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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장



죽으면서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주마등(走馬燈)이라고 한다.

흔히 주마등은 ‘생존본능’의 일환이다.

어떻게 해서든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의 지식들을 쥐어짜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마등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모두가 위기를 헤쳐 나가는 건 아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매우 달랐다.

내 인생이 아닌,

과거 속에 사라진 어느 누군가의 과거가 스쳐지나갔다.

“지금부터 백성들에게 1년 동안 폐를 끼치겠다. 짐이 무능한 황실과 조정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한다.”

죄기조(罪己詔).

황제로 즉위한 그는 놀랍게도 전국에 죄기조를 반포하여 황실의 무능과 조정의 폐해를 꾸짖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천하 만민에게 사죄한다.

옥좌에 오른 황제가 이름 모를 민초들에게 사죄하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에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복했고, 열일곱의 나이에 즉위한 젊은 황제에게 많은 기대와 성원을 보냈다.

“부패한 간신과 무능한 장수들은 용서치 않겠다. 짐의 손에 대명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젊은 황제는 즉위 초부터 많은 위명을 쌓았다.

제일 먼저, 명 황실을 유명무실케 만든 환관 위충현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무능한 황제들의 연이은 실패로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했으며, 국경을 정비하고 병사들을 조련시키며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황제는 훌륭했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부지런했고, 능력 역시 명군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장수들이 잇달아 패전하는 것은 비겁하게 목숨을 보전하려 했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오, 살고자 한다면 죽을 뿐이다.”

황제는 전쟁에서 패한 장수들을 모두 처형시켰다.

비겁하게 도망친 장수는 물론, 열심히 싸웠음에도 후금에 패배한 장수들 역시 군법을 이유로 숙청을 거듭해나갔다.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나아가 싸우자니 누르하치가 무섭고, 뒤로 물러나자니 황제가 무서웠다.

용서 없는 고집과 냉철한 고결함.

그것은 황제의 가장 큰 장점임과 동시에, 그의 가장 큰 단점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눈치를 보기 바쁘고, 지방관들은 배를 채우기 바쁘다. 심지어 장수들은 목숨을 아까워하는 겁쟁이에 불과하니, 연약한 백성들만 고단에 빠질 뿐이로다."

황제는 스스로 벽을 쌓았다.

어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벽을.

어릴 적부터 간신들에게 휘둘리는 황실을 보고 자란 탓에 그에게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당장에 충성하는 신하나 장수도 마찬가지.

어느 누구 하나 믿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며,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반란의 싹을 자르겠다.’

이윽고…….

얼마 뒤, 위대하고 총명한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이 여럿 생겨났다.

“황제를 죽여라!”

“백성들을 수탈한 황제다! 우리들을 지금껏 속여오지 않았느냐!”

우습게도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후금의 누르하치가 아니었다.

누르하치도.

그리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도.

황제에게 가로막혀 결코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다.

대명의 수도 북경(北京)을 함락시킨 반란군.

그들은 바로 황제를 굳게 믿었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며 반란군이 되었고, 지금껏 믿었던 황제를 향해 병장기를 겨누게 되었다.

“짐이 틀렸단 말이냐……. 백성들이 아주 잠시만, 적어도 5년만이라도 기다려 줬더라면… 홍타이지를 무너뜨릴 수 있었거늘. 대명의 하늘이 다시금 열릴 수 있었거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했다.

이미 신하들은 죄다 도망친 지 오래였고, 장정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의 곁에는 오직 환관 한 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열일곱의 나이에 즉위한 황제가 17년 동안 나라를 위해 분골쇄신하였음에도, 어느 누구도 황제를 믿어주지 않았다.

신하도, 장수도, 백성들까지도.

결국 그들 모두가 황제를 외면해버린 것이다.

“하늘이시여, 결국 홍타이지를 선택한 것입니까? 인생을 모두 바치면서까지 나라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황제는 비참함을 토해냈다.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하늘을 향해 오열했다.

‘이제는 다 틀렸다. 결국 모든 것이 이대로 끝이 나는구나.’

반란군의 손에 잡히든.

오랑캐들에게 포로가 되던.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터.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황제는 사랑했던 황후와 공주들을 모두 죽였다.

반란군과 오랑캐, 그들 모두가 명 황실을 증오하고 있었으므로 분명 여인들까지도 모두 욕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나라를 일군 두 손으로 가족들을 죽였다.

이미 황제는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고 말았다. 죽어서도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백성들은 죄가 없다. 내 시체에만 그 울분을 풀어주길 바란다.”

황제는 회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이윽고 곁을 지켰던 환관 역시 목을 매달아 죽었고, 그렇게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는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온몸이 부서지도록 국정에 매달렸으며, 가족보다도 나라를 먼저 보살피며 17년을 보냈다.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지만, 죽는 그 순간까지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를 배신했던 자들이 그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그가 죽은 뒤의 일이었다.

“국고가 모두 텅텅 비었단 말이냐? 황실의 재물들이 모두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이냐!”

반란군의 수괴 이자성은 크게 한탄했다.

황제는 백성들에게서 걷은 조세를 결코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사치 또한 부리지 않았고, 본인도 누더기 같은 곤룡포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걷은 조세는 국경을 지키기 위해 국방비로 모두 사용하였으며, 심지어 황실의 오랜 보물들까지도 보태서 사용했다.

“대명의 마지막 불꽃이 사라졌구나. 우리들의 진정한 적수였다. 황제가 죽었으니 천하는 우리의 것이다.”

대청(大淸)으로 국호를 고치고 황제국을 선포한 여진족들 역시, 숭정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가 지독하게 물고 싸웠던 원수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뛰어난 군주였으며, 한족의 역사를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황제였음은 인정했다.

누르하치도, 홍타이지도.

숭정제가 있을 때에는 결코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서야 여진족들은 장성을 넘어 중원을 정복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짐에게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누군가가 염원했다.

어느 누군가의 강한 애원이자, 마지막 부탁.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그 백성들이 자신을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에도, 그는 여전히 명나라의 부활과 한족의 나라를 걱정했다.



* * *



[연표]



1598년 - 왜란(倭亂) 종결. 누르하치, 건주여진(建州女眞)을 통일하다.

1608년 - 광해군, 조선군왕 즉위.

1616년 - 누르하치, 해서여진(海西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을 통일하고 대가한(大可汗)과 무상가한(無上可汗)의 자리에 오르다. 후금(後金) 건국.

1617년 - 누르하치, 요동을 공격하다.

1618년 - 후금과 대명(大明) 대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시대가 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