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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연한 만남



제국력 895년 7월 12일.

밤새 크게 뒤척였다. 텔론 대백작 부인이 가정 교사 추천서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불과 어제인데, 오늘 당장 찾아뵙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또 다른 수를 생각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운 탓이었다.

‘어쩐다…….’

우선 고즐튼 후작께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으니 큰 어려움은 넘었다 치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상단은 한 달 뒤에 출발이었다.

가정 교사를 찾는 집을 알아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 다우타 신문의 구인구직란을 보는 것이었다. 대부분이 인맥으로 가정 교사를 찾는 것이 고위 귀족의 구인 방법이라면 다우타 신문은 하위 귀족이 주로 쓰는 구인 방법으로, 고가의 가정 교사를 둘 수 없는 하위 귀족에게 적당한 가격의 교사와 사람을 찾는 데 가장 유용했다.

그 신문엔 여러 경제, 사회에 관한 기사와 귀족 간의 사랑에 관한 가십, 그리고 로맨스 연재소설도 있었으나, 글을 아는 평민과 하위 귀족이 주 타깃인 신문이기에 가십도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고, 로맨스 소설도 좀 더 외설적이었다.

오늘 시내로 나가 최신판 다우타 신문을 구매하여 구직에 나서 보고 우선 사정이 된다면 하위 귀족의 집이라도 빨리 입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위 귀족가보다 급여나 대우가 안 좋겠지만, 지금 사는 이곳보다 나쁠 곳이 어디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밝고, 하녀가 가져온 어제와 똑같은 메뉴의 식사를 뚝딱 마치고 나갈 채비를 끝냈다. 이번에도 자수 바구니를 들었는데 시간이 나면 이 근방에서 제일 경치가 좋은 기디나 강변 근처 공원에서 자수를 두며 기분 전환을 하고 올 참이었다.

활동이 편한 드레스에 모자를 눌러썼다. 긴 머리는 반묶음 하여 파란 리본으로 단정히 매듭을 지어 놓은 후였다. 얼마 들어 있지 않은 지갑을 챙겨 든 나는 유유히 남작가를 빠져나왔다. 먼저 스테로 가에 있는 신문 자판대로 가 다우타 신문을 사고 값을 치렀다. 그리고 기디나 강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디나 강변 공원이 유명한 것은 시내에 근접해 있을뿐더러 강 주위의 아름다운 수채화 같은 풍경을 공원에서 가깝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진 귀족가나 평민 연인들도 자주 나오는 곳인데, 그들의 다른 점은 귀족가의 자제들은 문장이 없는 마차를 타고 나와 마차 안에서 풍경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아직 청혼서가 오가지 않은 귀족 커플은 간혹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릴 수 있기에 각자 행동에 조심하고 신중해야 했다.

기디나 강변에 다다랐을 때, 남매로 보이는 평민 소년과 소녀가 떨어진 빵 조각을 집어 나누어 먹으려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여름 날씨로 인해 겨울처럼 얼어 죽는 사람들만 없을 뿐, 먹는 문제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얘들아, 그건 먹지 않는 게 좋겠어.”

빵 조각을 손에 쥔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예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아가씨. 저희는 배가 너무 고파요.”

소년이 말하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문을 사고 난 내 지갑에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들을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나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한 삼십 분 정도 참아 줄 수 있겠니?”

내 말에 그들이 서로 쳐다보다 다시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얘들아, 만일 다른 귀족으로 보이는 자와 대화할 때는 반드시 말로 대답을 해야 해. 고개를 끄덕이면 경을 칠지 몰라. 알겠지?”

“네.”

둘의 대답을 듣고 나는 바로 긴 벤치에 앉아 자수틀과 실을 꺼내 사이좋은 종달새 두 마리를 밑그림 없이 수놓기 시작했다. 배고픈 아이들을 생각해 집중에 집중을 더해서 열심히 수를 놓고 있을 때, 아이들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이게 빵이 되나요?”

“그럼, 이걸 가져다 드레스 숍이나 잡화점에 팔면 너희 빵값이랑 음료수값은 충분히 나올 거야. 조금만 기다려.”

대답을 마치고 다시 자수에 집중하려는데, 어떤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우리 옆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렸다.

