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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타샤 베이커리 카페



남자가 베이커리의 아치문을 넘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남색의 허리가 들어간 프록코트를 차려입은 키가 큰 남자는 곧장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남자를 본 나의 눈이 커졌다. 그는 전에 기디나 강변에서 나의 자수를 샀던 젊은 귀족이었다. 내게 가벼운 목례를 한 남자는 고즐튼 후작 영식과 나 사이에 서더니 나를 그의 커다란 등 뒤에 있게 했다.

“커튼을 드리운 가게는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인데 어찌 들어온 것이오?”

고즐튼 영식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고 그 남자가 바로 대꾸했다.

“커튼을 치기 전에 들어왔고, 저쪽 베이커리 가게 안에 있었소. 그나저나 버드런 고즐튼 후작 영식은 지금 귀족 여인을 희롱하는 것이오?”

“희롱? 희롱이라니! 나는 이 여인에게 받을 빚이 있을 뿐이고, 이것은 이 여인도 동의한 것이오.”

“그럼 그 빚이 무언지 들어나 봅시다.”

“무엄하오. 내가 누군 줄 알면 조용히 모른 척할 것이지 누구 앞이라고 나서는 것이오? 자신을 밝히지 못하는 걸 보니 어디 하급 귀족인가 본데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이러는 것인가?”

“내가 누군지는 곧 알게 될 거요. 그보다 내가 들은 게 맞는다면 후작가 영애를 돕기 위해 하녀가 귀족만 허용된 카페에 들어왔고, 후작 영식께서 그 하녀의 발목을 자른다고 하자 저 여인이 말렸고, 그 하녀를 벌주지 않는 대신 저 여인과 밤까지 함께 있겠다 한 것 아니오?”

“쳇, 어찌 되었건 이 여인은 나와 협상을 했소.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 하녀를 불러다 발목을 치겠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시나 본데…… 하녀가 주인을 부축해 이곳에 한 번 들어온 것과 그것을 빌미로 귀족 여인을 희롱하려 한 것, 어느 것이 더 큰 문제겠소?”

“희롱이 아니래도!”

“후작 영식, 나는 영식이 저 여인을 향해 하녀의 잘못을 용서하는 대신 차 한 잔, 강변에서, 밤까지 등등의 말을 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소. 물론 여기 주인과 종업원들까지도. 글쎄……. 그런 말을 다른 귀족들이 듣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소? 희롱이 아니라 생각할 것 같소?”

“아니, 이 작자가!”

“고즐튼 후작님께서 다이크 왕국에 대규모 상단을 이끌고 가신 것으로 알고 있소. 자신이 제국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가주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 후작 영식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얽힌 것을 아시면 후작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소? 자, 어쩌겠소? 저 영애를 보내고 이제 나와 이야기해 보겠소?”

고즐튼 영식의 가는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카페는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차가운 정적으로 가득 찼다. 고즐튼 영식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려 버렸다. 귀족 남자가 나를 향해 살짝 돌아섰다. 그는 나에게 어서 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황금빛과 고동색이 섞인 귀족 남자의 눈은 기디나 강변에서 나를 보던 눈과 같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나는 고즐튼 후작 영식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고, 그 귀족 남자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굽혀 최대한의 예를 표한 뒤에야 베이커리 쪽으로 나왔다. 주인이 걱정했던 듯 나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안타까움과 안심이 뒤섞인 그의 얼굴을 보니 긴장이 풀린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펠리체 영애와 로사가 걱정된 나머지 나는 다시 몸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주인이 대신 열어 주며 나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주인의 뒤를 보니 종업원들이 모두 주인과 마찬가지로 허리 굽혀 나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갈 때까지 쉬이 허리를 펴지 않았다.



*



벌써 어둑한 시간이라 바쁘게 걸음을 옮겨 후작가로 향했다. 펠리체 영애나 로사가 무사히 저택에 도착해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후작저에 도착하여 커다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로비는 상당히 어수선했다. 많다 싶을 정도의 기사들과 하인들, 하녀들이 있었고 로비 옆 응접실 중 제일 큰 곳에서 나오는 펠리체 영애의 큰 목소리는 현관까지 울릴 정도로 컸다.

“오빠, 빨리! 빨리! 제스나 선생님이…… 그 후작 영식이……. 가야 된다고!”

