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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영애의 교사일지



· 일러두기



본문 중에 두 나라 언어가 동시에 나올 경우 말라크 제국어는 “ ”로, 다이크 왕국어는 [ ]로, 데칸 왕국어는 『 』로 표기하였습니다.


1. 프롤로그. 제스나 제리 남작 부인



오늘도 혼자 정원에서 차를 마시던 참이었다. 작지만 소박한 이 정원은 손수 정리하고 꾸민 것으로 내가 밖에 나가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찾게 된 소일거리였다.

귀족 부인이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나 이 집에서 나를 귀족으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수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던 나는 깊고 어두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엔 나와 내 남편, 제리 남작이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정한 그는 내 옆에 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남편인 제리 남작과 나는 나란히 화원의 정자에 앉아 화사한 꽃들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좋은 부부였다.

그의 눈빛은 나를 향했었고, 나도 그의 모습에 듬직함을 느끼며 마냥 행복했었다. 그러나 그 다정함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양 리즈웰 자작 영애에게 모두 옮겨 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로인 남작 영애였던 시절을 생각했다. 로인 남작의 사랑스러운 외동딸이 나였다. 갈색 머리카락, 매력적인 파란 눈, 항상 칭찬만 받으며 로인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철없는 영애.

다이크 왕국과의 무역을 주업으로 삼던 가문의 영향으로 나는 이국적인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누비곤 했고, 다른 가문의 영애들의 부러움을 당연시하며 살았었다. 비록 어머니께서 일찍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와 유모, 그리고 나를 아껴 주는 나이 많은 하인들의 사랑에 여느 왕국의 공주 부럽지 않게 자랐다. 다른 얌전한 영애들과 달리 나무 타기, 산 타기, 물놀이, 말타기 등의 활동적인 취미도 많았는데 사람들은 이마저도 귀여워하며 나를 예뻐했다.

내 불행이 시작된 것은 열세 살 때였다. 다이크 왕국에서 제국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배가 태풍으로 뒤집혀 버린 그때 내 인생은 그 배와 같이 송두리째 뒤집혔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고 정신 차리면 또 우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제정신으로는 버티기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차라리 아버지와 함께 죽기를 원할 정도로 좌절했고, 절망했다. 아버지는 재혼도 하지 않았고, 아들도 없었다. 여인이 귀족 위를 이어받을 수 없는 제국의 법으로 인해 장례식 전에 먼 지방에 사는 작은아버지인 데시 로인이 남작저로 왔고, 로인 남작위를 이어받았다.

데시 로인.

그는 본래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의 부인인 제니와 딸 첼로, 아들 발체니 모두 그와 닮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빠르게 정리한 뒤 그 방을 차지하고 호화롭게 꾸미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나는 아버지의 유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뒤늦게 챙기려 나섰을 때는 남은 유품도 몇 없었고, 값이 될 만한 것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또한 그들은 하인들까지도 입맛에 맞는 자들로 바꾸어 버렸다. 나를 사랑하던 하인들과 유모 모두 나를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를 지켜 주던 사람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며,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이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되는 상황은 나를 점점 위축시켰다.

데시 남작은 내가 친하게 지내는 로시나 텔론 백작 영애와의 만남도 방해할 뿐 아니라 내 앞으로 오는 각종 티파티의 초대도 거절하였다. 나는 그의 행동에 크게 반항하지 못했다. 자신을 추스르기에도 나는 아직 어렸으며, 여러 중요한 판단을 하기에도 사려 깊지 못했다.

더 이상 티파티의 초대장도 오지 않고 나는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 갔다. 로시나의 오빠인 데리안 텔론이 종종 나를 방문하였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데시 남작으로 인해 나는 그와의 만남도 거절하기에 이르렀다. 내게 오는 서찰들은 내 손까지 오지 못하고 벽난로로 직행했다.

책을 보고 싶어도 저택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데시 남작 때문에 국립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집 안에서 하는 일이라곤 첼사를 치거나 자수를 놓는 일뿐이었다. 몇 년 동안의 독학으로 인해 자수 놓기와 첼사 연주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의미 없는 삶을 채우는 햇살과도 같은 것이었다.

열일곱 살 성인식은 시출러 후작가에서 연 무도회에서 사교계 데뷔탕트를 하는 것으로 마감했다. 데시 로인 남작의 딸 첼로를 위해 대대적인 성인식을 한 것과는 다른, 참으로 초라한 성인식이었으나 나는 내 성인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오만한 시출러 후작가의 후계자 테일스 시출러 후작 영식을 만나는 불운을 겪었으나, 나의 남편 로아 제리 남작을 만나는 내 인생 가장 큰 행운을 얻었었다.

나를 남작가에서 쫓아낼 궁리만 하던 데시 로인 남작은 성인이 되었다는 명분을 내세워 나를 내쫓기에 이르렀다. 그 즈음 나는 시출러 후작가 영애의 가정 교사 자리를 마다하고, 내게 진심으로 청혼하는 제리 남작과 결혼했다.

처음 1년간은 행복했다. 물론 나를 못마땅해하는 시어머니가 계셨지만, 제리 남작은 항상 나의 편을 들며 사랑을 표현했고 나는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

나를 향한 제리 남작의 사랑은 시어머니의 구박을 더 심하게 부추기는 빌미를 제공했지만, 소심하고 항상 주눅 들어 있던 나는 남편 몰래 나를 홀대하고 타박하는 시어머니께 반격하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섬기며 그녀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 아기 소식이 없자 남편도 점점 달라졌다. 그는 시어머니가 그의 앞에서 나를 은근슬쩍 구박하는 행동에도 모른 척 넘어가기에 이르렀고, 부쩍 자주 집을 비웠다. 사교계와 친밀한 것도 아니고,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닌 나는 최근에서야 남편이 리즈웰 자작 영애와 밀회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나에게 싫증 난 걸까?’

식어 가는 차 한 잔을 더 마셨을 때, 갑자기 울컥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의 어지러움에 탁자 위 식탁보의 끝을 한 손으로 잡았으나 쓰러지는 내 무게를 지탱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찻잔과 주전자가 넘어지는 나와 함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을 끔뻑이며 어지러움을 이겨 내려 하던 그때, 내가 놓은 자수를 팔아 선물해 준 고급스러운 갈색 장화와 역시 내 자수가 수놓아진, 화려한 장식의 하얀 드레스 옷자락이 보였다.

“효과가 없는 줄 알고 놀랐잖아. 괜히 돈만 쓴 줄 알고…….”

히죽대며 아양 떠는 시어머니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설마요. 리즈웰이 어렵게 구한 약이랬어요. 효과도 확실하고. 의사와 말도 맞춰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발표할 것이니 어머니도 그리 아세요.”

죽을 때 청각이 제일 늦게 능력을 잃는다는 것을 나는 몸소 느끼고 있었다. 나를 사랑한다 속삭이던 이가 나의 죽음을 보며 툭 하고 아무 감정 없는 말을 내뱉었다. 꽃들이 햇빛을 받아 그 아름다움을 뽐내는 찬란함 속에서 손끝을 움직일 힘조차 없어진 나는 조용히 누워 있을 따름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그 답을 구하기도 전에 암흑으로 끌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