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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2화

1. 열아홉, 열하나 (2)





‘인사라도 해야 하나.’

이미 아는 내색을 한 이상 이대로 스쳐 지나가기도 뭐해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대답했다. 은형이 눈을 반짝였다. 소년의 말이 짧은 건, 오히려 나이 차이가 많으니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 아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냥 귀여우니 봐주기로 했다.

“너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해?”

평소였으면 인사만 하고 갔을 텐데 학원에 가는 게 어지간히도 싫어 말을 걸었더니 어제처럼 답이 없다.

“왜 집에 안 들어가? 아. 나가는 건가?”

오전 8시 45분이었다. 들어가는 것보단 무슨 약속이 있든 학원에 가든 나가는 중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그중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그 당사자가 입을 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근데 애가 계속 답이 없다. 은형은 아이가 사교성은 적고 수줍음은 많은 성격이겠거니 하며 기다리다가 곧 8시 55분쯤 도착하는 학원 버스를 떠올리곤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어린 목소리가 은형을 잡았다.

“이름이 뭐야?”

“응? 나?”

갑자기 들려온 질문에 걸음을 멈춘 은형은 선 자리에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소년, 황도제는 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듯 가만히 민은형을 올려다봤다.

“형은 민은형이라고 해. 넌?”

“알았어.”

도제는 활짝 웃어 준 은형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저게 진짜…….”

갑자기 돈만 주고 물건은 받지 못한 기분이 돼 버린 은형은 멍하니 그 자리에 몇 초 동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늦게 울컥 올라온 짜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내가 참자.’

하지만 입이 조금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말인 어제와 달리 주중인 월요일은 밤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밖에서 밥을 먹고 오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은형은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곤 했다.

‘아, 배고파.’

허기진 배에 기운이 없어 발자국 소리를 저벅저벅 내며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 삐리릭 하고 도어 록이 풀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옆집이었다. 909호.

“…….”

“……어, 너.”

옆집 소년과 또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도 무시하지 못한 은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도제는 문을 연 상태로 은형을 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시선에 그 역시 도제에게 눈길을 주었다. 집에 가야 하는데, 그냥 가기엔 너무 빤히 쳐다보는 눈 때문에 마음에 불편했다. 흠, 흠, 목을 가다듬고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날도 어두운데 어디 가려고?”

“…….”

하지만 대답이 또 없다. 은형은 이젠 그러려니 하며 답을 기다리지 않고 908호로 가 키패드를 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자꾸 은형의 시야 옆에서 아른거린다. 어김없이 옆집 꼬마였다. 배고프고 지친 나머지 슬슬 거슬려서 옆을 보며 물었다.

“왜?”

열린 문짝 뒤로 도제의 얼굴이 튀어나와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제에 대답은 잘 하지 않는다. 은형은 자꾸 관찰당하는 기분에 손가락을 내리고 소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년의 곱상한 얼굴에 어울리는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는 찰나…….

“황도제, 너 문 열고 뭐 해! 모기 들어와!”

“아, 잠깐……. 엄마!”

그러더니 빼꼼 나와 있던 도제의 머리가 쏙 들어가며 옆집 문이 쾅 닫혔다.

“뭐야?”

어이가 없는 은형이 황당하다는 듯 도제가 사라진 옆집 문을 보다 무심코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앗.”

놀라 다시 집어 들고 핸드폰이 무사한지 확인한 뒤에야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에선 자식을 위해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그래서 은형은 도제에 대한 일은 다 잊고 배고팠다고 우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방학 기간 내내 은형은 도제를 마주쳤다. 도제는 안녕이란 인사에만 간간히 답할 뿐 대부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고 최소 네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힐끔거리기만 했다.

‘고양이도 아니고.’

고양이라도 이 정도로 마주치면 냐옹 울기라도 하겠다.

뭐가 그리 어렵고 힘든지, 옆집 꼬마는 은형을 몰래 볼 뿐만 아니라 가끔은 봐도 모르는 척 도망을 갔다. 딴에는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쓴 눈치였으나 아직 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자꾸만 은형에게 들켜 버렸다.

‘뭐야?’

알기 어려운 꼬마. 초등학교 4학년, 11살.

‘황도제 저거.’

은근 사람 신경 거슬리게 군다.

