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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2화

프롤로그 (2)





“저희 가족은 행복합니다.”

“그렇구나.”

“여동생들도 건강하고, 어머니 아버지도 아픈 데 없으시고요.”

“그래, 그렇구나.”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렇구나.”

“…….”

레오는 입을 다물었다. 마법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이 그렇다는데야 더 할 말이 없었다. 제아무리 아픔을 대신 먹어 치운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깊은 무언가를 맛본 사람이라도, 할 수 없는 말도 있는 법이었다.

마법사가 문을 나서려는데 레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마법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구나.”

“어머니가 좋은 분과 재혼하셔서 레미와 마이가 태어났죠. 저는 여동생들을 사랑해요.”

“그래.”

“그런데 아직도, 아직도….”

레오가 괴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저는 잊지 못한 걸까요, 복수심을.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도. 레미도 마이도 어머니도 새로운 아버지도 모두 행복한데도. 진짜 아버지도, 분명, 내가 복수 따윈 잊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라실 텐데도. 그런데도….”

“…….”

“아버진 강도떼에게 붙잡혀서 잔인하게 살해당하셨어요. 그런데 그 강도떼는 어이없게도, 훔친 고기를 먹다가 식중독으로 떼죽음당했죠. 어이없게. 허무하게. 복수조차 하질 못하게….”

마법사는 더 다가가지 않은 채 가만히 레오를 바라보았다.

“옛날 일 헤집어 놓고서 이런 소리 하긴 미안하다만, 레오, 나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려 준 건 내가 한 일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어. 아픔이 없어지면 문제가 없어진 줄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그건 좀 그렇잖아. 그뿐이야.”

“…….”

“더 돕지 못해 미안하다. 네가 나아지기를 비마, 이스카벨의 아들.”

마법사는 예법을 갖춘 몸짓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며 인사해야 할 레오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레오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는 무언가가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라고 마법사는 생각했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전조였다.

“마법사님.”

레오가 무거운 목소리로 불렀다. 그래, 그래, 역시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골치 아픈 예감이 한층 짙어졌다.

“부디, 저를 제자로 삼아 주십시오.”

주먹을 꾹 쥔 손을 양 무릎에 올려놓고, 레오가 결연한 얼굴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사이에 무슨 결심을 했는지 목소리에도 눈빛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마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자 안 키워.”

“시종도 좋습니다.”

“시종도 안 써. 참고로 호위병도, 마부도, 심부름꾼도, 파발도 안 써. 필요 없으니까.”

“…….”

“웬만한 호위보다 내가 싸우는 게 낫고, 파발을 부리는 것보다 마법으로 편지를 전하는 게 빠르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

레오가 분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대로 놔두고 떠나면 그만일 텐데도, 마법사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 하나를 더 던지고 말았다.

“나를 따라와서 뭘 하고 싶으냐.”

“…….”

“복수할 대상도 이젠 없다면서.”

레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수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복수심을, 잊고 싶어요.”

“그래서.”

“마법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곁에서 배우게 해 주십시오. 그 얽매이지 않는 모습도, 동요하지 않는 마음도, 전부.”

레오가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본 순간 마법사는 그만 참지 못하고 쿡 한 줄기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니, 미안하다, 그런데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마법이 세긴 한데…. 네 입장에서야 내가 대단해 보이긴 하겠지만…. 그냥… 뭐… 별 볼 일 없는 부랑자야.”

“…상관없습니다.”

“얽매이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 동요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니까.”

“…상관없습니다. 곁에서 모시게만 해 주세요.”

“마법은 못 가르쳐 줘. 교육만으로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습니다. 마법을 배우려고 한 게 아닙니다.”

“나한테서 뭘 보고.”

“제가 되고 싶은 모습.”

이쯤 되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법사는 작게 웃고는 허공에서 짐을 꺼냈다. 그리고 건조한 종이를 꺼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완성된 스크롤을 돌돌 말아 레오에게 건넸다.

“…이건 뭡니까?”

“텔레포트 스크롤. 위치는 이 마을, 이 집으로 설정했다.”

“그 뜻은.”

“언제든 도중에 그만두고 싶으면 너는 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해.”