“그렇다면 그 자수, 내가 사도 되겠습니까?”

잘 정돈된 신사복의 바지와 고급스러운 갈색 구두가 보이는 쪽으로 고개를 드니 젊은 남자가 우리를 향해 서 있었다. 금발을 가진 키가 큰 남자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아이들에게 금화 하나씩을 건넸다.

척 보기에도 너무 큰 금액인지라 당황해하고 있을 때, 아이들은 나와 그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꾸벅하고 저 멀리 뛰어갔다. 갑작스러운 일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남자는 벌써 내가 앉은 벤치 끝에 걸터앉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황금색과 고동색이 섞인, 개암빛 눈동자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고, 남자도 나를 보던 눈을 거두고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난히 흰 피부를 가진 남자는 제국인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자세가 바르고 단정한 것이 교육을 잘 받은 가문의 자제로 보였다.

“그럼, 자수가 다 놓여질 때까지 나는 여기서 풍경 구경이나 하겠습니다.”

“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가 자신을 밝히지 않기에 나도 나를 밝히지 않고 자수 놓기에 집중했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려 후텁지근한 여름 낮의 더위를 잠시 식혀 주었다. 그 결에 반묶음 한 내 갈색 머리카락이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내 얼굴을 간지럽히다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문득 따갑게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나는 고개 들어 나를 보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가 움찔하며 놀랐다.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하셨나 보네요. 이제 거의 다 했어요. 구입하신 분의 이니셜도 넣어 드릴 수 있는데…….”

내 물음에 남자가 내 자수를 힐끔 보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럼 J.D.라 넣어 주십시오.”

“예.”

이니셜을 모두 새긴 뒤, 자수틀에서 자수를 분리하고 남자에게 공손히 건넸다.

“신사분께서 치르신 값어치에는 못 미칠까 염려됩니다만,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받아 주시면 영광일 것입니다.”

남자가 내 얼굴을 한 번, 자수를 한 번 보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녀석이 기디나 강변이 가장 예쁘다 하여 풍경 구경차 왔는데 더 아름다운 자수를 갖게 되어 기쁨이 배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 말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는 기분 좋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서로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어차피 스쳐 지날 인연이니 그다지 서운할 것도 없었다. 나는 곧 가져왔던 다우타 신문을 펼치고 가정 교사 자리를 열심히 찾았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가정 교사 구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늦은 오후 나는 텔론 부인의 서찰을 전해 받았다. 텔론 대백작 부인은 몇 장의 추천서와 간단한 서찰을 보내왔는데 도니아 백작가와 제노신 백작가, 그리고 시출러 후작가에서 가정 교사를 찾는다는 것과 모두 음악과 자수의 교사를 구한다는 희소식이 적혀 있었다.

각 가문에 방문하여 면접 날짜를 잡고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준 추천서와 자수 몇 장을 함께 갖고 갈 것을 일러 주는 단정한 텔론 대백작 부인의 서찰에 감동한 나는 면접 날짜를 잡을 때 텔론 부인을 잠깐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국력 895년 7월 13일.

아침 식사 후에 길을 나서며 도니아 백작가와 제노신 백작가를 방문하여 면접 날짜를 잡았다. 면접 날짜는 집사나 하녀장이 그들의 주인이신 백작 부인의 스케줄에 따라 날짜를 잡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서 다녀야 했기에 이미 점심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배고픔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근처 베이커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갓 구워진 빵이 먹음직스러웠다. 한참을 고심하고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베이커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베이커리에 들어서자마자 옆쪽으로 나 있는 아치형 문 뒤에는 카페가 자리해 있었다. 빵과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 좋게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인 공간이었다. 베이커리는 귀족, 평민 구분 없이 들어가 빵을 살 수 있었으나, 그 아치형 문 뒤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는 오직 귀족인 자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간단한 요깃거리로 빵을 살폈다. 다른 비싼 빵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라 가장 싼 소라빵 한 개와 우유 한 잔을 시키고, 베이커리 카페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났기에 나는 인기 있는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탁 트인 너른 창밖을 보고 있으려니 나른해지는 기분이라 주문한 빵이 나올 때까지 조용히 눈을 감고 햇빛을 즐겼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종업원에게 짧은 목례로 고마움을 표하고 빵을 작게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한 초코 맛이 입안에 퍼지며 빵의 부드러움까지 더해 풍부한 맛을 내고 있었다. 만족감에 함박웃음을 짓고 우유도 조금 마시며 작은 사치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아, 그러니까 이리 오라고!”

