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3월의 저택 4화

1. 참가 (4)





“아예 팔다리 제모까지 하라고 하죠, 왜.”

“원하신다면.”

어차피 체모 자체가 적어 털이 별로 없는 시호였다. 시호는 15일간 역할을 지키며 저택 밖으로만 안 나가면 된다는 주의 사항을 마지막으로 듣곤 눈을 감았다. 조금 피곤함이 몰려와 잠깐이라도 잠을 자 둬야겠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10분 뒤 시호는 옆에서 느껴지는 작은 움직임에 선잠에 들었다가 깨어났다. 슬쩍 눈을 떠 옆을 보니 3월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3월이 팔을 움직인 듯했다.

‘자는 건가.’

팔짱을 끼고 몸을 좁히고 있는데도 여전히 몸이 닿았다. 대체 무슨 운동을 하면 저렇게 몸이 큰가 싶어 시호는 창문 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다른 사람, 특히 남자와의 접촉이 꺼려져 최대한 닿지 않게 웅크렸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긴 들었던지 시호는 자신을 깨우는 누군가의 손길에 놀라 퍼뜩 눈을 떴다. 마치 새끼 새처럼 놀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바람에 3월의 눈썹 한쪽이 위로 올라갔다.

“악몽이라도 꿨습니까?”

“아…… 아니요. 다 왔어요?”

“점심 먹을 곳에 도착했어요.”

아직 그 저택은 아닌 듯했다. 방향도 모르고 그저 달리는 버스에 몸을 담은 터라 시호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무들이 빼곡한 산 앞에 있는 가든 식 식당 앞에 섰다. 그리고 아직 잠이 덜 깨 멍하니 들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혼자 있을 때는 술 없인 제대로 잠을 못 자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보름이나마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왜 안 들어가요?”

한 팔로 등을 감싸듯 밀며 에스코트하는 3월 때문에 시호의 어깨가 또 움츠러들었다.

“자주 놀라시는군요.”

손바닥을 뗀 3월이 이번엔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시호를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룸에는 이미 한 상이 차려져 있었는데, 정갈하게 담긴 반찬과 소박하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다들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3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옆으로 가 무언가를 속삭이듯 말했다.

그에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말소리에 집중하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띠곤 3월의 어깨를 두드렸다. 퍽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으나 3월은 그가 친 어깨의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3월에게 건넸다. 담배였다. 조금 묵직한 맛을 가진 담배는 독했지만 3월의 입에 맞았다. 저번에 우연히 6월, 요리사와 같은 담배를 핀다는 사실을 알고 마침 떨어진 담배를 요구했던 것이다.

시호는 담배를 피우러 가는 3월을 보다가 식탁 앞에 앉았다. 드물게도 테이블 주변 바닥만 뚫려 있는 구조라 바닥에 앉는 것 같아도 의자에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상 위에는 여러 찬 외에도 받침대에 정갈하게 놓인 수저와 젓가락, 예쁘게 접힌 냅킨 따위가 준비돼 있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놓인 물티슈를 뜯어 손을 닦는 사이, 사람이 다 들어섰다 여긴 식당에서 단정한 차림새를 한 종업원들이 들어와 밥과 국, 고기 등 따뜻한 음식들을 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아까 3월에게 담배를 빌려준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시호는 적당히 인사를 받고 수저를 들었다.

“냅킨부터 목에 둘러요.”

“괜찮아요.”

‘목에 두르라니. 애 취급을 하는 건가?’

워낙 다양한 연령대가 모여 있기도 했지만 주위에서 20대로 보이는 건 시호 자신과 11월 운전기사 정도였다. 아니, 6월도 20대로 봐 줄 만하다.

#그중에서도 시호는 덩치나 외모로 봤을 때 가장 어리게 보였다.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말라서 호리호리한 탓이었다. 그리고 턱이 짧고 곱게 진 쌍꺼풀이 있는 큰 눈이 꽤 예쁘장했는데, 유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또한 조금 흐린 인상이나 창백한 얼굴, 다크 서클, 음침한 표정이 시호를 우울한 사람으로 보이게도 만들었다.

“밥 많이 먹어요.”

“네.”

요리사 역을 맡은 6월은 시호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앞머리를 한쪽만 넘겨 이마를 반쯤 드러낸 모습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으나 도드라진 이마 아래 가늘게 찢어진 눈매와 큰 입이 마치 뱀을 연상시켰다.

뱀이 아가리를 벌려 밥 한 술을 떠먹었다. 시호는 옆에서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며 들깨 소스로 버무려진 우엉 채 샐러드를 집었다. 이어서 뱀이 소고기를 뜯는 사이 3월이 들어왔다. 그에게선 짙은 담배 냄새가 풍겼다. 3월은 자연스럽게 시호 옆에 앉아 생선살을 발랐다.

“3월. 담배 꼭 갚으셔야 합니다.”

“역할 때문에 종종 밖에 나가니까 그때 사다 드리겠습니다.”

3월은 심부름꾼을 역을 맡았기에 저택에서 나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물론 조달 관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저택 외부, 그러니까 극을 벗어나는 바깥을 대본의 허락이나 지시 없이 나갈 수 있는 인물이라서 할 수 있는 약속이었다.