“…그러면.”

“다른 건 몰라도 짐꾼은 하나 있으면 편하거든. 물건을 집어넣는 마법은 좌표 조금만 틀려도 물건이 영구 소멸해 버리니.”

레오의 얼굴이 환해졌다.

“짐꾼이다. 제자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 허락은 알아서 받도록 해.”

“부모님은 전부터 제가 독립하길 바라셨습니다.”

“독립과 부랑은 다르지.”

“마법사님 곁인걸요. 허락하실 겁니다.”

“글쎄.”

마법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모자를 썼다.

“버드나무가 자라는 고개 꼭대기에서 기다릴 테니,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와라. 오지 않는다면 못 오는 줄로 알 테니까.”

“가겠습니다.”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닐걸.”

“가겠습니다.”

살면서 당돌한 청년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마법사에게 환상을 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이 봤던가. 그런 존재들에게는 마법사는 이미 질릴 대로 질린 지 오래였다. 무언가가 시작되기에는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또다시, 무언가가 시작되고야 말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숟가락 가져와라.”

그렇게 말하고서, 마법사는 다섯 가족이 사는 소박한 작은 집을 나섰다.







에스테일 (1)





“저를 왜 고쳐 주셨습니까.”

“그냥.”

“서둘러서 마을을 떠난 건 사람들이 고쳐 달라고 몰릴까 봐였던 거죠. 그럼 왜 저만 고쳐 주셨습니까.”

“그냥이라니까.”

“제가 특별했습니까.”

아침, 마법사는 새로 얻은 짐꾼과 함께 버드나무 고개를 떠나 길을 걷고 있었다. 과묵하고 예의 바른 청년인 줄만 알았는데 애정 결핍인지 뭔지, 레오는 자꾸만 마법사가 자기만을 고쳐 준 이유를 몇 번이고 캐물었다. 이러다간 마법사가 무언가 깊은 뜻을 갖고 자기를 선택했다고 혼자 멋대로 믿어 버릴 기세였다. 마법사는 한숨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스카벨의 아들이었으니까.”

“저희 어머니를… 아십니까?”

“예전에도 이 마을을 지나갔거든. 마을 꼬마들하고 팽이치기를 하다가 연전연패했었지. 그때 제일 팽이치기를 잘하던 골목대장 꼬마가 이스카벨.”

“아.”

“그게 얼마 전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들렀더니 글쎄 그 이스카벨이 벌써 애를 낳았다질 않나, 큰애가 아파서 앓아누워 있다질 않나…. 뭐, 어쩌다 보니 나서 버렸지.”

“…그랬던 거군요.”

잠시 시무룩해지는가 싶더니 레오는 다시 고개를 들고 마법사에게 말을 걸어왔다.

“짐꾼을 두신 건 제가 처음이시죠?”

“아니, 무슨 소리야. 짐꾼이 있으면 편하다니까.”

“…….”

“참고로 첫 제자, 첫 친구, 첫 동료, 기타 등등 내 인생의 온갖 처음은 전부 애저녁에 지나갔어. 네가 나한테 무언가 ‘처음’이 되고 싶으면 머리 좀 써야 할걸. ‘첫 어쩌다 같이 길을 떠나게 된 이스카벨의 아들’이면 몰라도.”

“…….”

레오는 금세 또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자기 앞에 펼쳐진 여행길이 상상과는 달라 실망한 모양이라고 마법사는 짐작했다. 이제부터 레오가 걷게 될 것은 소년 소녀들이 꿈꿀 법한 모험도 없고, 자기에게 의지하는 동료도 없는, 자기가 주인공이지조차 않은 여행길이었으니까.

“쓰고 싶으면 써, 집으로 가는 텔레포트 스크롤.”

“…아뇨, 안 씁니다.”

“네 마음이긴 하다만.”

