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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대마법사와 짐을 들지 않는 짐꾼 1화

프롤로그 (1)





어둠의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장발이었다. 바람 속에서 흩어지는 그의 머리카락은 성긴 구름처럼 부드럽고 탐스러웠다. 눈동자는 흑색이었다.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많지만 그의 것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일 듯한 깊은 흑색은 드물었다.

‘아픔을 먹는 자.’ 그의 이명이었다. 한때 그 이명에는 대륙을 뒤흔들고도 남을 광휘와 위엄이 서려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그는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백수 놈팽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할 일 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쏘다니면서 시간 때우기나 하는 부랑자. 그것이 지난날 가공할 이명으로 불리던 마법사의 현재 모습이었다.



***



마을 꼬마 레미는 위로 오빠 하나, 아래로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레미는 올해 일곱 살로 작은 가겟집의 딸이었으며 부모님과 오빠가 가게를 보는 동안 여동생 마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임무였다.

‘꼬르륵 소리 난다….’

일곱 살 꼬마에게 세상은 너무 넓고 재미있는 일은 넘쳤으며 맛있어 보이는 간식거리도 많았다. 레미는 덤불숲에서 산딸기를 구할 수 있다는 친구들의 소근거림에 홀랑 넘어갔다가, 입술이 산딸기 즙으로 빨갛게 물들 때가 되어서야 여동생의 존재를 생각해 냈다.

‘큰일났다.’

레미는 덜컥 겁에 질렸다. 세 살짜리 여동생 마이는 지금쯤 길을 잃고 울고 있을지도 몰랐다. 늑대 밥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마이가 늑대 밥이 된다면…. 레미에게 여동생의 죽음은 실감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지만, 마이가 만약 죽는다면 엄마 아빠한테 자신이 얼마나 혼이 날지는 와락 실감되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겁에 질린 채 레미는 마이를 찾으며 마을 변두리를 빙빙 돌았다. 여동생을 떼 놓고 놀러 다닌 걸 들킬까 봐 크게 소리쳐 부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여동생을 얼마나 찾아다녔을까. 사방이 어둑해졌다. 그제야 레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을에서 너무 멀어져 있었다. 여동생뿐 아니라 레미 자신도 길을 잃게 생긴 것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반딧불이 하나둘 날고 있었다. 레미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여동생도, 집도, 한순간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기묘한 노랫말이었다. 레미는 점점 노랫말의 근원지로 다가가고 있었다. 서서히, 기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점점이 나는 반딧불들이 한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넝마라도 되는 양 땅바닥에 질질 끌고 있는 사람이었다. 쪼그려 앉자 머리카락이 땅에 끌릴 만큼, 긴 머리카락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펼쳐진 검은 머리카락은 마치 그가 밤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노랫소리도 반딧불도 그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마을에서 보기 드문 낯선 사람의 존재에 레미는 흠칫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반가움에 소리쳤다.

“마이!”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묘한 사람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은 것은 여동생 마이였다. 내내 찾아다니느라 새까맣게 탄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이가 레미를 보고는 방긋 웃었다. 레미는 힘껏 마이에게 달려갔다. 검은 머리카락을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언니가 왔구나.”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길을 잃은 마이를 보호해 준 사람인 모양이었다. 레미는 낯설어하다가 꾸벅, 인사하곤 마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뒤돌았다.

“밤길은 위험해, 레미.”

당신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물으려는데 그 사람이 손끝을 딱 튕겼다.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뭉글뭉글, 빛 덩어리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이내 반딧불 같은 형상을 갖추었다.

“조명 겸 감시자를 너희 자매에게 붙여 두지. 집에 안전하게 도착하면 터트려 죽여.”

“……?”

“걱정 마. 이런 건 마력 조금만 쓰면 금방 만드니까…. 꼬마 아가씨들이 안전하게 귀가하는 게 중요하지.”

