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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과 세입자 2화

3. 아침 식사 (2)


오웰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반 때문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하얀 얼굴이 붉어지니 티 내고 싶지 않아도 선명하게 보였다. 반은 살면서 많은 귀족들을 보았지만 평민으로 추정되는 오웰도 귀족 도련님처럼 고왔다. 게다가 시커먼 남자들이 대부분인 흑기사단과 비교하면 마냥 그가 약하고 여리게 느껴졌다. 그런 그가 얼굴을 붉히니 반도 괜히 부끄러워져 물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 놓은 외투를 걸치고 검을 허리에 차니 평범한 집주인이 아니라 기사단장이 되었다. 현관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오웰이 따라왔다. 순한 미소를 지으며 오웰은 출근하는 반에게 손을 흔들었다.

‘배웅이라.’

반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기사단 기숙사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받는 배웅은 처음이었다. 그는 세입자로서 오웰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가슴 한구석에 몽글몽글한 기분이 피어났다. 괜히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



사실 세입자를 받는 동안 반도 땅과 건물을 팔려고 했었다. 하지만 만나는 부동산 중개인마다 땅 주소를 듣자마자 질색하면서 반을 내쫒았다. 대체 뭐가 문제인지 중개인을 잡고 물어도 보고, 기사단의 패를 보이고 을러도 보았으나 다들 새파랗게 질리기만 할 뿐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눈을 뒤집고 기절하는 중개인을 마지막으로 반은 매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 여왕과 왕실 기사단 외에 더 무서울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반의 의문은 인력 사무소 ‘라스퍼 베가스’에 도착해서도 계속 되었다.

바(bar)로 꾸며진 건물 지하에서 암호를 대고 직원을 따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라스퍼의 사무실이 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만 하면 밖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사람들의 괴성도 마법처럼 사라졌다. 반의 뒤에서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라스퍼 님, 저 노아입니다. 반 님이 오셨습니다.”

회전의자에 앉은 채 등을 보이고 있던 이는 그 소리에 냉큼 정면으로 의자를 돌렸다.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에 노란 눈동자를 가진 그가 안경을 벗고는 팔을 쫙 벌리며 환영했다.

“이게 누구야! 전쟁 영웅 램브란트 반 아슈엘 백작이 아닌가!”

“너는 내게 내 땅에 대해 알리지 않았지.”

반은 이를 갈며 검을 뽑았다. 밖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안의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사람 하나 없애기 좋은 곳 아닌가? 반이 라스퍼에게 한 걸음 다가서자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던 시커먼 정장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라스퍼는 곤란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오랜만에 만나서 왜 이러는데?”

“왜 이러는지 정말 몰라?”

“반이 내 전 여자 친구도 아니고…….”

검이 시퍼런 예기를 흘리며 라스퍼의 목 아래에서 멈췄다. 라스퍼가 식은땀을 흘리며 두 손을 들었다.

“이러지 말고 말로 하자. 우리가 그냥 친구니?”

“그냥 친구가 아닌데 내 땅과 건물에 쥐새끼들이 득시글거리게 놔두나? 난 분명 관리를 맡겼는데.”

“이유가 있어! 이유가 있다고. 검 좀 내려놓고 대화로 하자, 우리!”

울 것 같은 그의 표정에 반은 검을 거뒀다. 과장되게 안심한 티를 내는 라스퍼를 반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라스퍼는 그의 눈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니라면 네 목을 치겠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옆방에 마련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둘은 직원이 차를 내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라스퍼는 화를 내며 찾아온 친구를 위해 찻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라 주었다. 잔을 밀어 주며 라스퍼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점령당했어.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반은 답하지 않고 살기만 뿌려 댔다. 찻주전자를 내려 두며 라스퍼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반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찬찬히 설명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왕국 내부도 문제가 생겼다. 사회가 불안정해지니 그사이에 불행해진 이들이 많아졌고 범죄율도 치솟았다. 수도 내에서는 범죄자들의 집단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수도에 남은 백금기사단이 막기에 역부족일 만큼 범죄자 세계에 전국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다가 등장한 이가 ‘암굴왕’이었다. 암굴왕은 엄청난 무위로 범죄 조직들을 굴종시켰다. 그리고 지금 암굴의 자리, 그러니까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땅에 그들을 몰아넣었다. 일견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암굴이라는 거대한 암흑 세력이 탄생하였다.

