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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거로 회귀



다시 깨어난 때는 아침 햇살이 빛나는 아침이었다. 어리둥절하게 있던 나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떠나셨던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된 기쁨과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다는 슬픔이 교차하는 음울한 감정 속에서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어서 식사하세요. 오늘 데뷔탕트 드레스 맞추러 가는 날이잖아요.”

문을 열고 누군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차가운 여인의 말투, 시린 눈빛, 삐죽이는 입술. 그러나 낯익은 그녀의 얼굴과 익숙한 상황에 나는 벌떡 자리에 일어나 앉아 주위를 살펴봤다. 삐걱이는 침대, 금이 간 화장대, 문이 맞지 않는 서랍, 모서리 나간 탁자와 그 옆으로 비스듬히 방치된 의자, 그리고 낡은 옷장이 전부인 로인 남작가의 내 방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냉랭하게 구는 그녀 또한, 다시 눈에 담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작은어머니에 의해 새로 들어온 하녀 중 한 명이었다.

나를 유난히도 싫어했던 하녀를 보며 물었다.

“오늘이 몇 월 며칠이었지?”

그녀가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쟁반에 담아 가져온 내 아침 식사를 탁자에 거칠게 올려놓고 커튼을 힘차게 젖히며 창을 열었다.

“제국력 895년 7월 6일이잖아요. 날짜 세는 것도 잊었어요?”

날카롭게 내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제국력 895년, 내가 죽기 1년 반쯤 전으로 열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하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나 방 안의 위치, 그리고 항상 내 식사만 방으로 따로 넣어 주던 그때의 상황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탁자 앞에 앉았다.

‘죽음의 끝이 회귀라니…….’

식어 빠진 건더기 없는 수프와 딱딱한 빵을 내려다보았다. 어찌 회귀했는지 궁금하였으나, 거듭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식사하지 않고 쳐다만 보고 있는 내가 못마땅한 것인지 하녀가 식사를 가로채며 쟁반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침엔 입맛이 없는 법이죠. 제가 먹고 아가씨가 드셨다 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먹겠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하녀는 큰 걸음을 걸어 문 앞으로 갔다. 검은 치맛자락이 그녀의 발길에 빠르게 펄럭이며 금세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적막이 흐르는 작은 방에 나는 홀로 남겨졌다. 회귀한 이 삶이 내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내 삶은 여전히 비참했고, 우울했으므로 다시 인생을 사는 자체가 막연하고 답답할 따름이었다.

‘신이 사랑한 인간은 인생에 한 번 믿지 못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단다. 언젠가 네가 그 기회를 얻으면 너는 그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을 거야. 내 사랑 제스나, 만일 그 기회를 얻는다면 꼭 손에 쥐어라. 그리고 너만을 위해 써 다오.’

언젠가 아버지께서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자리에서 유유히 일어났다. 날 죽인 제리 남작과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들을 다시 대면하는 것은 내겐 너무 두려운 것이었다.

오랜 기간 억압과 핍박받는 생활에 길들여져 살아온 내가 현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회피하며 최대한 조심하고 안전하게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사는 삶의 첫발을 조심스레 내딛기로 했다.

급하게 드레스 숍으로 갈 채비를 시작했다. 자수틀과 자수 실 등을 넣어 둔 자수 바구니를 챙겼고, 옷은 가진 것 중에서 덜 해진 것을 꺼내어 입었다.

옅은 푸른색, 철 지난 디자인으로 된 드레스는 그나마 단정하게 보여 다행이었다. 마차를 타는 것은 데시 남작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나는 바구니를 들고 모자를 쓴 채 더운 여름날의 거리로 나섰다. 숍이 아주 멀지는 않아 걸어갈 만하다 자신을 다독이며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



드레스 숍에 도착했다. 숍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 로비에는 응접실이 따로 있었고 드레스들이 멋스럽게 로비 뒤쪽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2층은 작업실이 있는 곳으로 치수 재는 곳과 피팅하는 곳이 따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종 보석과 액세서리가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드레스 숍에 들어섰을 때,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종업원 두 명이 내게 다가와 드레스를 보여 주고 있던 차에 누군가 숍 안으로 들어섰다. 후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테일스 시출러와 그의 여동생 펠리체 시출러였다. 어린 하녀, 그리고 기사와 함께 서 있는 그들의 자세는 당당하고 위엄 있어 보였다.