펠리체 영애는 너무 흥분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는 널찍한 응접실 안에 하녀장, 집사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테일스 영식과 기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펠리체 영애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저기 있네, 제스나 선생.”

나를 발견한 테일스 영식이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펠리체 영애와 로사가 동시에 달려왔다. 영애가 내게 안기고, 로사가 그 옆에 서서 흐느끼기 시작하자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테일스 영식이 입을 열었다.

“누가 이 상황에 대해 말해 보라.”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가 입을 열려는데 로사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로사는 고개를 숙이고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제가 오늘 오후 국립 도서관에 아가씨를 모시고 갔다 오는 길에 타샤 베이커리 카페에 함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타샤 베이커리 카페? 거긴 귀족 전용인데 네가 펠리체랑 거길 들어갔다고?”

테일스 영식이 다그치듯 로사에게 묻자, 펠리체 영애가 나에게서 떨어져 몸을 테일스 영식 쪽으로 돌렸다.

“로사 잘못 아니야! 내가 또 데리고 간 거라고!”

“또? 그럼 한 번이 아니야? 음……. 그래서?”

테일스 영식의 목소리가 더없이 낮아졌다. 펠리체 영애가 머뭇거리며 영식의 눈치를 보다 입을 다물었다. 한껏 움츠린 영애를 보며 로사가 다시 이어 말했다.

“그런데 거기 계신 고즐튼 후작 영식께서 제가 카페에 들어온 것에 대노하시며 즉결 심판으로 저의 한쪽 발목을 자르려 하셨습니다.”

“헉!”

여기저기서 숨이 멎는 소리와 탄식의 소리가 합쳐져 들려왔다. 어린 소녀의 발목을 자른다는 것은 보기 힘든 중벌이었다. 후작 영식의 눈 밑이 굳어졌고 응접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때 우연히 그 가게 앞을 지나던 제스나 영애께서 저희를 보시고 카페로 들어오셨습니다. 영애께서는 펠리체 아가씨께서 다리를 다쳐 제가 잠시 아가씨를 모시고 카페에 들어온 거라 거짓말을 해 주시며 고즐튼 후작 영식께 용서를 구하셨는데……. 그 고즐튼 후작 영식이…….”

다들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뜸 들이던 로사가 생각만 해도 괴롭다는 듯 눈을 꼭 감은 채 어렵게 말을 이었다.

“그 영식이 저의 잘못을 눈감는 대신 제스나 선생님과 차를 마시고 밤까지 같이 있다가 마차로 데려다주겠다 하셨습니다. 제스나 선생님께서는…… 저를 구하시려고…… 그 후작 영식 곁에 남으셔서……. 그래서…….”

로사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자 나이 든 하녀 여럿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싸늘한 기운이 내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나는 진정 기사들의 살기가 무엇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심지어 공부만 하는 모범생 같은 테일스 영식도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그래서…… 너희는 제스나 선생을 그대로 두고 온 것인가?”

날카로운 검과 같은 테일스 영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집으로 와서 오빠랑 기사들을 찾았잖아! 왜 이렇게 늦은 거야! 기사들만으론 제스나 선생님을 구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너무 무서웠어. 그 후작 영식이 다시 마음을 바꿔 우리 로사의 발목을 자를까 봐 너무 무서웠단 말이야! 엉엉엉…….”

펠리체 영애는 교양이고 예절이고 없이 사람들 앞에서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펠리체 시출러, 당장 울음 그쳐.”

테일스 영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펠리체 영애가 테일스 영식을 보며 울음을 꾹 참았다. 테일스 영식의 푸른 눈이 그가 품은 살기로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의 눈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제스나 선생은 어떻게 그에게서 빠져나온 것이오?”

서늘한 음성으로 나에게 질문이 오자 순간 당황했다.

“고맙게도 어떤 신사분의 도움을 받아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테일스 영식이 눈을 내리고 잠시 생각하듯 손을 올려 그의 날렵한 턱선을 매만졌다.

“그 신사가 누군지 아시오?”

“모릅니다.”

“……그렇군.”

그가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펠리체 영애를 보고 차갑게 물었다.

“아까 너희가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간 적이 또 있었다고 했지?”

