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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악연의 시작



“텔론 백작님.”

“시출러 후작 영식.”

데리안과 테일스 영식은 서로 예를 갖추고 인사하더니 곧바로 서로 안으며 다시 인사했다.

“편하게 하자, 우리끼리는.”

“백작이 되니 너에게 ‘님’이란 호칭도 듣고. 하하하.”

둘의 호쾌한 인사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테라스로 들어온 이는 데리안이었다. 데리안은 나와 함께 있던 테일스 영식과 아는 척을 먼저 하였고 둘은 제법 친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이기에 나는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벽에 붙어 섰다. 내가 기다린 사람이 왔으니 나는 곧 이 테라스를 벗어날 터였다.

“우리 제스랑은 어떻게 같이 있는 거야?”

데리안이 나와 테일스 영식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제스?”

“아, 제스나는 우리 어머니의 절친이셨던 전 로인 남작 부인의 딸이야. 그래서 어릴 때부터 로시나와도 자매처럼 자랐고 또 나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지.”

데리안이 나를 보며 시원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테일스 후작 영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부담스럽도록 따갑게 쳐다보는 그를 무시하며 나는 데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데리안, 로시나는 어디 있는 거야? 아까 찾다가 못 찾아서…….”

“아, 로시나 지금 로켈 공작 영식하고 춤추고 있어. 둘이 꼭 붙어 다녀서 찾기 어려웠을 거야.”

“에휴, 그럼 나는 남작가 마차에 먼저 가 있을게. 여긴 좀 춥기도 하고, 로시나를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

데리안을 다시 만나 한결 편해진 마음 때문인지 말끝에 스스럼없는 밝은 웃음소리가 무심코 터져 나왔다.

“너는 지금도 그렇게 웃는구나? 내 앞에서만 그렇게 웃어. 남들이 뭐라고 해.”

“알아. 잔소리꾼 데리안. 데리안 앞이라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고.”

데리안을 보며 눈을 찡끗거리자 데리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제스, 너 팔에 소름 돋은 거야? 그렇게 추웠으면 들어가지 그랬어. 미련하게 여기서 날 계속 기다렸어?”

“그게…….”

나는 데리안과 대화하느라 잊고 있었던 테일스 영식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테일스 영식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그의 눈빛은 참으로 미묘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저를 기다려 준 로인 영애,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테일스 영식이 데리안 뒤에 서서 나를 빤히 보는 이 뻘쭘한 상황이 어색해 나는 데리안의 손 위에 내 손을 냉큼 올렸다. 데리안은 테일스 영식에게 먼저 가 보겠다며 나의 손을 잡은 채로 테라스를 나왔다. 젖혀진 커튼 너머에서 테일스 영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정원으로 향했다. 테일스 영식은 내게서 돌아섰지만 그의 깊은 바다 같은 푸른 눈은 뇌리에 깊게 남아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데리안의 에스코트로 무도회장에 들어서 첫 춤을 추게 되었다. 나는 성인식이며 사교계 데뷔탕트인 무대의 첫 파트너가 데리안인 것에 감사하며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에 내게로 눈을 맞춰 온 데리안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웠던 데리안의 따뜻한 미소에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은 느낌을 지우려 무던히 노력하다 보니 춤은 너무도 짧게 끝이 났다.

음악이 끝났을 때, 데리안은 그를 찾으러 온 하인을 따라 또다시 사라졌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었던 내가 벽 쪽으로 물러나 서 있었을 때, 멀리서 제리 남작과 그의 어머니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지금은 안 돼. 여기선 절대!’

입이 마르고 숨이 멎을 듯 두려웠던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와 로인 남작가의 마차를 찾았다.

“로인 남작가 마차는 벌써 출발했습죠.”

다른 마부의 말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렇게 빨리 자리를 떠날 리 없는 사람들인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마차는 벌써 출발한 지 오래였다.

‘정말 완벽한 하루구나. 그래도 내 성인식이었는데…….’

나는 한동안 서 있다가 걸어갈지 어쩔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걷기엔 너무 어두워 문제였고, 누군가의 마차를 얻어 타기에도 너무 면목 없고 실례된 일이라 쉽사리 결정짓지 못했다.

“제스! 제스, 여기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텔론 백작의 어머니인 텔론 대백작 부인이 백작가 문장이 그려진 마차에 타고 창을 통해 나를 연신 부르고 있었다.

“대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예를 차리다니, 서운하구나. 타거라. 남작가까지 데려다주마.”

마차 문을 열어 주는 하녀에게 잠시 고마움의 눈짓을 보내고 곧 마차에 올라탔다.

백작가 마차에는 대백작 부인과 하녀 한 명만이 있었다. 로시나 백작 영애와 데리안 텔론 백작 모두 그곳에 없어 나는 의문스럽게 안을 둘러보았다.

“로시나는 로켈 공작 영식이 우리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요청하여 못 이기는 척 보냈다. 이미 청혼서가 오가서 곧 날짜를 잡을 듯싶구나.”

“잘되었네요. 정말 반가운 이야기예요.”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로시나는 로켈 공작 영식과 결혼하여 공작 부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신혼 생활을 즐겼었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그녀가 결혼했지만, 우리의 처지는 참으로 달랐었다. 그때는 그녀라도 시부모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라 생각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 것이니? 로시나도 너의 안부를 항상 궁금해한단다.”

“이제 성인이 되어 남작가에서 나오려고 해요.”

“그 사람들이 그러라던?”

“아니오. 하지만 이제 성인인데 독립해야 할 것 같아서요. 우선 입주 가정 교사 자리를 얻어볼까 해요. 다른 건 몰라도 어린 영애의 첼사 연주나 자수는 잘 가르칠 수 있어서요.”

