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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나는 금세 기운이 빠졌다. 설마 로드는 한 번 관계를 맺은 여자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걸까. 나는 몇 번의 편지를 더 썼지만 결국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는 답장에 그제야 그를 포기해야 함을 깨달았다.

솔직히 서운하지 않을 리가, 그리고 괘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가 미련스럽게 매달리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한숨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외출 금지 기한이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 나는 그날도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책을 읽고 자수를 놓고 피아노를 치고, 단조로운 하루였다. 밤이 되어 잠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빗던 나는 습관처럼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문득 누군가 폭죽이라도 터뜨린 듯 창밖으로 아주 잠깐 불빛이 터졌다가 사그라졌다. 뭔가 싶어 빗을 내려놓고 창문에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뭐지?”

등 뒤에 있을 고용인들에게 물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비린 쇠 냄새가 코끝에 퍼졌고 나는 이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방금까지 멀쩡했던 고용인들이 모두 목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신입 고용인이었던 엘리제 한 명만을 빼고.

엘리제는 한 손에 피가 떨어지는 단검을 든 채 나를 무감하게 응시했다. 나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비명을 지르며 창문에 바짝 기대섰다. 엘리제가 내게 한 발짝 다가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창틀에 있던 화분을 집어 던졌다.

엘리제가 가볍게 피하며 나에게 한 발 더 성큼 다가왔다. 나는 계속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피해 구석으로 도망치다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가 방문 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는 순간 등에 격통이 느껴지며 그대로 자리에 엎어졌다.

엘리제는 여전히 이상스러울 만치 무감한 얼굴로 다가와 내 뒷덜미를 잡아챘고, 나는 그대로 방을 지나 복도와 계단 아래로 질질 끌려갔다. 저항도 못 하고 시체처럼 끌려가는 발끝 너머로 핏자국이 길게 그려지는 복도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현관이 있는 홀로 끌려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졌다. 정신이 없는 귓가로 부모님의 경악성이 들려왔다.

“데본!”

“그만. 움직이지 마십시오.”

아파서 흐느끼고 있는 와중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채로 어렵게 시선을 들자 부모님과 대치하고 선 채 나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로드를 볼 수 있었다. 정말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보단 고통이 먼저였다. 엘리제가 칼로 찌른 등이 너무 아파서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준비 끝났어.”

현관이 열리며 경호원 중 하나였던 남자가 나를 찌른 엘리제처럼 피가 가득 튄 옷차림으로 홀에 들어섰다. 로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문서를 넘기십시오.”

“뭐……를 찾는지 나는 전혀…….”

그 순간 로드의 총이 불을 뿜으며 내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하얗게 퍼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엘리제는 옆에서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감도는 차가운 공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데, 데본!”

어설프게 그의 말꼬리를 잡았던 아버지는 총에 맞은 나를 보곤 경악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그 순간 담담히 말하는 로드 때문에 다시 몸을 굳혔다. 로드는 총구의 방향을 살짝 바꿨다.

“다음엔 어깨입니다.”

“이놈!”

“문서를 넘겨주십시오.”

대체 문서란 게 뭐기에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제발 빨리 그걸 넘겨줘 버리고 나를 구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다급하게 얼버무리려는 것이 아닌 결연한 뭔가가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의 눈동자는 단단했다.

더 이상 나 따윈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정말로 모른다네.”

또 한 번의 총소리가 울렸다. 나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에 몸을 뒤틀며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살려 주세요!”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조금도 시선을 주지 않으셨다. 어머니도 그저 울고만 계실 뿐 날 보지 않았다.

로드는 내게서 총을 거뒀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가만히 서서 총구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경호원이었던 남자는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는 로드에게 말했다.

“얼마 안 남았어.”

그제야 로드가 약간 기울이고 있던 고개를 바로 했다. 이번엔 총구가 아버지께 향했다.

“문서는 여기 없는 모양이죠?”

“나는 아무것도 모르네.”

“알겠습니다.”

로드는 담담히 대꾸하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아버지의 가슴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힘없이 쓰러지는 아버지를 보며 숨이 턱 막혀 옴을 느꼈다.

로드는 여유롭게 다음 총알을 채우곤 두려움에 주저앉아 떨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총을 겨눴다.

“부인. 부인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문서가 어디에 있는지.”

어머니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두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로드의 총알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어머니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

그때 저택 어딘가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드와 엘리제, 그리고 경호원이었던 남자는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돌아섰다. 하다못해 완전히 죽여 고통을 끝내 주지도 않고 이렇듯 비참하게 혼자 자리에 버려둔 채 그들은 집을 나가 버렸다. 곧 또 다른 곳에서도 폭발음이 들려오며 얼마 후 집 안엔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미동도 않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거나 흐느낄 뿐. 그러다 계속된 출혈과 연기로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시야가 흐릿해질 즈음 닫혔던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며 내 쪽으로 뛰어오는 누군가의 구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내 몸을 안아 들고 불길에 휩싸여 쏟아지듯 무너지는 집을 뛰쳐나갔다. 눈동자조차 굴리는 것이 힘겨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까진 시간이 좀 걸렸다. 겨우 마주 본 얼굴엔 아주 약간의 안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 차려. 데본. 괜찮아. 살 수 있어.”