후작 영식은 제국 최고의 미남답게 건장한 체격을 가졌으며, 빛나는 흑발에 시리도록 푸른 눈을 가진 신비로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의 동생인 후작 영애도 흑발에 붉은 눈을 가졌으며, 또래의 발랄함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십 대 초반의 영애였다.

그들을 오랜만에 보는 나는 잠시 얼어 자리에 서 있었다. 종업원들이 영식과 영애에게 인사했고 놀란 내가 그들을 따라 뒤늦게 인사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영식은 간단히 목례하고 응접실 소파에 앉았고, 영애는 오빠에게 도망가면 안 된다는 투정을 부리며 종업원들과 드레스를 고르러 로비 뒤편으로 사라졌다.

나 또한 숍 한가운데 멀뚱히 남았다. 사실 자수 바구니는 이럴 때를 대비해 가져온 것이었다. 드레스 숍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드나드는데, 선착순 따윈 이곳에 없었다. 나보다 높은 귀족가의 영애가 온다면 나는 당연히 뒤로 밀리고 그 영애의 일이 끝나야 내 차례가 오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진 암묵적인 드레스 숍만의 법칙이었다.

나는 남작가의 사람으로 한번 드레스 숍에 오면 언제나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가장 없는 오전 중에 오게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나보다 높은 귀족이 나타나 내 순위는 바로 밀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나는 조용히 응접실 큰 창을 마주 보는, 그나마 외진 자리의 소파에 앉아 아직 마치지 않은 자수틀과 실을 꺼내 자수를 놓기 시작했다. 자수는 시간 가는 것을 잊게 할 뿐 아니라 내가 잘하는 몇 안 되는 것이라 항상 가까이 두고 즐겨 놓았다.

톡토오옥…….

자수틀의 섬유를 뚫는 기분 좋은 소리가 응접실 안을 채웠다. 문득 누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 나는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고 저편에 앉아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응시하는 테일스 시출러 후작 영식과 뜻하지 않게 눈을 마주했다. 나를 향해 멸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그의 눈초리는 사납게 보였고, 서늘한 그의 태도는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수를 한 것도, 그에게 잘못한 것도 없던 나는 나를 질타하는 듯한 그의 차가운 눈빛이 몹시 불쾌했다. 테일스 후작 영식의 교만한 태도는 나로 하여금 지난 생에서 그와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시출러 후작가 무도회에서 있던 후작 영식과의 일은 잊히지 않는 상처였다. 그는 오만하고 자기 잘난 멋에 사는 작자였다. 내게는 좋은 기회였던 후작 영애의 가정 교사 자리를 마다하며 면접도 보지 않은 것도 실은 모두 이자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득, 전생의 삶에서 테일스 영식과 펠리체 영애를 이리 만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봤다. 곰곰이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기에 나는 생각을 접고 자수를 마저 놓으려 눈을 자수틀로 옮겼다.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은 참으로 집요하였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이제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테일스 후작 영식을 다시 쳐다보았다. 여전히 업신여기는 듯 한심하게 날 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테일스 영식은 의아한 눈길로 날 보며 짐짓 당황한 표정을 내비쳤다. 매서운 눈초리로 날 주시하던 좀 전과는 다르게 그의 푸른 눈은 묘한 일렁임으로 작게 흔들렸고, 날 향한 이유 없는 적의도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한순간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불편한 것이 있나요? 제가 종업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입을 열다 말고 다시 닫으며 차갑게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잘생긴 옆모습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오만하고 잘난 후작 영식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가 봐. 잠시 뒤에 와야겠어.’

내가 자리를 정리하려 하자 그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저벅저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해할 수 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정말 제멋대로인 자였다

나는 펠리체 영애가 떠난 후에야 드레스를 고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뒤라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녀를 찾아 점심 식사를 부탁하였다.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드레스 숍에서 만난 후작가 자제들을 생각했다.

전생에서의 나와 시출러 후작 영식의 첫 만남은 며칠 뒤 후작가에서 있을 무도회였으나 현생의 일은 전생과는 사뭇 달랐다. 전생과 현생은 오묘한 차이를 두고 변하고 있었다.

“야, 너 드레스 숍 갔다 왔다며? 뭐로 맞췄냐?”

