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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저택 5화

1. 참가 (5)





깨어난 것은 3월이 도착했다며 몸을 흔들었을 때였다.

“여긴가?”

“집 좋아 보이는군.”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한 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발을 잘못 내딛어 비틀거리자 옆에서 누군가 잡아 주었다. 3월이었다.

“고맙습니다.”

곧 11월이 옆에 왔다. 그나마 또래랍시고 친근하게 대하며 웃어 오는 게 싫지 않아 받아 주었다. 20대 초반의 11월은 25세인 시호를 보고 자신보단 연상이라고 짐작하면서도 거의 친구처럼 말을 걸었다.

“근데 진짜 집 좋지 않아요?”

시호가 11월의 말을 듣고 집을 살폈다. 확실히 크고 좋은 집이었다. 검은 쇠창살로 이루어진 2M는 거뜬히 넘을 듯한 대문 너머로 진회색 벽에 남색 지붕을 가진 그림 같은 저택이 보였다. 회색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은 갈색 줄기로, 아마도 겨울을 제외하면 푸른 잎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총 2층으로 보이나 지붕 쪽 다락까지 합하면 3층짜리 건물로 현재 극에 필요 없는 3층은 막아 둔 상태였다.

저택 대문 옆에는 이질적인 컨테이너 건물이 있었다. 감시 팀, 의료 팀, 조달 팀 등이 있는 곳이라고 짤막한 소개를 들었다. 그 뒤에는 모두 저택 앞에서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들었다.

“3월이 알려 준 게 대부분이긴 하나 그래도 꼭 개인 설명서를 읽고 그에 따라 주시기를 바랍니다.”

총 관리장이라는 남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거 있으십니까?”

총 관리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호가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다가 불현듯 치고 올라온 의문이었다.

“왜 다 남자죠?”

“여성분에게 맡기면 조금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모르고 지나가시겠지만…….”

시호와 총 관리장의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알게 되는 분도 계시겠죠.”

여자인 딸 역을 맡은 시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꼭 개인 설명서를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총 관리장은 인사를 한 뒤 컨테이너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다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3월이 그 앞으로 다가가 대문에 손을 댔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대문 열쇠가 구멍에 맞춰졌다.

“자, 들어가신 그 순간부터.”

문이 열렸다. 시호는 섬뜩한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간 것을 느꼈다.

“귀신이 되어 주십시오.”

연극의 서막이 올랐다.







2. 12월 17일, 18일 (1)





대문에서 현관까지 난 깨끗하고 넓은 길을 걸으면서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시호 역시 어찌 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아서 눈치만 보며 주위를 확인했다. 평지에 사방으로는 나무나 산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저택을 둘러싼 담 자체가 높아서 사람이 지나가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최소한 2층 이상의 건물은 이 근처에 없어 보였다.

캐리어를 덜그럭 소리를 내며 끌고 걸어가는 시호 옆에서 3월이 손을 내밀었다.

“왜요?”

“1월, 제게 짐을 주세요.”

“아뇨. 제 건 제가…….”

거기까지 말한 시호는 저를 노려보는 3월의 표정에 곧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이 집의 딸이고 3월은 심부름꾼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해요.”

어딘가에 있을 10월, 저택 주인의 아내보다도 3월은 그 딸인 1월을 먼저 챙겼다. 그 이유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가 개인 맞춤 설명서를 읽고 난 뒤에야 알 수 있게 된다.

현관문이 열리고 깨끗하게 청소와 환기가 된 저택 안에 들어서자 의외로 호텔 같은 분위기가 났다. 로비 양옆으로 있는 2층을 향하는 계단이 내부 테라스 난간까지 이어진 것이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과 흡사했다.

1층은 2월, 4월, 5월, 6월, 7월, 8월의 방이 있었고 2층은 1월, 3월, 9월, 10월, 11월, 12월의 방이 있었다. 3월은 1월의 방 앞까지 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2층 가장 왼쪽 끝 방으로 들어섰다. 시호가 쓸 방은 바로 그 옆이었다.

아내 10월 역할을 맡은 노년의 남성이 하얀 머리를 가볍게 정리한 후 문을 여는 것이 보였다. 시호는 문어가 양각으로 새겨진 10월의 방문을 보다 자신의 방문을 보았다. 푹신한 매트 위에 엎드려 누워 있는 미소년이 역시 양각으로 조각돼 있었다.

‘여자구나.’

미소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매트에 깔린 젖가슴이 살짝 보였다.

‘하긴. 딸 방인데 발가벗은 남자 조각을 해 놓긴 좀 그렇지.’

그렇지만 나체의 소녀가 조각돼 있는 것도 이상했다. 더 파고들려던 시호는 그냥 그 당시 유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흘려버린 뒤 문을 열었다.

방에서는 꽃향기가 흘렀다. 말린꽃이 들어 있는 유리병과 생화가 꽂아진 화병이 즐비했다. 또 커튼도 침대도 온통 레이스투성이였다. 전체적인 톤은 연한 베이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시호의 눈에 넓은 방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여 있는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에는 A4용지가 올려져 있었다. 무엇인지는 뻔했다. 몇 번이고 들었던, 여러 장으로 이루어진 개인용 맞춤 설명서였다. 시호는 캐리어를 놓고 우선 그 설명서부터 집어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1월 님. 당신은 이 집안의 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선 가지고 온 기계와 따로 보관을 원하시는 물건을 캐리어나 가방에 담아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아 주십시오. 그러면 관리 팀에서 수거하여 귀가하실 때까지 맡아 드리겠습니다.