그 사이에서 라스퍼가 살아남은 비결은 암굴왕과 백금기사단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했기 때문이란다. 지금 반이 살고 있는 예쁜 3층 주택도 암굴왕이 한눈판 사이에 라스퍼 베가스의 사람들이 점거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사단 다 몰고 가서 밀어 버리면?”

반의 입에서 나온 말에 라스퍼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왕한테 말해 봤어? 아마 여왕도, 백금기사단도 원하지 않을 거야.”

반은 축객령을 내리던 여왕을 떠올렸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금기사단에서도 암굴왕의 존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끔찍한 전국 시대를 끝낸 이가 기사단도 아니고 암굴왕이라는 또 다른 범죄자였으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어쩌면 여왕과 암굴왕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분통 터질 일이었다.

반의 꽉 쥐어진 주먹을 라스퍼가 부드럽게 잡아 왔다.

“정말 미안해, 반. 내 능력으로는 역부족이었어.”

말미를 흐린 라스퍼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반이 그 땅을 사기 위해 어떻게 일해 왔는지. 1차 전쟁이 끝나고 술에 절어 기사를 그만두겠다고 외치던 그의 모습을 라스퍼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때 반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전쟁이 반을 망가뜨렸다. 반이 기사를 그만두고 싶은 만큼 라스퍼도 그가 평화를 찾길 바랐다.

자리에서 일어난 라스퍼는 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자 반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숨이 점점 느려졌다. 라스퍼는 반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그렇게 있었다.

“……그럼, 지금 내 땅이 팔리지 않는 이유가 뭐야?”

반이 라스퍼를 밀어 내며 물었다. 한결 풀어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라스퍼가 제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라스퍼는 뒷세계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하는 일이 정보를 다루는 일인데, 암굴이라고 조사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정확히는 더 조사해 봐야 아는데, 암굴왕이 뒤에서 방해하고 있나 봐. 암굴은 여러 개 조직이 뭉쳐 있는데 암굴왕이 있어서 겨우겨우 균형이 유지되는 중이야. 그런데 갑자기 이 지역의 진짜 주인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 혼란스러워지겠지.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암굴왕이라는 자가 내 부동산을 사면 되는 데 말이다.”

“……그러게 말이야. 그도 땅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게 아닐까? 여왕도 모르는데.”

둘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아도 합리적인 이유를 찾지 못했다.

반은 주택 주변을 지킬 사람들을 라스퍼에게 부탁했고, 라스퍼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그것도 무료로. 라스퍼 사전엔 없는 일이지만 이미 저번 계약의 99퍼센트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반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말았다.

반이 가고 난 후 라스퍼는 혼자서 차를 홀짝였다. 진정한 주인이 돌아왔으니 암굴에도 파란이 일 것이다. 라스퍼는 저 나름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4. 전쟁 선포


여왕이 반을 호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여왕과의 독대는 없었다. 이미 귀환 첫날에 대부분의 이야기가 다 끝난 마당에, 휴가 중인 기사를 왜 또 부르실까 고민하던 반은 알현실에 들어가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장 높은 곳, 붉은 융단을 깐 의자에 앉아 있는 주군. 그리고 그 앞에 처음 보는 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덮고 있는 보석 박힌 하얀 가면과 자수 장식으로 꾸며진 화려한 복식 탓에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는 꼭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이 빛이 들지도 않는 검은색이었다. 보석이 화려하게 장식된 지팡이를 짚은 그가 반을 보고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모든 것들이 그의 기묘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여왕 앞에 가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여왕이 일어나라 명했다. 서리가 낀 목소리에 반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땅 주인인 걸 들켰나.’

찔리는 게 있으니 더 무섭다. 반은 고개를 들어 여왕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전쟁 중 자주 마주한 여왕의 마음을 남들보다 잘 알게 되었다.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 안에는 화보다는 짜증이 서려 있었고 비틀린 입매 끝에는 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살짝 얹혀 있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반보다는 옆에 서 있는 기묘한 남자 때문일 것이다.

옆을 보니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가면 뒤에서 눈을 휘고 있었다.

‘……?’

어디선가 본 눈동자였다. 풀잎 같은 상쾌한 녹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왕에게 물었다.

“이분입니까?”

“그렇다.”

그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반은 낯선 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을 관찰하는 반에게 다가갔다.

“내게 사과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 실례이오만, 저는 당신을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흐음…….”