“그건……. 항상 사람이 한두 명만 있을 때 갔어. 사람 없는 시간을 골라서. 그리고 그때마다 거기 있던 영애들은 다 허락했단 말이야. 내가 로사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그들이 네가 누군지 알았고?”

“내가 누군지도 알고 또 기꺼이 허락했다고!”

“단 한 명의 영애도 너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 없었단 말이야? 그 영애들은 너에게 아부하려 법을 잘도 어겼군그래. 법을 다시 알려 주지 못할망정…….”

“나도 몰랐어! 그게 그렇게 큰일인 줄. 나는…… 나는 우리 로사가 밖에 혼자 있는 게 싫었다고!”

펠리체 영애는 오빠인 테일스 영식에게 덤비듯 말하다 눈치를 보느라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있었어. 하녀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한 사람……. 여기 제스나 선생님. 그땐 선생님 되기 전이었어. 나한테 로사를 데리고 들어오면 로사와 베이커리 카페 주인이 벌을 받게 된다고 그랬는데……. 그땐 선생님이 귀족 전용 공간에 하녀와 같이 있기 싫어서 한 말인 줄 알았어. 진짜 이렇게 큰일인 줄 몰랐다고……. 진짜야……. 흑흑흑…….”

펠리체 영애의 큰 외침이 응접실의 공간을 채우고도 남았다. 영애의 말이 끝난 응접실은 너무도 고요했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숨죽인 정적이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기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시출러 후작 영식, 이제 저녁 식사 시간도 지나가니 어서 그만 모두들 자리에서 물러나 식사를 할 수 있게 하시고, 많이 놀랐을 펠리체 영애와 로사가 쉴 수 있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의 말에 테일스 영식이 입을 열었다.

“펠리체, 부모님과 린드 경이 부재중인 것을 감사히 여겨라. 이 자리를 파하니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금일 후작가에 남는 기사는 식당으로 가 식사를 하고 그 외 기사들은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전하라. 그리고 펠리체와 로사는 어서 가서 쉬어라. 다른 하녀가 오늘 밤과 내일까지 펠리체의 수발을 들고, 로사는 내일 하루도 쉬도록 하라. 제스나 선생은 나를 좀 보도록 하시오. 모두 물러가도 좋다!”

테일스 영식의 명령에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테일스 영식은 내가 그의 곁으로 갈 때까지 서 있었다. 내가 그의 앞에 이르자 그는 뒤돌아 걸어갔고 나도 테일스 영식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꽤 화가 난 듯 걸음을 성큼성큼 걷고 있었는데 나는 따라가기에 벅찬 걸음이라 종종걸음을 걸어야 했다. 테일스 영식이 내 걸음걸이를 보더니 보폭을 작게 하여 걸었다. 그가 3층으로 올라가려 하자 나는 난처함에 잠시 주저했다.

“시출러 후작 영식.”

나보다 몇 칸 위에 선 테일스 영식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둘이 있을 땐 테일스 영식이라 불러도 좋소.”

“테일스 영식, 죄송한데 저는 3층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제스나 선생 혼자 개인적인 출입은 금지이나 지금은 나와 함께 가니 괜찮소.”

“네…….”

내 대답에 그가 뒤돌아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들어선 곳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내 방보다 훨씬 컸다. 웅장한 벽난로 근처로 어마어마하게 큰 책상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위로 서류들과 읽다 만 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명화 몇 점이 어두운 와인색의 벽지 위에 보기 좋게 걸려 있었고 두껍고 풍성한 주름의 커튼이 큰 창문의 양끝으로 적당한 볼륨감을 내보였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풍기는 깊은 숲에서 나는 청량한 숲 내음이 그의 집무실에도 나고 있었다.

남자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들어온 착각이 들어 나는 쉬이 걸음을 안쪽으로 내딛지 못했다. 테일스 영식은 집무실 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벨벳 소재의 일인용 의자를 가리키며 나에게 앉도록 권했다.

나는 머뭇대다 차분히 의자에 착석하였으나, 테일스 영식은 의자에 착석하지 않고 책상에 살짝 기대앉아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내 눈을 보며 빛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는 깊어진 눈매를 거두지 않았다. 나도 왠지 그에 지고 싶지 않아 턱을 올려 그의 강렬한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의 파란 눈이 고집스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서로를 응시했다.

테일스 영식이 답답한 듯 셔츠의 첫 단추를 풀어 헤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