내 계획의 일부를 텔론 대백작 부인께 말하자 그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스, 그렇다면 조금 기다려 주겠니? 내가 좀 알아보고 너에게 알려 주마. 내 추천서를 가져가면 도움이 될 거야. 물론 면접에서 네 능력을 잘 표현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말이야.”

텔론 대백작 부인의 말은 참으로 감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추천서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고 어쩌면 내가 생각한 곳보다 좋은 교사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부끄럽지만 도움을 받도록 할게요.”

대화가 끝나 갈 때 즈음 마차는 남작가에 다다랐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



적막한 집 안에 서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영문을 몰라 쭈뼛쭈뼛 로비로 걸어 들어갔을 때, 집 안은 모르는 기사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나를 힐끔거리며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나는 곧 이 서늘한 분위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응접실에 데시 로인 남작과 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첼로와 남작 부인이 흐느끼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라 느끼며 나도 그 옆으로 가 섰다. 나도 무릎을 꿇어야 하나 조금 고민하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나의 맞은편엔 고즐튼 후작과 후작 영식이 함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이 입은 옷의 문양이 고즐튼 후작가의 문장인 듯했다. 고즐튼 후작은 데시 로인 남작이 가까이 모시는 자로, 데시 남작은 고즐튼 후작이라는 줄을 잡고 중앙 귀족들과 연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고즐튼 후작은 갈색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르며, 노년의 나이에도 꼿꼿한 성격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의 아들 고즐튼 후작 영식은 후작이 늦게 본 손 귀한 후작가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곱게 키워져 자기밖에 모르는 자였다.

아직은 어린 20세의 나이지만 결혼을 빨리 시키려 후작가에서 한창 신부를 찾는다는 소리를 언뜻 들었었다. 고즐튼 후작 영식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보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 기분이 나빠 급히 고개를 숙여 그의 눈길을 외면했다.

“그래서, 지금 자네는 몰랐다는 건가?”

고즐튼 후작의 성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정말 저는 몰랐습니다. 제가 어찌 간 크게 후작가의 광물을 팔고 뒷돈을 챙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디서 그런 소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억울한지 어떤지는 있어 보면 알겠지.”

고즐튼 후작은 잠시 남작의 가족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네가 제스나냐?”

“네, 고즐튼 후작님께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전 남작 부인의 미모가 너에게로 다 갔나 보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혹시 여행을 좋아하느냐?”

기분이 좀 풀린 듯 부드럽게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더 능글맞게 들렸다. 뜬금없는 소리에 기분이 찝찝하기만 했다.

“아닙니다.”

고즐튼 후작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이번 기회에 여행을 즐길 거리를 주마. 다음 상단에 같이 참여해 여행을 다녀오지 않겠나? 다이크 왕국으로 떠날 참이니 꽤 즐거울 텐데 말이야.”

고즐튼 후작은 주로 무역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데, 그 자신도 토지에서 엄청난 광물을 채취할 수 있어 많은 부를 쌓은 자였다. 그가 말한 상단은 무역을 떠나는 제국의 무역인들을 모아 함께 다른 왕국이나 제국으로 가는 무리였다.

1년에 두 차례씩 국가의 귀족과 함께 대규모 상단이 무역과 외교의 이름을 걸고 타 국가를 왕래했다. 고즐튼 후작은 지금 그 대규모 상단이 떠날 때에 나도 함께 따라나서라는 압박을 주는 것이었다.

“저는 그때 이미 가정 교사로 일하고 있을 것이라 불가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나에겐 배경도 없고 가족도 없었다. 나를 지킬 것은 오로지 나였기에 나는 그 어떤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다.

“무슨! 우리에게 상의도 없이 말이냐?”

데시 남작이 고즐튼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나를 다그쳤다.

“네, 저도 시출러 후작가의 무도회에서 텔론 대백작 부인께 제의를 받은 것이라 집으로 돌아오면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고즐튼 후작이 눈썹을 구기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가정 교사를 거절하면 그 이유를 물을 테고, 그럼 제가 상단과 여행을 가는 줄 모두가 알 것입니다.”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평민 여인도 아니고 귀족가에 소속된 여인을, 그것도 전 로인 남작의 딸을 상단에 묶어 보낸다는 것은 온 귀족가의 질타를 받기에 충분할 사항이었다. 옷만 벗지 않았을 뿐 술집의 여자나 거리 여자의 취급을 받는 것이 상단에서 데려가는 여인들이기 때문이었다.

고즐튼 후작 부자가 남작가를 자신들의 개 부리듯 한다는 것은 유명하였지만, 그래도 그 귀족가의 여인을 이리 하찮게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곱게 포장한다 해도 그들의 의중에 담긴 뜻은 하나였다. 이 더러운 이들을 보고 있자니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아쉽구먼. 그럼 어떤 가문에 가정 교사로 들어가는지 내 지켜보도록 하지.”

이윽고, 고즐튼 후작 부자와 기사들이 남작가를 떠났다. 남작 부부와 자제들은 긴장이 풀려 저마다 바닥에 널브러져 고통을 호소했고 하인들은 바쁘게 그들을 부축하며 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혼자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들어오며 최대한 빨리 일자리를 구하고 이 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즐튼 후작 부자의 행동이 너무도 찜찜하고 불길하여 내일 당장이라도 텔론 대백작 부인을 찾아봬야겠다 다짐했다. 물론 데시 로인 남작은 내가 또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겠지만, 이제 이 집을 나갈 마음을 정한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었다.

어서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