날씨는 선선하고 흘러가는 구름은 느긋했다. 마법사는 말린 과일을 우물거렸다. 지난번에 레미에게 만들어 주었던 반딧불 조명과 그것을 회수하는 데에 들어간 마력량… 같은 주제로 생각에 빠지다 보니 주위에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양 마음이 느긋하고 평온해졌다. 시킨 대로 레미가 반딧불을 터트려 죽였더라면 회수가 더 간편했겠지만 역시나 말을 듣질 않아서 거두어들이는 데에도 추가 마력을 소모했었다. 어차피 어린애가 말을 안 들을 줄은 감안하고 만들어 준 것이긴 했었지만.

마법사는 한가롭게 걸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말린 과일을 공중에 띄워 빙빙 돌리다가 다시 잡아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마법사님.”

“응.”

거의 존재를 잊을 뻔했던 꼬맹이가 말을 걸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를 깨트렸다.

“마법사들은 수명이 길다는 게 정말입니까?”

“구 제국이 멸망한 게 언제였더라.”

“600년 전일 겁니다.”

“그럼 대충 620년 살았네, 나는.”

레오가 경탄 어린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님.”

“응.”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어느 이름.”

“예? 그야, 본명을.”

“어느 본명.”

마법사는 절인 고기 한 점을 찢어 공중에서 구웠다.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 이 세계에서 처음 받은 이름? 공식적으로 등록되어서 알려진 이름? 어느 본명?”

“그, 그건….”

“그래, 이참에 하나 짓자. 지어 줘 봐.”

“네?”

“어차피 용도에 따라 이름은 다르잖아. 네가 부르기 위한 이름이라면 그 용도에 맞게 새로 짓는 게 제일 정확한 내 이름이지. 지어 줘 봐.”

“그, 그러면…. 으음….”

레오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쩔쩔매더니 한참 만에야 한 이름을 내놓았다.

“…에스테일.”

“괜찮네. 어디서 딴 이름이야?”

“제가 받을 뻔했던 이름…입니다.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이 지어 주셨어요. 부르기 어렵다고 해서 이름을 바꾸어서 레오가 되었지만요.”

“좋아. 에스테일로 하자.”

“그, 네, 그러면…. 에스테일 님.”

마법사는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이름을 부른 레오는 남의 이름을 멋대로 지어서 부른다는 행위가 아직 혼란스러운 듯했지만.

“2, 300년 전만 해도 ‘에스이타일’이라는 이름이 쓰였지. 고대어 ‘날렵한 물새’에서 온 말이고. 그러던 게 점점 발음이 짧아지나 싶더니 ‘에스테일’로 정착하더군.”

“그렇습니까.”

“나는 요새 사람들이 부르는 버전이 마음에 드니까, 에스테일이라고 해.”

누군가에게 이름을 새로 받은 것은 그러고 보면 퍽 오랜만이었다. 에스테일이 된 마법사는 새 이름을 혀끝으로 굴려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법사님… 에스테일 님.”

“응.”

“이전의 본명들은 무엇이었습니까.”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은 윤. 그렇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이 세계가 아니었지. 이 세계에서 받은 이름은 유리스티스. 공문서에 기록된 이름은 켈타이르 엘 테이레스. 도망 다닐 때 쓰던 이름들도 알려 줘?”

“아뇨…. 충분합니다.”

“에스테일이라고 불러.”

“네, 에스테일 님.”

그러고서 레오는 한번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지금 저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뭐? 그야 당연히 아무렇게나지. 걷다 보면 어딘가가 나오겠지. 맛있는 특산품이 있는 마을이 나오면 먹고, 아니면 굶고, 어차피 굶어 봤자 죽는 몸도 아니니까….”

말하다 말고 에스테일은 윽,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맞다, 그러고 보면 너는 평범한 인간이었지.”

“아, 예, 평범한 인간입니다.”

“굶으면 죽지? 지나치게 오래 잠들어도? 너무 춥거나 더워도?”

“예, 일단은….”

“…곤란한데.”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에스테일은 짜증스럽게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시종을 부르는 호출 벨의 줄이라도 잡아당기는 듯한 손짓이었다.

“안 먹으면 죽으니까 음식이 있어야 하잖아. 음식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 돈도 있어야 하고. 돈을 갖고 다니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중얼중얼거리더니 에스테일은 레오를 휙 쏘아보았다.

“너 그냥 집으로 가면 안 되냐.”