개인 용품은 적절히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어 1월의 특징상 면도가 허용되니 면도기는 챙기셔도 됩니다. 단, 수동 면도기만 허용됩니다. 없다면 조달 관리인이나 심부름꾼에게 문의해 주세요.]

3월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며 투덜거린 시호는 눈을 다음 문단으로 옮겼다.

[12월 17일부터 31일까지 보름 동안 이어질 연극은 이 저택 안에서 죽은 영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진행됩니다. 그때 그들의 생활을 최대한 재현할 예정이며 여기에는 맡은 인물의 옷차림과 언행도 포합됩니다. 옷이나 가발, 신발은 생전 딸이 하던 양식 그대로 준비해 놓은 것을 착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직업이나 전체적인 극의 흐름도 3월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살인마는 내부자이나 1월은 살인마가 아닌 피해자 중 한 명이 될 것입니다.]

시호는 자신이 살인마 역할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이 연극의 끝까지 남아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연기를 해야 하는 살인마는 꽤나 고난이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1월은 연극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가장 처음 목이 졸립니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인상을 썼다가 인센티브를 떠올리곤 표정을 풀었다.

[다른 월과의 관계도

2월, 경비원: 1월과 사이가 무난함.

3월, 심부름꾼: 1월을 짝사랑하고 있으며 다른 가족보다 1월의 말을 잘 따름.

4월, 유모: 1월을 아끼는 편.

5월, 정원사: 1월이 혐오함.

6월, 주방장: 1월에게 흑심이 있음.

7월, 조달 관리인: 1월에게 흑심이 있음.

8월, 청소장: 1월과 사이가 무난함.

9월, 총괄 지배인: 1월을 어릴 때부터 본 사람으로 뒤에서 챙겨 줌.

10월, 아내: 1월을 원망함. 남편이 죽은 이유가 1월인 것 같다고 여김.

11월, 운전기사: 1월에게 애정을 주고 있음.

12월, 아들: 엄마 10월의 방해로 인해 멀어지게 된 누나 1월의 애정을 갈구함.

1월은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죽은 남편 뒤를 이어 저택 주인이 된 아내 10월의 원망을 받고 있는 상태로 저택 안에서 붕 뜬 존재였습니다. 1월은 계속된 고립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점점 기력이 쇠해지고 말수가 없어진 상태입니다. 되도록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방 안에 계셔 주시면 됩니다. 무슨 수모를 겪더라도 결코 반항하시면 안 됩니다.

1월이 해야 할 일은 특별히 없습니다. 하루에 두 번,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씩 저택을 30분에 걸쳐서 천천히 산책하시면 됩니다. 정원을 가도 괜찮으나 1월은 정원사 5월을 혐오하기에 되도록 그곳을 기피합니다.]

5월 정원사와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지 1월은 5월을 혐오한다고 되어 있었다.

‘대체 이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거야?’

시호는 마지막 페이지를 들추었다.

[12월 17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오후 산책만 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18일 새벽 4시 가량 무슨 일을 겪더라도 비명을 지르지 마시고, 말없이 상황을 감내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제 맡길 짐을 들고 현관 앞 로비로 모여 주시길 바랍니다.]

두 줄로 끝난 설명에 뒤를 확인했으나 마지막 페이지는 이게 다였다. 시호는 괜히 찝찝한 마음에 재차 종이를 읽었다. 18일 새벽 4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저 놀라지 말란 말이 끝이었다.

‘비명을 지를 정도의 일이 생기는 건가.’

살인마가 위협이라도 하는가 싶었지만 어차피 때가 되면 알 일이었다. 지금은 우선 연극을 위해 설명서에 적혀 있던 대로 옷을 갈아입으려 장롱으로 향했다.

방 안에는 이미 CCTV가 설치돼 있었다. 그래도 분명 사각지대는 존재했으며 당연히 침대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침대를 향하던 시호는 눈가를 찌푸렸다. 정확히 침대 바로 위 천장에 검은 카메라 렌즈가 보여서였다. 마치 몰래 카메라 같은 구도로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는데 몹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별…….”

신경 끄고 옷장 문을 여니 하늘하늘한 원피스만 가득 들어차 있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구두와 양말까지 코디돼 있는 것이 완전 제대로였다.

‘스타킹 없는 게 어디야.’

게다가 겨울이라 긴치마여서 다행이었다. 민소매 미니 원피스였으면 다 때려치우고 도망갔을 것이다. 시호는 고심 끝에 단정한 느낌의 긴팔 원피스를 꺼냈다. 남색 무지 원피스는 장식 하나 없이 수수했다. 막상 입어 보니 정사이즈라 그런지 상상한 것처럼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을 긁적이던 시호는 고민 끝에 검은색 단화를 골라 신었다. 어떻게 구했는지 발에 딱 맞았다.

이젠 옷장 안 옆 칸에 곱게 놓인 두 개의 가발로 눈을 돌렸다. 완벽하게 똑같은 가발 두 개 중 하나는 여분으로 가져다 둔 것이라고 설명서에 써 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