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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오해와 위기



곧장 미로 화원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걷다가 키가 큰 미로 담장 아래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내리는 비에 기어이 오늘 하루 내내 꾹꾹 눌러 담은 눈물이 폭발했다. 빗소리에 내 울음이 섞여 젖어 들었다. 몇 년 동안의 설움을 다 쏟아 내는 듯 눈물은 쉬이 멈추지 못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목이 터져라 그리운 이름을 부르고 또 불러도 빗소리는 그 소리 또한 묻어 버렸다. 다시 사는 삶이라면 부모님이라도 뵐 수 있도록 차라리 어린 영애로 되돌려 놓을 것을 왜 지금이어야 했냐고 신에게 묻고 싶었다. 서글픔이 몸과 마음 모두를 가득 채운 채 나갈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



비가 조금씩 그치고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점심도 거른 채 신경을 많이 쓴 데다 너무 많은 눈물을 추운 빗속에서 쏟아 내어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설 수가 없었고, 이가 부딪힐 정도로 한기를 느껴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조금씩 미로 화원을 벗어나려다 비가 만든 얕은 구덩이에 미끄러져 크게 옆으로 휘청거렸다.

“조심하시오!”

넘어지려는 나를 등 뒤에서 누군가 잡았다. 정확히는 내 어깨를 양팔로 감싸 안고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따뜻한 기운이 한기를 녹이듯 훅 하고 덮쳐 왔다. 놀라 몸을 비틀자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실례하였소.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여 나도 모르게 큰 결례를 저질렀소.”

나만큼이나 흠뻑 젖은 테일스 영식이 고개를 숙여 사죄하며 내게 말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그가 나를 잡았음에도, 불쾌감보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떻게…….”

“이것을 전해 주려 뒤따라 왔다가…….”

좀 전에 연무장에 두고 온 내 손수건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조용히 그가 건네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다…… 들으셨습니까?”

“…….”

무거운 침묵은 긍정이었다.

“부끄러운 일들만 저지르는군요. 제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지 않소.”

그가 내 말을 끊으며 정면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예의 없는 나를 탓해 주시오, 영애. 영애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였소. 미안하오.”

검고 잘생긴 그의 눈썹에 빗물이 맺혀 있었다. 푸른 눈이 내 눈을 보지 못하고 내 코언저리에 멈춰 있었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변명 없이 그는 자기 행동을 바로 사과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저번 저녁 정찬 때도 그러하고, 지금도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의외였다.

“그럼 오늘의 일은 둘 다 잊어버리는 걸로 해요. 영식께서도 부끄러운 제 모습을 잊어 주시고, 저도 영식께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잊을게요.”

테일스 영식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내게 기대어 걷겠소?”

내가 또다시 비틀거리자 팔 하나를 내보이며 그가 말했다. 혼자 걸어가는 것은 무리일 듯하여 그의 팔에 내 손을 얹어 잡으며 공손히 말했다.

“그럼 화원 입구까지만 부탁드립니다.”

그의 단단한 팔을 잡고 기대어 걸으니 한결 걷기가 편했다. 팔을 통해 미세한 떨림이 전해져 오기에 그가 조금 힘든 것이라 생각되어 빨리 걸으려 노력했다. 어느덧 화원 입구에 다다라 테일스 영식에게 예를 다해 인사하고 저택 현관으로 천천히 홀로 걸어갔다. 현관에 이르러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내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한 자리에 계속 서 있는 영식이 보였다.

‘전생에선 그리 오만하더니…….’

그에게 목례를 해 보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니 기운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한기가 많이 사라지고 감기 기운도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허기진 배가 나를 식당으로 재촉했다. 저녁 식사를 혼자 하고 있으려니 문을 빠끔히 열고 로사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로사, 무슨 일이야? 식사는 했니?”

다정하게 묻자 로사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로인 영애.”

“제스나 선생님이라 불러도 돼.”

“제스나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아가씨께서 오늘 하신 행동이요. 아가씨도 말씀해 놓으시고 미안해하시는데 표현을 못 하시는 거예요. 오늘…… 선생님께서……. 너무 속상하실까 봐…… 저는…….”

로사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로사 앞에 섰다. 로사의 두 손을 맞잡고는 조용히 그녀에게 말했다.

“로사, 너는 참 착하고 좋은 아이야. 너는 너를 사랑하고 아끼는 좋은 주인도 만났지. 그녀도 너와 같이 좋은 사람인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너의 아가씨는 아직 어린 거야. 그녀도 언젠가 자랄 것이고, 그럼 자신의 감정을 조금 더 능숙하게 조절하는 능력도 생길 거야. 우리는 모두 하루만큼씩 더 자라고 성숙해지니까. 로사가 미안할 것은 없어. 그만 울렴.”