“예?”

“텔레포트 스크롤 줬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맞다, 이미 이름을 받았지. 젠장, 이름을 짓게 놔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기, 마법사님께서 지으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레오는 황당한 눈으로 에스테일을 보았다. 에스테일은 레오의 눈빛을 모르는 척하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감아 잡아당기다가 말했다.

“좋아, 칸텐 마을로 간다.”

“네.”

레오는 짧게 대답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라든지 얼마나 걸립니까, 같은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마법사 역시 더 설명을 잇지 않고 칸텐 마을을 향해 길을 서둘렀다.



***



칸텐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난 무렵이었다. 마을에는 열띤 활기가 가득했다. 칸텐은 마을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웬만한 작은 도시만 한 규모였다. 근 3, 40년 새 급성장한 제지업과 목공업에 힘입어 인구가 늘고 재판소와 신식 치료소도 설치된 지역이었다. 칸텐에 접어들고서부터 레오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했다.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레오에게는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게다가 칸텐은 지금 마을 축제 도중이기까지 했다.

“일단은 숙소를 잡지.”

에스테일은 허공에 사각형을 그리고는 거기에서 허술한 삼베 주머니를 하나 끄집어냈다. 그러고는 주머니를 벌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동전을 긁었다. 손톱만 한 동화 네 개가 나왔지만 하룻밤 숙박비로는 턱도 없는 금액이었다. 에스테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털었다. 구겨진 양피지 뭉치, 낡은 펜 두 자루, 압화, 미사용 스크롤 따위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팔찌도 하나 떨어졌는데, 식견 없는 눈으로 얼핏 보기에도 값나가는 마법 도구 같아 레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테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이 없는지에만 신경 쓰며 주머니를 탈탈 털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투덜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먼지를 털고 주워 담았다.

“이건…. 무슨 주머니입니까?”

“그냥 보관용이야.”

“특별한 물건들입니까?”

“언젠가 추억이 깃든 물건을 소중하게 간직해 둔 모양인데, 잊어버렸어. 무슨 추억이었는지.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잡동사니 더미지.”

“기억을… 지우신 겁니까?”

에스테일은 웃었다.

“620년쯤 살았다고 말했지. 난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거든. 잊어버린 거야. 소중한 추억이긴 했을 텐데, 뭐였는지 모르지, 이제는.”

“…하나뿐인 추억이셨을 텐데.”

“이런 주머니가 몇백 개는 더 있어. 전부 하나뿐인 추억들이지. 몇백 개…. 정확히 몇 개가 있는지도 몰라.”

삼베 주머니를 도로 동여매어 허공으로 돌려보내고는 에스테일은 다른 주머니 몇 개를 더 꺼내어 열었다. 동전 서른 개가 모여 간신히 하룻밤 잠자리를 해결할 만한 돈이 되었다.

“칸텐에 괜찮은 여관이 있지.”

“저는 어디든 괜찮습니다.”

“거기로 가자. 아니, 마지막으로 들른 게 30년 전이었나…? 여하간, 없어지지 않았으면 있고, 없어졌으면 없겠지.”

“네.”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에스테일이 앞서고 레오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몇 분 후 두 사람은 문전박대와 함께 쫓겨났다.

“…나는 바가지가 싫어.”

‘싫어’에 힘을 주어 말하며 에스테일이 투덜거렸다. 손으로는 자그마한 동화를 튕겨 올려 공중에 던지고 받으면서였다. 동화 30개를 공중으로 띄워 올려 빙빙 도는 커다란 원을 만들어 놓고 에스테일은 불평을 이었다.

“30쿠프가 있는데 하룻밤 잘 수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축제 기간이라 그런가 봅니다.”

“80쿠프라니, 그만한 돈이 있으면 뭐 하러 그런 조그만 여관에서 자겠어.”

“평소에 80쿠프 하던 여관은 이제는 200쿠프쯤은 할 테니까요.”