하지만 거슬리는 것과는 별개로 은형은 고등학생으로서 초등학생인 도제에게 큰 관심을 주진 않았다. 오다가다 집 근처에서 마주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접점도 없었기 때문에 개학하기 하루 전, 학원 수업이 없는 유일한 마지막 휴일에 소파 위에서 늘어져서 보내는 동안엔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10시쯤, 일어난 일로 변화가 생겼다. 쓰레기를 들고 나가 분리수거를 하던 중이었다.

“너 혼자야?”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자신에게 한 질문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은형은 왠지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거기에는 쓰레기 수거함과 가까운 놀이터 미끄럼틀 끝에 앉아 있는 도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어떤 아저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허리를 굽혀 도제를 보고 있었다.

도제의 시선이 남자를 향했다. 그 전까진 은형을 몰래 뒤에서 보고 있던 눈이었다.

은형은 빈 통을 들고 조용히 그 장면을 보았다. 불과 5m 거리. 놀이터는 환한 조명으로 밝았고 방금 저쪽에선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설마 수상한 사람일까, 하면서도 은형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왜 여기 혼자 있어. 길 잃어버렸어?”

“……집 앞이에요.”

도제가 저를 바라보는 은형을 힐끗 본 뒤 중년 남성에게 답했다.

“그렇구나. 밤에 이렇게 혼자 있으면 위험해요.”

어떤 부부가 그 뒤를 지나가고 있다. 서늘한 밤에 나와서 산책을 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주변 풍경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저기 선 둘도 선량한 이웃 아저씨가 아이에게 관심을 주거나 혹은 오지랖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만에 하나란 것이 있어 은형은 아저씨 등 뒤쪽으로 발자국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걸어갔다.

솔직히 수상한 인물이라기엔 진짜 집 앞에 잠깐 나온 차림새의 남성이었다. 게다가 설령 진짜로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수법에 넘어갈 정도로 도제는 어리지 않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위험할 때 바로 소리치고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나이였다.

하지만 얼굴을 안다는 게 뭔지 은형은 2m 정도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푹신한 소재로 깔린 바닥 덕분에 남자는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듯했다.

“아저씨가 바래다줄까?”

수상하긴 한데 함부로 의심할 순 없어서 은형은 쓰레기통을 손에 들고 이렇게 말했다.

“집은 제가 데려갈게요.”

“어? 아…… 그럴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눈을 꿈뻑였다. 안경을 쓴 남자는 은형을 보고 허허 웃더니 동생이냐고 말을 건넸다.

“네. 동생이에요.”

도제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은형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조금 인상을 쓰며 물어봤지만, 도제는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저게 또 씹네.’

그때 아저씨가 도제를 보고 웃으며 은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니?”

“네?”

“…….”

말은 도제가 들었는데 놀라 말이 튀어나온 건 은형이었다. 오빠? 은형은 제 귀를 의심한 뒤 남자와 은형을 차례로 보았다. 눈썹을 찡그린 도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어딜 봐서 여자라는 걸까. 은형은 의아함에 소년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그리고 헐렁한 진홍색 오버 사이즈 반팔이나 짧은 반바지 밖으로 드러난 가는 체형, 옅은 색의 머리카락이나 곱게 진 쌍꺼풀 등.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짧은 머리를 한 소녀로 성별을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예쁜 외모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당연히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은형 입장에선 새로운 발견이었다.

‘예쁘장하긴 하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성별을 밝히는 것보단 빨리 자리를 뜨려 둘 사이로 슬쩍 몸을 밀어 넣고 도제의 팔을 잡아당겼다.

“집 가자.”

도제는 순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은형은 남자에게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인 뒤 일부러 들어가야 할 동 정문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엉뚱한 곳으로 걷고 있는데 아이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은형은 뒤에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몸을 돌려 건물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저 아저씨 뭐지?”

“의심돼?”

얼핏 동문서답이었지만 둘의 뜻은 상통했다. 도제는 은형이 왜 번거롭게 뒷문으로 들어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 보지 않은 자신을 챙기며 예민하게 굴고 있는 은형을 속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던 은형이 묻는다.

“아까 뭐, 수상한 낌새는 없었어?”

“…….”

그 질문에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도제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은형의 모습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무얼 입 밖에 꺼내야 좋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말없이 잡힌 팔을 풀었다. 은형도 순순히 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