그는 간신히 현관을 벗어나자마자 정원과 이어진 돌계단에서 나를 안은 채로 넘어져 굴렀지만 금방 다시 일어나 달렸다. 열기가 점점 멀어져 가며 슬슬 미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시야를 느리게 껌벅이며 그를 응시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쉽게 잊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체념에 멈췄던 눈물이 어느새 다시 흐르고 있었다.

“제발 죽지 말아 줘. 데본.”

그의 이름은 데이카스트로데 드 밀라온 로헬. 나의 전 약혼자였다.



인생이란 어찌 보면 어떠한 픽션보다도 임팩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감각한 일상을 살다 겨우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던 미래의 약속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쉽게 깨지고, 이제 그보다 나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현실은 그런 나를 비웃듯 내 목덜미를 붙잡고 더한 구렁텅이 속으로 끌어내렸다.

나는 정말로 그 이상의 최악은 없을 줄 알았다. 언니와 그 사람의 부정이 내 인생의 기억 중 가장 최악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그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데본. 힘들겠지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어.”

거미줄이 쳐진 낡고 낮은 천장을 응시하며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 나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모님은 살해당했다. 나와 섹스를 한 남자에게.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우리 부모님이 뭔가 나쁜 짓을 한 건가? 아니면 그들이 그저 무뢰한인 것일까. 로드는 분명 아버지에게 문서를 넘기라고 했다. 그 문서란 무엇일까. 우리 집은 오래된 귀족 가문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면이나 사회적인 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진 않았다.

지금의 정부는 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곤 하나 적어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어쨌든 그 뒤로 허울뿐인 귀족들은 조금 부유한 생활을 이어 갈 순 있었지만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우리 집안이 특별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건물이나 땅을 소유한 채 그것을 타인에게 임대해 주거나 은행에 위탁한 자산의 이윤으로 먹고사는 그냥 평범한 귀족이었다.

나는 이 일이 국가와 관계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구한 전 약혼자 밀라온의 말은 달랐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정부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왜냐고 묻는 내게 그는 무심코 내 손을 잡아 오려 했지만 나는 그것을 피하며 마저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밀라온이 입을 열려던 그때 유리창이 깨지며 파편들이 안으로 튀었다. 밀라온은 벌떡 일어나 나를 보호하듯 섰고 곧 날카로워진 창틀을 구둣발로 팍팍 가볍게 부수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장 차림에 긴 흑발을 깔끔하게 넘겨 묶은 날렵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긴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사춘기라 변명할 나이도 아니신데 이러면 곤란합니다.”

이어 방문이 열리며 밀라온의 부친인 베이론 씨와 그에게 총을 겨눈 채로 들어오는 두 남자의 모습에 밀라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금 구겨진 옷깃을 편 장발 남자는 밀라온에게 말했다.

“위험에 빠진 레이디를 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로 인해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 되겠습니까. 귀족 도련님.”

“아버지! 이게 무슨……!”

“그만하거라. 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밀라온이 베이론 씨에게 항의하듯 입을 열었지만 베이론 씨는 고개를 저으며 그만 나에게서 떨어지라고 했다. 하지만 밀라온은 움직이지 않았고 베이론 씨에게 총을 겨눈 남자들이 결국 총의 잠금쇠를 풀었다. 장발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저희에겐 시체가 셋이나 하나나 손이 가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도련님은 조금만 현명하게 머릴 쓰신다면 두 명의 목숨은 건질 수가 있습니다. 아버님과 도련님 자신.”

“큭……!”

밀라온은 그 남자를 분한 듯이 바라봤지만 그는 그저 여유롭게 시계를 열어 보며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관계로, 5초 드리지요. 5.”

결국 밀라온은 그가 1까지 내려 세었을 때 날 지키듯이 막고 있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나는 밀라온을 이해했다. 자존심을 지키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런 밀라온을 향해 장발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렸다. 장발 남자는 베이론 씨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다른 남자들에게 말했다.

“두 분 집까지 잘 모셔다 드려.”

방 안엔 장발 남자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거의 반쯤은 죽음을 받아들인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성큼 다가와 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밀라온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나는 그제야 그가 상당한 미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니의 경우처럼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미모까진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특별한 외모라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이윽고 길게 내뿜어진 담배 연기와 함께 그가 말했다.

“마들로나 드 데본 제이. 당신에겐 지금 두 가지의 선택권이 있어. 첫째는, 간단하게 죽는다. 둘째, 좀 복잡하게 산다. 첫 번째를 선택한다면 당신이 듣고 싶어 할 이번 일의 진실을 이야기해 주겠어. 두 번째를 선택한다면 머릿속을 하얗게 세탁해서 당신 자신조차 누군지 잊어버리게 할 거야. 물론 어느 쪽이든 복수 같은 건 못 할 거야. 왜?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어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