물총 쏘듯 동전들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가 다시 받고, 에스테일은 30개의 동전을 갈무리해 집어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돈이 없는 건 아냐.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에스테일은 허공에 네모를 그렸다. 이번엔 조금 전보다 더 컸다. 보이지 않는 네모난 문을 열고 에스테일은 그 안을 레오에게 보여 주었다. 레오는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우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이 멀 듯한 광채 때문이었다. 셀 수도 없는 금화가 수확철 밭에 굴러다니는 이삭처럼 수북이 쌓여 군데군데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환전 기한을 놓쳐 버렸단 말이지.”

에스테일은 변명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에스테일의 금고에 든 금화는 발행이 중지된 지가 백 년이 넘은 옛 화폐였다. 간간이 정부에서 구 화폐를 신 화폐로 교환해 주는 정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그마저 마지막으로 실시된 때가 45년 전이었다.

금액 면에서나 시간 면에서나 ‘기한을 놓쳤다’고 하고 끝내 버릴 만한 규모의 건이 아니었기에, 레오는 한차례 다시 말문이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가까스로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마법사님들은 그, 음…. 원래 다들 금전적으로 자유분방하신 겁니까?”

“아니, 나만.”

“…….”

“말해 두자면 어디서 회계 맡아서 사고 친 적은 없어. 안 맡았거든. 620년 동안.”

“그건…. 신중한 선택이셨던 것 같습니다.”

평생을 평범한 가겟집 아들로 살아오며 쌓아 온 건강한 금전 감각이 파괴적인 충격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레오는 애써 에스테일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옛 금화라 사용이 번거롭다면 하다못해 녹여서 금괴로 변환할 생각은 안 드는 걸까. 과연 자기 재산 총액이 얼마인지는 알고 있을까. 마법사라서 살아가는 데에 돈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렇게 되기 쉬웠던 걸까. 그러다 곧 머리에 쥐가 나는 것을 느끼며 레오는 에스테일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아, 있다.”

에스테일이 허공에서 꺼낸 또 다른 주머니에서 찰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쿠프 동화를 꺼냈다.

“80쿠프쯤 되려나.”

“…그런가 보네요.”

“좋아, 레오, 거위 구이 좋아해?”

“…네, 뭐든 잘 먹습니다.”

“저녁으로는 거위 구이를 먹자. 물론 아까 그 여관에서 먹는 거야. 그 여관의 매력은 방이 아니라 요리거든. 특히 명물 거위 구이. …30년 전에 그랬다는 거지만.”

그리고 에스테일은 자신만만하게 레오를 여관으로 이끌었다.



***



두 사람은 여관의 작은 방에 짐을 풀어놓았다. 늦은 점심은 레오의 엄마 이스카벨이 챙겨 준 보존용 빵이었다. 에스테일이 레오를 구해 준 삯으로 받은 말린 과일과 절인 고기도 함께였다.

“…에스테일 님.”

“응?”

“저… 그런데 제게 맡기실 짐은 없습니까?”

일단은 에스테일이 레오를 거둔 명목은 짐꾼이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레오가 들고 다닌 짐은 엄마인 이스카벨이 싸 준 자기 몫의 식량과 옷가지 약간뿐이었다. 자기가 나서서 데리고 다녀 달라고 우긴 것이긴 하지만, 막상 짐꾼이면서 짐도 지지 않고 다니자니 마음이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아하, 그러면….”

에스테일은 무화과를 얹은 빵을 우물거리다 말고 손을 휘저어 큰 원을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슥슥 몇 가지 문양을 그렸다. 파스스 소리와 함께 연기가 희끄무레하기 솟기 시작했다. 레오는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에스테일이 그려 낸 공중의 동심원 속 중심에서 나풀 솟아올라 떨어진 것은 한 벌의 아름다운 흰색 드레스였다.

“드레스…?”

“기다려 봐.”

비슷한 양상으로 에스테일은 몇 번 더 손을 썼다. 곧 레오의 품에는 각양각색의 복장들이 떠맡겨졌다. 예복부터 평상복까지, 여성용부터 남성용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이걸 방금 만들어 내신 겁니까?”

“아니, 아니, 이계의 틈 어디쯤에 보관해 놨던 건데 강제 소환으로 끄집어냈지. 아무튼 이걸 들고 다녀 봐.”

“네,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