실망한 듯 그의 입매가 순식간에 아래를 향했다. 남자는 반보다 키가 약간 작았다. 풀빛 눈동자가 반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반 또한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에게 원한을 지니고 있을 만한 사람들을 탐색했다. 너무 많아서 누군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전쟁 영웅이란 본디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라고 반은 생각했다.

‘……얼른 기사를 그만둬야지.’

그가 속으로 씁쓸히 웃는데 갑자기 무릎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대비하지 못한 공격에 반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어찌해 볼 틈도 없이 지팡이 손잡이가 반의 턱을 밀어 올렸다.

“크윽.”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지팡이를 잡아 내리려 했지만 힘으로 이길 수가 없었다. 반의 자존심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긁혀 나갔다.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굴왕!”

그럼에도 암굴왕이란 자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세우며 지팡이를 치우지 않았다. 반을 노려보는 그 눈빛이 서리처럼 시렸다. 반도 지지 않고 그 눈을 마주했다. 한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 암굴왕이 입을 열었다.

“역시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군요. 제가 친히 알려 드려야 할까요?”

“남의 땅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내가 기억해야 하나?”

암굴의 암 자만 들어도 머리끝까지 화가 솟아오르는 반이 한 자, 한 자 짓씹으며 말했다. 그의 험한 말에 암굴왕이 잠시 멈칫하더니 한쪽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하, 지금, 왕실의 기사가 감히 내 영역에 침범한 상황인데. 누가 누구더러 범죄자란 겁니까? 전쟁 영웅이라더니 전장에 이지를 두고 오셨나 보군요.”

안 그래도 인내심이 바닥을 쳤던 반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암굴왕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란트! 안 돼!”

여왕이 단상에서 뛰어내리며 반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빠악!

박치기는 위대했다. 암굴왕은 가면을 짚으며 비틀비틀 물러섰다. 반의 허리춤에서 빠르게 뽑힌 검이 암굴왕을 향해 쇄도했다.

겨우 한쪽 눈을 뜬 암굴왕은 양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검을 막았다. 묵직한 소리가 알현실 안에 울려 퍼졌다. 반은 전장에서 적의 갑주를 깨부수듯 검을 여러 차례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 힘에 암굴왕의 발이 대리석 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밀려났다. 힘으론 밀리지 않는 그는 공격을 미끄러트리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쳤다.

반이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여유롭게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다시 한번 자리를 박차고 암굴왕의 가슴 쪽으로 파고들었지만 검 끝은 또 지팡이와 부딪혔다. 살짝 지팡이를 비틀어 검을 미끄러트린 암굴왕은 반의 옆구리를 차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반이 검집까지 뽑아 들고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암굴왕이 비틀거리면서 빈틈이 생겼다. 반은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공격에 집중한 반은 순간 스치며 본 그의 고약한 미소에 함정이란 걸 깨달았다. 전장에서도 하지 않던 실수였다.

퍼억!

지팡이가 반의 옆구리를 강하게 가격했다.

“1 대 1?”

지팡이를 어깨에 걸치며 암굴왕은 픽 웃었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반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하며 둥그렇게 이동했다. 반이 무기를 고쳐 쥐고 암굴왕이 지팡이를 돌리며 손목을 풀었다. 두 마리 맹수가 서로 파고들 틈을 찾으며 눈을 번뜩였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순간 자리를 박찼다.

“둘 다 멈춰!”

여왕의 노성이 알현실에 크게 울렸다. 현직 기사단장과 범죄자들의 왕이 대리석 바닥을 미끄러지며 부딪쳤다. 대결은 어처구니없게 둘이 엉켜 바닥을 구르는 것으로 끝났다.

“아윽…….”

덕분에 반은 아주 가까이서 암굴왕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정말로 어디선가 본 적 있었다. 풀빛 눈동자는 이 나라에 아주 희귀했다. 그사이 정신을 차린 암굴왕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입을 일자로 만들고 옷을 탁탁 터는 폼이 반의 신경을 긁었다.

반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암굴왕을 향해 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왕족을 호위하는 백금기사단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 긴 금발을 뒤로 땋은 기사가 반의 뒤로 달려가 옴짝달싹 못하게 안아 버렸다.

“테오도르!!”

“반,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알겠네만 여왕 폐하의 앞이네. 제발 진정해.”

백금기사단의 단장인 테오도르 달리는 암굴왕을 단번에 알아봤다. 가면을 문지르며 비식 웃는 태도에 그가 일부러 반을 도발했음을 눈치챘다.

