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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3화

1. 열아홉, 열하나 (3)





은형은 괜히 제가 오버한 건가 싶어서 입맛을 다셨다. 세상이 흉흉하다곤 하지만 이렇게 밝은 아파트 부지 내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산책 겸 운동을 많이 하는 공간에서 함부로 일을 벌이는 미친놈이 얼마나 될까. 이제야 드는 생각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근데 밤에 왜 혼자 놀이터에 나와 있었어?”

“……그냥.”

그러면서 도제가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뒤통수만 보여 준다. 은형은 동그랗고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는 뒤통수를 보면서 빈 쓰레기통을 고쳐 들었다.

“혹시 내일부터 개학이라 심란해서 그래?”

“우린 개학 다음 주야.”

“아, 그러냐. 좋겠네.”

다니는 학교가 다르니 개학하는 날짜도 달랐다. 은형은 무의식중에 비교를 하며 혀를 찼다. 어정쩡하게 금요일에 개학하느니 차라리 이 초등학생처럼 다음 주에 개학하는 게 얼마나 좋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근데 그 아저씨 진짜 뭐지? 경비 아저씨한테 말씀드려야 하나?”

걱정 어린 말에 도제가 뒤를 힐끔 쳐다봤다.

“정 걱정되면 내가 말해 둘게. 넌 신경 쓰지 마.”

“뭐?”

은형은 갑자기 뒷골이 당겨왔다.

“너? 지금 너, 나한테 너라고 했냐?”

“…….”

또 도제의 입이 닫혔다.

반말은 그렇다 쳐도 호칭 문제는 달랐다. 은형은 갑자기 여덟 살이나 어린 꼬마에게 ‘너’란 말을 들으니 혈압이 올랐다.

‘저 싸가지 진짜.’

은형이 이마와 눈을 손바닥으로 덮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앞길이 창창한 10대인데 고혈압에 걸릴 것 같았다.

“미안. 앞으론 형아라고 부를게.”

그런데 갑자기 불쑥 들려온 말에 고개를 들고 말았다.

“가자. 형아.”

“어, 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먼저 들어간 도제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형은 이상한 기분으로 따라 들어갔다.

도제가 순순히 사과를 했다. 역시 근본이 나쁜 애는 아닌가 보다. 그리고…….

‘형아라고? 형도 아니고?’

중학생이랑 초등학생을 비교하긴 뭐하지만 막내 남동생도 은형을 ‘형’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동생도 어렸을 땐 ‘형아’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형아라니.’

생각지도 못한 깜찍한 호칭에 아까처럼 앞에 서서 뒤통수만 보여 주는 도제가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순순히 사과를 해서인지, 아니면 퍽 귀여운 호칭을 써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곧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고 둘은 터벅터벅 복도로 걸어 나왔다. 어쩌다 보니 서로에게 옆집이라 나란히 서서 현관을 바라보게 됐는데, 은형은 제가 먼저 인사를 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이미 도어 록을 해제한 도제를 쳐다봤다.

“도제야.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꼭 소리쳐. 조심하고.”

사실 옆집 꼬마에게 너무 참견하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었다. 그래서 되도록 이 이상 관섭하지 않으려 했지만…… 영 신경 쓰였다.

“형아.”

“응?”

도제가 제법 부드럽게 은형을 불렀다. 그러곤 은형과 꽤 길게 눈을 마주하더니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잘 자.”

도제는 말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닫힌 문에서 잠기는 소리가 들렸고, 은형은 혼자 남아 후덥지근한 바람을 맞았다.

‘어…… 뭐야. 쟤, 꽤 귀엽게 구네.’

괜히 목을 쓸다가 피식 웃곤 뒤늦게 문을 열었다.



***



은형은 개학한 학교에서 오히려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었다. 고3이라고 방학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다른 지역 학원에 다녔던 그다. 차라리 친구들이라도 많은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 웃고 떠드는 게 더 좋았다. 그렇다곤 하더라도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만 가는 입시에 대한 압박은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조용해지는 교실 속에서 은형도 진지한 얼굴로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렇게 공부에 집중하자 금세 하교 시간이 됐다.

“아으, 추워. 얼어 뒤지겠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몸을 부르르 떤 은형의 친구가 우드드 소리를 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정돈 아니지.”

그래도 확실히 밤엔 서늘해서 손가락 끝이 차갑게 느껴지긴 했다. 은형은 돌연 오늘도 도제가 집 앞 놀이터 미끄럼틀 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대체 왜 밤에 밖으로 나도는지 알 수가 없다. 학교를 꼬박꼬박 다니는 걸 보니 왕따는 아닌 것 같고, 부모님도 좋은 분 같았다. 옷차림이나 몰골을 보면 가정 폭력이나 학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도제의 엄마가 도제에게 이기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 집 앞 놀이터에서 빨간 후드 티를 입고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소년이 보였다. 은형은 자연스럽게 도제를 향해 걸어갔다.