시출러 후작가의 영애, 펠리체 시출러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펠리체 영애는 그녀의 수발 하녀로 보이는 소녀를 베이커리 카페로 이끌고 있었는데 손님이 나밖에 없어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내가 일어나 예를 갖추고 인사하자 그녀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영애, 이쪽은 내 하녀 로사예요. 밖은 덥고 나만 시원한 곳에서 빵과 음료를 먹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혹시 영애께서 이해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펠리체 영애는 내가 누군지 몰라 영애라고만 표현하여 말하고 있었다. 후작 영애의 옆에 영애보다 세 살 정도 더 들어 보이는 소녀가 서 있었다. 그 하녀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본래 하녀는 들어올 수 없는 구역이었다. 하녀들은 베이커리 근처나 마차에서 그녀의 주인이 나올 때까지 대기해야 했다.

“펠리체 시출러 후작 영애께 죄송합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본디 이곳은 귀족들만 출입해야 하며, 이를 어긴다면 베이커리 카페의 주인장과 영애의 하녀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영애와 주인장만 잠깐 눈감으면 될 게 아니오? 영애는 하녀와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그 잠깐을 참을 수 없는 것인가? 하녀도 사람이오!”

펠리체 시출러 영애가 살짝 흥분하여 붉은 눈을 번뜩이며 내게 큰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하녀가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시출러 영애, 영애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저희만 눈감는다고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안이한 생각입니다. 실례로, 창밖으로 목격한 이들을 통해 주변으로 말이 퍼질 수도 있고, 머무시는 동안 다른 귀족이 베이커리 카페에 방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영애께서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 또한 번거롭고 반드시 뜻이 잘 맞을 거라 장담하기도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제 의견을 올리자면, 베이커리 근처 식료품점 안에 평민이나 하녀들이 갈 수 있는 카페가 있으니 시간을 정해 하녀에게 그 시간까지 가 있으라 하시고, 영애께서는 여기서 시간을 보내시다 마차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어떨는지요?”

“어느 가문의 자제요?”

“로인 남작의 조카, 제스나 로인입니다.”

“남작의 조카? 감히 이름뿐인 귀족 영애가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군. 자신을 그리 높이고 싶소? 어디 나중에 나도 그대에게 신분의 큰 차이를 알려 주리다. 흥! 가자, 로사.”

펠리체 영애는 나에게 화를 내고 하녀 로사를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아직 법의 무서움을 모른다 싶었다. 엄연히 신분제가 있기에 귀족 전용 공간에는 아무리 몸종인 하녀라도 들어올 수 없었다. 함께 갈 수 있는 공간은 다른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에 하녀와 함께 하고 싶다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

내가 융통성 없는 것인가 생각하다 내 행동이 옳았다 스스로 다독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 일이 알려지면 펠리체 영애가 아끼는 저 하녀와 죄 없는 이곳의 주인장에게 해가 가게 될 것이고, 영애도 한동안 귀족들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고 한숨만 나기에 나는 그나마도 작은 소라빵을 더 먹지 못하고 곧 밖으로 나왔다. 이 길로 시출러 후작가로 가야 하는데, 다리에 무거운 추가 달린 듯 쉽사리 발을 옮기지 못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지.’

나도 몇 개 되지 않는 면접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운이 나빠 앞서 두 백작가에서 나를 뽑지 않으면 갈 곳이 없어지기에 후작가 면접도 꼭 치러야 했다.

나는 시출러 후작가에 도착해 집사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의 집무실에서 가정 교사 면접 날짜를 잡고 나오려는데 황실에서 집무 중이어야 할 테일스 후작 영식과 우연치 않게 마주쳤다. 테일스 영식의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가 눈으로 보이는 듯했다. 나는 예를 갖춰 인사하고 집사에게 목례한 뒤 후작가를 빠르게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텔론 대백작 부인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전하니 날은 벌써 어두운 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