데시 남작의 딸이며 사촌인 첼로가 내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녀에게 내 방문을 노크하는 예의를 찾는 건 포기한 지 오래였다. 주눅 들어 살았던 나는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항상 작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데뷔탕트를 성년식으로 치른 뒤 이 집에서 쫓겨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쫓겨날 것 뭐가 무섭나 싶기도 하면서, 새로 살게 된 삶은 전처럼 살지 않겠다 다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본능적으로 숙였던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러나 말아 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만큼은 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냥 싼 것……. 작은아버지께서 돈 쓰는 거 싫어하니까 그것에 맞게 샀어. 걱정 마.”

다른 때 같으면 우물거리다가 미안하다는 말을 할 차례였으나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첼로가 헛웃음을 웃었다.

“밤에 잠을 잘못 잤니? 어디서 말대꾸야, 이 거지가!”

내 말에 당황한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며 떨어야 할 내가 눈을 똑바로 맞추는 것이 영 못마땅한 것인지 한 대 칠 것처럼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움찔거리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나는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첼로, 내게 왜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네 분이 풀린다면 때리도록 해. 하지만, 곧 시출러 후작가에서 열릴 무도회에 내가 참석해야 한다는 것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날 때리면 거기서 벌어질 일에 대해서도 네가 책임져야 할 거야.”

“뭔 소리야?”

“글쎄……. 궁금하면 때려 봐. 텔론 대백작 부인이 내 몸이 멍든 것을 보면 어떻게 나오실지 보게 될 테니.”

“뭐?”

“말 그대로야. 텔론 대백작 부인을 비롯한 탤론 백작가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무도회에 참석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가뜩이나 나를 딸처럼 여기는 텔론 부인께선 더욱 잘 챙겨 주실 거고, 그동안 만나지 못해 미뤄 두었던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겠지. 이야기 도중 어느 때라도 내가 너에게 맞은 부위를 우연치 않게 드러내며 우울하고 가련한 표정을 짓는다면 텔론 대백작 부인께선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될까?”

내 얼굴이 붉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첼로를 똑바로 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 세차게 뛰었다. 첼로의 표정에 미묘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너 미쳤어? 왜 그래, 갑자기!”

이대로라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조심하라고. 남작가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모두 비밀일 수는 없다고 알려 주는 거야.”

첼로의 얼굴이 화산같이 붉게 변하더니 자기 화를 못 참고 내 자수 바구니에서 완성한 자수를 거칠게 꺼냈다. 함께 있던 가위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자 그녀는 가위를 들고 마구잡이로 자수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첼로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화를 풀어야 할 것이었고, 나는 이것으로 그녀의 화가 풀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첼로가 씩씩대며 내 방을 나가려는데, 마침 하녀가 내 늦은 점심을 갖고 들어왔다. 첼로는 뒤돌아 나를 보더니 훗 하고 코웃음을 치고 하녀가 가져온 쟁반을 빼앗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안 돼!’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주먹을 더 꽉 움켜쥐었다. 첼로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방에서 나갔다. 하녀가 멀어져 가는 첼로와 서 있는 나를 번갈아 보았다.

“점심은 이게 다예요. 저녁이 곧 될 테니 기다리세요. 아휴, 이걸 언제 치워.”

핀잔주듯 말하는 하녀에게 다가가 우두커니 섰다.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보던 그녀는 곧 말없이 바닥의 음식을 치우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찢겨진 자수와 못 먹을 점심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녀가 바닥의 음식을 치우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전생에서 시어머니가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식사 엎기였는데, 그녀는 수틀리면 일부러 식사를 엎어 버리고 우는 척을 했었다. 하녀에겐 그것을 치우지 못하게 하고 기어이 내가 무릎 꿇고 앉아 치우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 짓던 이가 제리 남작의 어머니였다.

‘그런 일도 있었구나…….’

고개를 돌려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며칠 뒤면 내 남편이었던 제리 남작을 만날 터였다. 그에게 나는 다시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그가 다정하게 대했던 일들이 생각나 마음이 흠칫거렸다. 그는 나를 죽인 사람이었으나, 오랜 시간 마음 둘 곳 없던 나에게 손 내밀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아기를 가졌다면 그도 변하지 않았을까?’

나는 어느새 또 나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것!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또 한 번 죽어 봐야 내가 미쳤었구나 할래?’

스스로를 질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고귀한 딸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슬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만을 하며 데뷔탕트 무도회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