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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저택 8화

2. 12월 17일, 18일 (4)





“뭐지.”

시호는 닫힌 문 앞에서 벙쪄 있다가 편지를 둘러보곤 뜯어냈다. 안에는 오늘 할 일이 들어 있었다.

‘매일 오전, 오후 한 번씩 산책만 하면 된다더니. 순 거짓말.’

[12월 18일. 딱히 할 일은 없습니다. 1월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산책을 합니다. 정원으로 가는 것은 자유이나 오늘만큼은 되도록 가지 않는 방향으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가도 되긴 합니다. 하지만 간 뒤에 벌어지는 일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지 않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상당히 찝찝하고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미션이었다. 시호는 어차피 갈 생각도 없었던 정원이었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더 가기 싫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또 궁금했다. 사람 마음이란 것이 간사하게도 여기 적힌 글이 뭐라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정원사 5월과 1월의 관계까지 알고 싶어졌다.

‘신경 끄자.’

하지만 과도한 호기심은 때때로 사람의 목줄을 죄는 법이었다. 도망치는 데는 이골이 난 시호는 호기심으로부터도 열심히 도망쳤다.

시호는 비록 자신이 시대는 모르되 장소만 아는 살인 사건 속 살해당한 인물의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선을 넘지만 않으면 안전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늘은 꼭 저택 안에서만 맴돌기로 결심했다.

3층짜리 저택을 산책하는 데에 소요되는 시간은 실상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빠른 걸음으로는 5분이면 다 끝날 일이었다. 심지어 3층은 막아 놨으니 더더욱 빠르다. 하지만 이 산책을 30분에 걸쳐서 하라는 지령이었다.

시호는 느릿느릿 걷거나 그냥 빠르게 여러 번 도는 것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느려 보이는 인상과 달리 성격은 재빠르고 결단이 확실한 편인지라 느리게 걷다가도 자신도 모르는 새 빨라지는 걸음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과 마주치고 혼나 버렸다.

“너무 빨리 걷는구나.”

10월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시호는 아내 10월이 번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걸 알았다. 어디 가는 건가, 하고 생각하다가 다들 외출이 금지되는 상황이란 걸 깨닫고 의문을 품었다.

“오늘은 정원을 좀 손봐야겠는데, 같이 가겠니?”

노인의 빨간 립스틱이 움직였다. 정원 손보기엔 상당히 화려한 차림새였다.

“아니요. 전 집에 있겠습니다.”

“같이 가려무나.”

‘뭐야. 왜 이래?’

오늘 지령은 되도록 정원에 가지 말라고 했지 절대로 가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10월을 맡은 노인은 무표정했다.

“무슨 일을 하시려고요?”

“땅을 좀 파려는데, 네 힘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란다.”

‘땅 파는 일을 딸한테 시키려 하다니. 어지간히 밉보이나 보네.’

“같이 가겠니?”

세 번째 제의였다. 하지만 시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모습에 노인이 평온한 눈빛으로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잘 선택했다.”

“……?”

뒤를 돌아봤지만 10월을 맡은 노인은 천천히 현관을 향하고 있을 뿐 돌아보지 않았다. 거의 스치듯 지나간 말이라 제대로 듣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까의 지령과 상황을 떠올려 봤을 때 무언가 의심스러운 건 분명했다.

대체 오늘 정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시호는 창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1층 로비 옆 창문으로는 사철나무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2층은 정원이 보이는 정면 쪽으론 3월과 8월의 방 창문을 제외하면 테라스를 통해서 내다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불투명 유리였다.

2층 테라스 난간에 손을 짚은 시호는 바깥을 보려다가 실패하고 밑으로 현관 쪽을 보았다. 현관에 바깥을 확인하는 구멍이 있긴 했으나 그 역시 시야각이 좁았다. 결국 정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주위를 기웃거렸다.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나 식사를 하는 식당 외에도 잠겨 있는 문이 하나 있었다. 대놓고 ‘창고’라고 쓰여 있는 방의 손잡이를 돌렸으나 일정 이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겨 있는 듯했다.

“뭐 해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6월이었다. 시호가 뒤를 돌아보자 그가 가는 눈초리로 웃고 있었다.

“아…… 잠시 좀.”

“거긴 잠겨 있어요.”

6월은 주방장으로 1층에 방이 있었다. 당연히 시호보다도 먼저 창고 문을 열어 봤었다. 잠겨 있는 문을 아는 6월은 창고 바로 옆 부엌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시호를 불렀다.

“잠깐 부엌 좀 들어올래요? 부엌에도 CCTV가 있거든요.”

CCTV라는 말에 미션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라고 여긴 시호가 조심스레 따라 들어갔다. 부엌이라고 해도 삭막하니 딱히 요리 재료나 조리 기구가 보이진 않았다. 그나마 구색을 갖추려 식칼이 종류별로 있고 냄비나 그릇들이 있긴 했으나 그 수가 적었다. 실제로 요리를 하는 것은 6월이 아닌 외부인이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조달 관리사가 음식을 조달하면 6월이 마치 자신이 한 것인 양 음식을 내놓는 구조였다.

“무슨 일이죠?”

시호의 질문에 6월이 히죽 웃었다. 별생각 없이 따라 들어온 시호의 얼굴엔 경계가 없었다.

‘바보 같네.’

6월은 자신의 인물 관계도 속 1월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1월 딸 - 6월은 언제나 1월의 몸을 취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립니다. 그 사실을 1월 역시 알고 있습니다.]

