랑하는 사람이야. 정략결혼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긴 싫어.”

“정략은 무슨? 근데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니 연애했었나? 여즉 엄마한테도 일언반구도 안 했단 말이가? 이거 완전 배신인데. 네가 정말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막내딸 맞나?”

“지금 말하잖아.”

“누군데? 뭐 하는 사람인데?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정숙은 충격적인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수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막냇동생의 화려한 연애사에 이제 적응할 만도 하건만, 엄마는 스물일곱 지유의 연애를 아직도 사춘기 소녀의 첫 연애처럼 여기며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차차 말해 줄게. 엄마, 하여튼 난 못 나가.”

엄마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입을 다물고 테이블 위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어떡하노? 니도 지수도 안 된다 카는데!”

“꼭 맞선을 봐야 할 이유가 없잖아.”

지수의 말에 정숙이 언성을 높였다.

“이유가 없긴 와 없노! 엄마는 이 사람, 꼭 사위로 맞고 싶데이.”

“왜?”

지유의 순수한 물음에 정숙은 얼굴을 찡그리고 말을 내뱉었다.

“놓치기 아까운 자리라 안 카나. 시어머니 자리가 윽시로 좋다 아이가. 엄마 제일 친한 친구인데, 성품이 살아 있는 보살이다, 보살!”

정숙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입술을 쭉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그런 간절한 표정은 딸아이들을 압박하는 좋은 도구였다.

엄마를 바라보던 지수와 지유는 서로 눈짓을 하고 머리를 맞댄 채 속닥거렸다.

“꿈 많고 정 많은 우리 엄마는 우리 결혼에도 욕심이 많으신 듯해.”

“그러니까 십자가는 네가 져?”

“내가 예수님이야? 언니는 말을 해도!”

“그럼 어떡할 건데?”

지수의 말에 지유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저기 있네. 우리 집안의 어린양.”

“어린양?”

“작은언니.”

지유의 말에 지수는 뒤를 돌아 주방 식탁 앞에 앉은 지호를 쳐다보았다.

길쭉한 두 다리를 반대편 의자에 척 올려놓고 신중한 자세로 사과를 아작, 아작 먹고 있는 양지호. 지수의 첫째 여동생이자 양씨 가문의 둘째 딸이었다.

“한 마리의 가련한 양이로군.”

지수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리었다.

“엄마, 엄마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어.”

“그기 뭔데?”

마뜩지 않다는 표정을 견지한 채로 박정숙 여사는 막내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엄마에게는 우리 말고도 딸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

“지호?”

“응! 지호 언니 내보내.”

정숙은 지유의 말에 주방에 있는 둘째 딸을 쳐다보았다. 분명 언니와 동생이 본인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을 터인데도, 지호는 관심 없다는 듯 휴대폰만 내려다보며 심드렁하게 사과를 먹고 있었다.

지호는 뭐랄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하고 넉넉한, 아들 같은 딸이다.

큰딸 지수는 맏이답게 어른스럽지만 냉정한 편이고, 막내딸 지유는 애교가 넘쳐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지만 그만큼 고집도 만만찮다. 간혹 새침을 떨 때면 그 성질머리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저마다 장단점 있고 색깔을 명확히 하는 첫째와 셋째와 달리 둘째는 무던하고 무난한데 무심하기까지 한 것 같단 말이지.

다른 말로 하면 매력이 철철 넘치는 다른 두 아이들과 비교해서 지호는 무취, 무미, 무색에 가까웠다. 반듯하고 심성 고운 지호지만 과연 맞선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맞선 선상에서 배제했다.

“지호가 가능하겠나?”

“엄마! 당연히 가능하지. 둘째 언니만큼 매력적인 여자는 없다고. 우리 중에서 키도 제일 크잖아. 슈퍼모델 대회 나갔으면 지호 언니는 대상감이라고.”

“근데 우리 지호는 좀 말이 없잖아.”

놓치기 싫은 중요한 선인데, 너무 말이 없으면 남자 쪽에서 싫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말이 없다는 건 신중하다는 거야. 우리 지호 언니만큼 진중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눈 씻고 봐도 없어. 이 남자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게 보여. 눈매가 샤프한 게 사람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기세야. 이런 남자에겐 고만고만한 여자보다 우리 지호 언니 같은 여자가 딱이라고! 촉이 왔어. 엄마도 내 촉 정확한 거 알지?”

지유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지수는 그런 동생에게 잘하고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이따금 고개를 끄떡거려 주기도 했다.

“하긴 우리 지호가 진중해서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지.”

“나무랄 데 없는 성격에 입도 무거운데, 어떤 남자가 지호 언니를 거부하겠어? 그리고 비주얼을 봐. 언니 학창 시절 꿈이 모델이 아닌 게 정말 애석하다고. 모델로 나갔다면 분명 대한민국, 아니 세계적인 동양계 모델이 되고도 남았을 거야. 특히 저 눈, 쌍꺼풀도 없으면서도 크고 신비로운 눈! 판타스틱!”

“엄마, 지호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어. 염려 마.”

지수의 한마디에 정숙의 가슴이 벌렁거렸다.

내 속 어데서 저렇게 성격 좋고 모델 같은 애가 나온 기고? 이건 기적 아이가.

엄마의 얼굴이 금세 밝아진 것을 알아본 지수와 지유는 서로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소기의 목정을 달성하기 위해 약간의 조미료를 가미했을 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