전쟁을 겪으며 웬만한 도발에는 끄떡없던 친구가 반이었지만, 암굴왕은 역시 남달랐다. 반이 아레네스와의 2차 전쟁에 나간 동안 테오도르는 수도에서 암굴왕을 여러 번 대면했다. 암굴왕에겐 먹잇감을 덫으로 모는 노련함이 있었다. 상대를 하면 할수록 그에게 말려들게 되며, 속는지도 모르고 당하기 일쑤였다. 백금기사단은 암굴왕의 그림자만 보아도 치를 떠는데, 얼마 전에 돌아온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에게 덤볐을 것이다.

얼굴을 굳힌 여왕은 푸른 눈을 번뜩이며 반에게 다가와 검을 빼앗아 들었다. 어느새 검 끝이 암굴왕의 목 아래 놓였다.

“암굴왕. 항의를 하러 왔나, 아니면 왕실과 전쟁을 하러 왔나? 내 그대를 암굴의 족속과 다르게 보았네만 왕실을 능멸하는 짓거리를 하다니!”

암굴왕은 가면 속에서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여왕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부디 이 미천한 것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반은 어쩔 줄 모르고 검을 향해 손을 뻗다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검을 내려 주소서. 감히 폐하께 검을 들게 한 죄까지 모두 달게 받겠습니다…….”

기사가 있는데도 주군이 검을 들게 하였다. 그건 기사가 여왕의 검이 되지 못한단 뜻이었다. 여왕은 충실하게 살아왔던 그에게 이 방법이 즉효임을 알고 있었다. 둘 모두 진정하자 여왕은 백금기사단의 기사에게 검을 넘기며 말했다.

“다 나가라.”

여왕의 말에 암굴왕이 반을 한번 보더니 그 옆에선 테오도르를 살기를 담아 노려보았다. 솜털이 쭈뼛 서는 기세에 테오도르가 반과 암굴왕을 번갈아 바라봤다. 암굴왕은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세차게 돌려 밖으로 나갔다. 백금기사단이 그 뒤를 따라 나가고 반과 테오도르, 여왕만이 알현실 안에 남았다. 반은 눈만 굴려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 여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극대노……!’

그의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여왕은 정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여왕 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고 반은 때늦은 후회를 하였다. 여왕이 눈을 뜨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램브란트 반 아슈엘 백작.”

“……네, 폐하.”

“어째서 암굴 안에 집을 마련했나. 그것이 그들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란 걸 정녕 몰랐느냐?”

반은 감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여왕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뇨, 그들이 제 집과 땅을 침범했습니다.’

반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변명을 목구멍으로 씹어 먹으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여왕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더 깊이 숙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침묵하는 그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여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궁으로 들어와, 란트. 굳이 사저에 갈 필요도 없잖아. 기사단 기숙사도 아니고 하필이면 집을 암굴에 구했어?”

“…….”

“답하지 않을 테냐?”

반도 답답했다. 집과 땅을 매각할 수 있다면 조용히 팔고 다른 곳에 둥지를 틀고 싶었다.

‘제가 차명으로 땅과 건물을 많이 샀습니다……라고 절대 말 못해…….’

말없이 식은땀만 흘리는 반을 보고 결국 여왕이 말했다.

“흑기사단장 램브란트 반 아슈엘. 3개월간 정직이다. 기사단의 패를 반납하고 정직 기간에 왕궁 내 검 소지를 금지한다. 내 앞에서 유일하게 검을 들 수 있었던 권리도 거두겠다. 사저를 정리하고 궁으로 돌아와.”

여왕은 반과 테오도르를 두고 알현실을 나갔다. 반은 천천히 일어나 품에서 흑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패를 꺼내 테오도르의 손에 쥐여 줬다. 테오도르는 잠시 그 패를 봤다가 반에게 물었다.

“반. 암굴은 폐하의 역린이다. 암굴왕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 정말로.”

“됐다, 걱정하지 마라. 좀 긴 휴가라고 생각하면 돼.”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온 반은 옷을 정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테오도르는 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암굴왕이 왜 자신을 노려봤는지 고민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일을 했던가? 그의 앞에서 한 일이라곤 반을 잡고 있던 것뿐이었다.

‘설마, 안았다고?’

테오도르는 알현실에 혼자 남아 눈을 끔뻑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나갔다 여기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주말에 반을 끌고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