맞잡은 로사의 두 손을 더욱더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로사의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 손을 올려 로사의 얼굴에 가져다 대는 순간에 식당의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벌컥 열렸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영애? 로사, 설마 너 여기서 맞고 있던 거니?”

날카로운 펠리체 영애의 말이 들리고, 집사와 하녀장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펠리체 영애는 로사를 제 쪽으로 잡아끌더니 나를 씩씩거리며 째려보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식당을 나가 버렸다. 끌려가는 로사가 펠리체 영애에게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소리는 곧 사라졌다.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따라 들어왔던 한 명의 하녀가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곧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정말 타이밍이란 게 이렇게 기막히게 맞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가서 집사와 하녀장에게 오해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로사가 상황에 대해 정확히 말해 주는 것 외엔 오해를 풀 방법이 없었다. 귀족 영애가 하녀를 혼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름만 귀족인 가정 교사가 후작가 하녀에게 손찌검했다는 것은 모든 후작가 하인들의 미움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한순간 후작가의 환영받지 못할 악녀가 된 기분이었다. 깊은 한숨이 식당을 채웠다.

그다음 날부터 로사는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로사 때문에 참는 줄 아세요. 로사는 왜 영애 편을 드는 건지, 흥!”

나를 향한 펠리체 영애의 적대감은 오해를 풀 길 없이 그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



제국력 895년 8월 11일.

일주일이 더 지났다. 후작가에 들어온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이틀 전, 고즐튼 후작이 대규모 상단을 이끌고 다이크 왕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들 고즐튼 후작 영식은 영지의 일을 보며 가주의 대리 역할을 위해 제국에 남았다고 했다. 내 후작가의 생활은 그대로였으나, 역시나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퍼져서인지 하인과 하녀들의 말과 행동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빨리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내가 후작가에서 더 있을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펠리체 영애가 오늘 오후 국립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귀족 영애들의 교양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로 오전에 두 수업을 모두 마치고, 점심 식사 후 거리로 나왔다. 어제 집사로부터 첫 급여를 받은 터라 드레스 몇 벌 사기로 한 까닭이었다.

한 벌은 고급 드레스 숍에 가서 연회나 결혼식에 입을 만한 것으로, 나머지 세 벌 정도는 중저가 드레스 숍에서 평상복을 겸할 드레스를 살 계획으로 고급 드레스 숍에 먼저 들렀다. 다행히 많은 귀족 영애들이 교양 모임에 간 덕분인지 숍이 한산하여 연한 분홍빛이 감도는 엠파이어 드레스를 바로 고를 수 있었다.

종업원이 요즘 유행하는 벨 스타일이나 프린세스 스타일의 드레스를 권했으나, 그 드레스는 코르셋을 반드시 입어야 했고 하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 정중히 거절했다. 그 후에 중저가 드레스 숍을 들러 슈미즈 드레스와 폼이 약간 여유로운 A라인 드레스를 고른 뒤, 베이커리 카페로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드레스는 며칠 뒤 찾으러 가면 되었다.

베이커리 카페의 큰 창을 지나다 펠리체 영애와 로사, 주인과 종업원이 모두 카페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귀족 남성의 뒷모습도 함께 보였다. 곧 카페의 창으로 커튼을 치려 걸어오는 종업원을 발견하고 나는 급히 베이커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운영 시간 중에 가게의 창에 커튼이 쳐지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안에서 밖에서는 보아선 안 될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며, 둘째는 그렇기에 커튼이 쳐진 후에는 출입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늦지 않게 안으로 들어선 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바짝 긴장했다.

내가 카페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버드런 고즐튼 후작 영식이었다. 그는 큰 창 앞에 있는 탁자 의자에 앉아 펠리체 영애와 하녀 로사를 보고 있었고, 그 뒤편의 벽에 주인과 종업원이 일렬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급히 펠리체 영애와 로사를 내 등 뒤에 숨기고 후작 영식에게 예를 다해 인사했다.

“고즐튼 후작 영식에게 인사 올립니다.”