‘인물 관계도는 엿 바꿔 먹었나.’

CCTV가 있는 곳을 힐끗 본 6월의 시선에 정신이 팔려 시호 역시 카메라를 확인하던 도중 손목이 잡혔다. 그리고 그대로 손깍지가 껴진 채 벽으로 밀쳐졌다. 양손이 다 잡혀 잠시 버둥거리던 시호가 아차 싶은 얼굴로 눈을 꾹 감았다.

“1월. 오늘도 예쁘네요.”

1월은 반항하지 않는다. 그리고 6월은 1월에게 흑심이 있었다.

‘난 바본가.’

의심도 없이 냅다 들어온 시호는 아직까지도 사람들과 그들이 맡은 역할을 동일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저에게 다가오는 6월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엔 뭘 하려나.’

새벽 11월과 한 짓도 꽤 고수위였다. 6월이라면 희롱에 그칠 것이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긴장됐다. 그래서 자신의 바로 앞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호는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입술을 빼앗겼다.

“……!”

놀란 시호와 달리 6월은 눈을 감지 않고 그를 집요하게 바라봤다. 역시 뱀 같은 눈이었다. 재미있다는 듯 눈웃음까지 쳤다.

붙은 입술이 살짝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벌어진 입술이 시호의 입술을 머금었다. 그 사이로 호흡이 섞여 들었다. 시호는 속으로 6월에게 지령을 내린 개새끼를 욕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호의 속마음도 모르고 6월은 아주 열심히 지령을 실천했다.

[1월을 만나면 무조건 만지지 못해 안달난 사람처럼 구십시오. 단, 단둘이 있을 때만 그러시길 바랍니다.]

주방장 6월을 맡은 남자는 본디 하루라도 남의 피부 없이 사는 게 힘든 사람이었다.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입을 붙이든 밑을 붙이든 꼭 스킨십이 필요한 이에게 1월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어딘가 염세적인 면이 있는 점이 6월의 타입이기까지 했다.

손이 아프도록 깍지가 껴져 벽에 밀어붙여진 시호는 열정적으로 입술을 빠는 6월 때문에 몸이 경직될 정도로 큰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느꼈다. 그는 게걸스럽게도 시호의 입술을 먹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 점막으로 입가를 전부 헤집어 놓듯 문지르고 마치 먹잇감을 맛보듯 쭉쭉 빨아 댔다. 손과 몸뚱이로 시호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놓은 꼴이 정말로 사냥감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시호는 입을 벌리지 않으려 최대한 힘을 주었지만 6월이 CCTV 쪽에 한 번 시선을 준 뒤 인상을 팍 쓰고 접촉해 오는 통에 혀를 받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기분이 몹시 더러워져 물컹한 살덩이를 깨물어 버리려다 말았다.

솔직히 50만 원을 줄 테니 키스하자는 남자가 있으면 발로 정강이를 깠겠지만, 주기로 약속된 돈에서 스킨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50만 원을 깔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속이 쓰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조삼모사 같은 상황과 다름없는데도 말이다.

상체와 하체가 전부 딱 맞닿아 있어 시호는 6월의 성기가 반쯤 선 것을 알았다. 자극이 오면 몸이 반응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생리적인 불쾌감이 들었다. 게다가 6월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억지로 키스하는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6월은 벽과 제 몸에 갇힌 시호가 낑낑거리면서 절 받아 내는 게 기특해 몇 번이나 속으로 칭찬했다. 중간중간 상이랍시고 숨을 쉴 여유를 주며 가벼운 버드 키스도 했다. 어차피 시간제한 따윈 없었다. 그저 단둘이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시호가 6월 자신을 피해 다닐 건 뻔하니 아예 지금 뽕을 뽑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기 혹시…….”

부엌은 개방돼 있었지만 흰색 가림막이 있었다. 그 가림막 밖에서 11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호의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흠.’

속으로 안타까운 신음을 흘린 6월이 시호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벽에 붙어 있던 팔이 스르륵 내려왔다. 6월은 헝클어진 시호의 가발을 정리해 주고 입술에 뭍은 침을 닦아 주었다. 부채꼴 모양의 쳐진 속눈썹이 사락 움직이며 6월을 올려다봤다.

6월은 저를 쏘아보는 눈빛에 간질거리는 마음으로 씨익 웃었다. 입이 길게 찢어졌다. 짜증이 난 시호가 눈을 피하자 그가 마지막으로 입을 가볍게 맞춘 뒤 완전히 몸을 떨어뜨렸다.

“계세요?”

11월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네, 11월.”

하얀 천이 걷어지고 운전기사 11월의 눈에 시호의 뒷모습과 6월의 웃는 낯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있었음을 파악한 11월은 1월의 인물 관계도를 순식간에 떠올렸다.

[1월 딸 - 11월은 1월의 몸을 몹시 아낍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것으로 독점하려 합니다.]

‘자신만의 것으로.’

11월의 눈이 가늘어졌다. 6월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웃었다.

‘어쩌면 1월은…….’

시호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려 급히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뒤에서 11월과 6월이 간식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들으며 속으로 개새끼, 소 새끼 욕하는 중이었다. 누구를 욕해야 하는지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일단 전부를 욕해 두었다. 물론 이 계획을 짠 누군가에서부터 자신에게 기회를 준 3월까지 전부 시호의 욕받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