“너 안 춥냐?”

툭 내던진 말에는 묵묵부답이다. 그런 것쯤이야 이젠 완전히 적응해 답을 듣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팔을 잡아 일으켰다.

“목도리 했네. 목도리도 좋지만 겉옷이라도 입고 나와.”

외투 하나 없이 두툼한 후드 티만 덜렁 입고 목도리를 한 꼴이 10월 말 밤 추위엔 조금 부족해 보였다.

“야, 황도. 올빼미도 아니고 왜 밤마다 나와?”

여름엔 그래도 괜찮았는데 추워지니 사람도 없고 으슥한 데다가 애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 됐다.

“나 기다리는 건 아닐 테고.”

그 말에 도제가 목도리를 코끝까지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은형은 막연하게 했던 의심을 내던진 말에 반응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살짝 허리를 굽히고 일부러 시선을 맞췄다.

“정말 나 기다리는 거야?”

대답 없이 어둠 속에서 더 어두워진 눈만이 은형을 향할 뿐이건만 은형이 씨익 웃었다.

“오. 진짜인가 보다?”

“자뻑 쩌네.”

“…….”

갑작스런 공격에 말문이 막힌 은형이 제 가슴팍 정도 오는 도제의 머리를 툭 쥐어박으려다 멈칫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머리를 때릴 수 있겠냐며 올렸던 손을 내리고 다시 도제의 팔을 잡았다. 아이는 언제나 그렇듯 순순히 잡혔다.

“이제 수능 때까진 학원 다닐 거야. 자정 전엔 못 들어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

도제가 강하게 힘을 줘 저보다 센 은형의 손에서 벗어났다. 은형은 팔을 뿌리친 도제의 얼굴을 가만 살폈다. 목도리에 가려져 있지만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중이다. 그러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미성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아. 나 내일부터 주번이야.”

“응?”

9층에 도착했다. 도제가 목도리를 내리며 입술을 열었다.

“학교 일찍 가야 하는데 같이 갈래?”

등하교 메이트가 따로 있었지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요즘은 각자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오다가다 만난 친구가 있으면 같이 학교에 가기도 하고 집에 오기도 했는데, 설마하니 초등학생에게 같이 등교하자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은형이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도제가 은형을 보려고 수를 쓰는 것 같단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2주 정도.”

“무슨 주번을 2주씩이나 하냐.”

“벌 받는 거라서.”

하지만 그럴듯한 도제의 말에 은형은 의심을 거두었다.

‘그래. 얘가 굳이 아침잠까지 줄여 가며 날 보려 하겠어.’

집 문 앞에 선 은형은 도제가 다니는 학교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곧 은형의 학교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초등학교를 떠올린 후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까지 가는데?”

“7시 30분.”

“아니, 무슨 벌을 받길래 초딩이 그렇게 일찍 가?”

“알아서 뭐 하게.”

답하기도 짜증난다는 건가. 대화 내용은 좀 그랬지만 둘은 만난 이후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제일 길게 대화를 했다. 은형은 그 사실이 뿌듯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승낙했다.

“얼추 시간 맞겠다. 같이 가자.”

그 말에 도제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은형은 서서히 접히는 눈가나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 더 부풀어 오르는 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내일 봐.”

“……어.”

도제를 안 지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 보는 미소였다.

언제나 무표정하거나 부정적인 표정. 예를 들면 짜증, 황당함 등이 담긴 표정만 봤기에 은형에게 도제의 미소는 상당히 인상 깊게 다가왔다. 그래서 덩달아 입꼬리를 올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은형은 핸드폰이 없는 도제 때문에 옆집 벨이라도 눌러야 하나 고민하며 인터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학교 안 가?”

“어…… 갈 거야.”

지각하겠다며 재촉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일단 문을 열고 나온 그는 지금까지 한 고민이 무색하게 이미 복도 난간에 기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나왔어? 나왔으면 벨이라도 누르지.”

오도카니 기다리고 있었을 걸 생각하자 괜히 미안해져 말을 건넸다. 괜찮다는 건지 도제는 반응 없이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 뒤를 은형이 따라갔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확인하니 바로 직전에 9층을 지나쳤는지 7층을 표시하고 있었다.

“혹시 오래 기다렸어?”

도제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너 7시 반까지 간다고 했나?”

이번엔 고개를 끄덕인다. 엘리베이터는 여러 사람을 태우고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지 느렸다.

“바로 갈 줄 알았으면 먼저 누르고 나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