고즐튼 영식이 나를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오, 로인 영애. 듣자 하니 시출러 후작가의 가정 교사로 들어갔다지? 그럼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 보시오. 나는 귀족들만 출입하는 카페에서 평화로이 내 시간을 보내고자 했소. 영애도 알다시피 귀족 전용 공간엔 개인 하녀도, 하인도 데리고 오지 못하오. 너도 나도 데리고 들어오면 시장통과 다를 바 없으니 제국의 법으로 정한 몇 안 되는 귀족만의 공간이지. 그런데 저기 시출러 영애가 이 하녀를 데리고 떡하니 들어오고 있더군. 그리하여 나는 카페 주인의 죄는 나중에 추궁하더라도 시출러 영애를 따라 카페로 들어온 저 하녀를 벌주려던 중이었소. 나는 즉결 심판으로 밖에 있는 나의 기사들을 불러 저 하녀의 발목 하나를 자르려 하고 있었다오. 자,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채 내 등 뒤에 선 두 소녀를 보았다. 로사는 이미 심하게 떨고 있었고, 펠리체 영애 또한 몸이 굳어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그때, 로사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정신을 잃을 듯한 가엾은 소녀의 입술이 파르라니 떨렸다. 어린 로사를 어떻게든 구해야 했다.

제국에는 후작가 이상 가문의 가주와 가주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절대 권리인 즉결 심판제가 있었다. 이는 오직 제국의 수도에서만 쓸 수 있는 것으로, 법을 어긴 것이 명백하고 증거와 증인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면 그 법을 어긴 평민에게는 즉결 심판으로 사형을 제외한 처벌을 바로 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평민의 범주에는 다른 가문의 하인도 포함된다.

사실 귀족 개인의 영지에는 즉결 심판제가 필요 없는 것이, 그 귀족이 곧 법이라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평민을 벌주거나 죽이거나 그 모든 것은 그 귀족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수도에서는 제국 황실의 법이 가장 우선시되기에 귀족이 자기의 영지에서 하듯 할 수 없었다. 다만 공작, 후작가에는 ‘즉결 심판제’라는 특권을 주어 어느 정도의 권력을 부여하였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고즐튼 후작 영식,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모든 것은 제 불찰입니다. 사실 저는 시출러 후작 영애를 모시고 카페에 같이 들어오려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마차에 깜빡 잊고 두고 온 물건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발목을 다쳐 오래 서 있기 불편한 펠리체 영애를 부축하던 하녀는 영애가 밖에 서서 절 기다리시는 것이 안쓰러웠고, 영애의 안위를 생각하는 갸륵한 마음에 영애를 모시고 이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녀는 영애만 자리에 착석시키고 바로 나가려 했을 뿐 이곳에 함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것입니다.”

“영애의 발목이 다친 것 같아 보이지 않던데?”

고즐튼 후작 영식의 말에 내가 곁눈질로 영애와 로사를 보았다. 펠리체 영애가 곧 눈치채고 로사에게 살짝 기대었다.

“드레스 때문에 다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식, 이 충직한 하녀는 영애께서 착용 중인 벨 드레스 자체가 다른 드레스보다 무거워 영애의 발목에 무리가 갈까 걱정된 데다 더운 여름 햇살 아래 서 있는 제 주인이 안쓰러워 주인을 위한 충심에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또한 카페 주인과 종업원들도 귀족 영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으니 하녀가 부축하여 들어오는 상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 제가 마차에서 지체하여 빠르게 오지 못한 탓입니다. 부디 고즐튼 후작 영식의 넓은 아량으로 영애의 하녀와 카페 주인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아무리 고즐튼 후작가의 후계자라도 귀족 여인, 그것도 시출러 후작가 영애의 발목을 보자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고즐튼 후작 영식이 내 말에 의심을 품더라도 더는 추궁하지 못할 것을 나는 알았다. 고즐튼 영식이 펠리체 영애와 로사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저들을 용서하는 대신에 나는 무엇을 얻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저 뱀 같은 이가 나를 끌고 들어갈 것을 직감했다.

“로인 영애가 나와 오늘 함께한다면 저들을 용서하지. 나와 여기서 차를 마신 뒤에 한가로운 기디나 강변에 마차를 타고 가서 경치를 즐기다 밤늦게 마차로 영애를 후작가에 데려다주도록 하겠네. 어떤가?”

눈을 꼭 감았다 떴다. 아직 어린 소녀의 발목을 자른다는 것은 죄에 비해 너무 심한 형벌이나 저 영식은 그렇게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펠리체 영애와 로사를 빨리 여기서 내보내 집으로 무사히 돌려보내야 했다. 펠리체 영애가 쓸데없는 짓을 할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 그녀도 이것이 최선임을 안 것인지 달리 대응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카페 주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주인이 펠리체 영애와 로사를 냉큼 데리고 나갔고 종업원들이 그 뒤를 이었다.

고즐튼 영식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 분위기를 즐기려는 듯 내 주위를 조용히 돌면서 내 몸을 꼼꼼히 다시 훑었다. 내 드레스 안을 투시라도 하는 양 그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저 이 끔찍한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랄 뿐이었다. 고즐튼 영식이 주인이 있는 베이커리 쪽으로 말을 했다.

“이제 커튼을 걷어도 좋소.”

그때, 어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직 걷지 마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