“밖에 나가지 말라면서요.”

시호가 연근을 들고 말했다. 3월과 6월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6월이 큰 입을 좌우로 넓게 벌리며 웃었다.

“3월은 심부름꾼이잖아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던 사전 미팅 때 더 많은 말들이 오갔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시호는 연근을 입에 넣었다. 아삭한 것이 맛이 좋았다. 유자청으로 맛을 낸 게 꽤 상큼해서 시호는 연근을 하나 더 들었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나 요리 못 하는데. 꼭 내가 밥 준비 다 해야 해요?”

6월이 3월에게 묻자 덩달아 궁금해진 시호도 3월을 돌아봤다.

“글쎄요. 맞춤 설명서를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너무하네.”

구시렁거리던 6월은 이번엔 돼지 불고기로 젓가락을 뻗었다. 3월이 새우를 입에 넣는 걸 보며 시호는 혀를 씹었다. 6월도 덩치가 컸다. 닿는 몸이 상당한 근육질이란 것을 알게 해 주었다. 3월보다는 말라 보였지만 뼈대가 좋아, 그 둘 사이에 앉아 있는 시호는 좀체 마음껏 움직이기 어려웠다.

‘덩치들.’

시호는 밤마다 저를 괴롭히는 트라우마 역시 온 힘을 다해 반항해도 벗어나지 못할 만큼 체격 차가 컸던 게 떠올랐다.

‘짜증 나.’

결국 젓가락을 놓고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3월의 시선이 굳은 얼굴로 방을 나선 시호의 뒤를 좇았고, 6월이 그런 그를 빤히 보았다. 시호가 나간 문을 뒤늦게 본 11월 역을 맡은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1월은 왜 밥 안 먹는대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6월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청 마른 이유가 입이 짧아서 그런가 보다. 아, 그래도 저 형…… 아니, 1월. 따님 역할이 부담 없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저번 1월은 무서웠거든요.”

11월의 말에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동의했다. 원래 1월은 3월 못지않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였기 때문이다. 키와 덩치도 컸고 제법 살집도 있었다.

3월은 뒷조사로 그 1월이 실제 조폭이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오히려 3월의 입장에선 조폭 출신인 1월을 더 원했지만, 솔직히 원래 1월 예정자보단 지금의 1월이 배역에 더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연극의 지문상, 지금의 1월이 다른 연기자들에게 부담이 덜할 것이었다. 반면 1월 역할을 맡은 시호를 생각하면 씁쓸한 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개인 맞춤 설명서 안에는 날짜별로 지정된 ‘행동 지시’가 있었다. 꼭 지켜야만 하며 그 행동들은 예외 없이 CCTV가 있는 곳 앞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감시자가 확인 후 체크를 해 인센티브를 주거나 페널티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월은 그 부분까진 일부러 미리 말하지 않았다. 각자의 은밀한 아니, 죽은 이들의 은밀한 사생활이었으므로.

“담배로 배 채웁니까?”

공깃밥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을 확인한 3월이 주차된 전용 버스에 기대 담배를 몇 개비나 핀 시호에게 물었다.

“그러면 좋겠네요.”

약간 비꼬듯 답한 시호가 담배 필터를 문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혹시 속이 안 좋은 거면 의료 팀에게 연락해 둘까요?”

저택 귀신 연극엔 의료 팀도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에 조금 놀랐으나 시호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담배를 껐다. 얕보이고 싶진 않았다.

끈 담배를 바닥에 버리자 버려진 꽁초가 네 개에서 총 다섯 개가 되었다. 3월은 그것에 눈길을 주자 시호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모른 체했다. 잠시간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가 말없이 몸을 돌려 식당으로 돌아갔다. 시호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냥 열린 버스 입구 계단에 앉아 있었다. 이내 3월이 다시 나왔다. 손에는 휴지를 들고 있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휴대용 재떨이를 선물하도록 하죠.”

‘당신이 왜?’

시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3월은 허리를 굽혀 꽁초를 하나하나 휴지로 집어 들어 감쌌다.

“이런 걸 이렇게 바닥에 버리면 못씁니다.”

또 어린애 취급이었다. 시호는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일어나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자리를 잡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그냥 식당으로 들어갈걸.’

근처 쓰레기통에 꽁초를 버리고 온 3월이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 자나? 앞으로 한참 더 가나 보네.’

시호는 미리 준비된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뒤 3월을 몰래 살폈다. 30대 중반의 강한 인상을 가진 사내. 꽤나 미남이지만 어딘가 뒤틀리고 무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데 은근히 사람을 챙기고 담배를 빌리는 인간미도 있으며 바닥에서 꽁초도 줍는 도덕도 가지고 있었다. 몸이 좋은 걸 보면 운동도 꾸준히 하는 듯하고 식당에서 빨리 나온 것을 보니 음식도 절제하는 듯하다.

‘보기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다시 한번 물을 마시고 시호는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여전히 남자의 팔뚝이 닿아 와 인상을 쓰며 혼자 팔짱을 꼈지만 그래도 워낙 체격이 좋은 탓에 여차하면 닿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질색하며 몸을 틀어 창을 향하진 않았다. 그렇게 시호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