터트려 죽이지 않을 시에는… 하고 그 사람이 몇 마디를 중얼거렸으나, 마법의 술식에 관련된 용어가 섞여 있는 것인지 레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레미는 갸웃거리다가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어쨌든 마이를 도와준 좋은 사람 같아서였다. 이번에야말로 마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너희 오빠.”

“……?”

“계속 아프다고 하면…. 뭐, 그…. 내가 아픔을 먹는 자거든. 너희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면 그게 뭔지 대충 아실 텐데…. 어쨌든 나는 그 뭐냐, 마을 뒷산 바위 동굴쯤에 있으니까…. 필요하면 부르러 오고….”

레미는 눈살을 찌푸리며 경계의 눈빛으로 낯선 사람을 노려보았다. 레미와 마이의 오빠 레오는 분명 세 달 전부터 정체불명의 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레오는 집 밖에선 되도록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마을 사람 중에선 레오가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떠돌이는 대체 뭔데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레미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었다.

“…누구예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레미는 마이의 손을 꼭 쥐고는, 자신의 작은 등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러자 낯선 사람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어떻게 알긴, 네 여동생이 말해 줬으니까 알지…. 여기서 계속 같이 기다렸는걸….”

아, 그렇구나. 레미는 한순간이나마 경계 태세를 취한 것이 멋쩍어졌다. 마이와 함께 레미를 기다려 주면서 마이에게 들은 것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레미는 마지막으로 한번 꾸벅 인사하고는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집에 가기 위해 마이와 함께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멀리 집의 불빛이 보였다. 낯익은 풍경 속으로 들어와서야 레미는 깨달았다. 마이에게 들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마이는 낯을 심하게 가려서 엄마 외의 다른 사람하고는 대화를 할 줄 몰랐다. 어렸을 때는 말을 못하는 줄로 걱정할 정도였다. 지금도 언니인 레미하고조차 거의 소리 내 얘기하질 않았다.

마이가 말하게 만들었다고?

레미는 수수께끼의 여행자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말간 어둠뿐, 사람을 홀리던 반딧불의 흔적은 이미 없었다.



***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요.”

꾹꾹 눌러 참던 이야기를, 레미는 결국 잠자리에 누워서 엄마에게 털어놓고 말았다. 짚단으로 만든 레미의 잠자리 옆에는, 오빠 레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앓아누워 있었다.

“마이랑 같이 마을 변두리에서 봤어요. 자기가 ‘아픔을 먹는 자’라면서 레오 오빠가 아프면 자기를 부르라는 거예요. 뒷산 바위 동굴에 있겠다면서요.”

“그 사람이 뭐라고?”

“‘아픔을 먹는 자’래요. 엄마, 그게 뭐예요?”

레미의 물음에 엄마 이스카벨이 곤란한 낯을 했다. 그러다가 이내 다시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어린 딸에게 말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마귀나 요정 같은 거야. 아주 오랜 옛날에는 현실의 존재였고, 헤아릴 수 없이 강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이젠 옛날 일일 뿐이지.”

“그럼 가짜예요?”

“글쎄. ‘아픔을 먹는 자’의 제자나 그 제자의 제자들이 그분의 뜻을 이어 순례를 다닌다는 얘기는 들리던데. 어쩌면 그런 제자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구나.”

“제자들도 강해요?”

“강하지. 물론 스승에 비하면 몇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보다야 몇백 배는 강하지. 세상에, 정말 그 ‘아픔을 먹는 자’의 진짜 제자가 우리 마을 뒷산에 머무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스카벨은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달싹이는 아들 레오의 이마를 안타까운 얼굴로 매만졌다. 레오는 정체불명의 통증으로 앓아누운 지가 석 달째였고, 의원도 약초꾼도 고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진통 효능이 있는 물약을 들이켜며 낮에는 애써 태연한 척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는 레오의 얼굴이 이스카벨에게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아픔 그 자체였다.

“요새 사기꾼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정말로 ‘아픔을 먹는 자’의 제자라면….”

“그러면, 뭘 할 수 있는데요?”

기대에 차 레미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스카벨이 꿈꾸듯 속삭였다.

“모든 걸 할 수 있겠지.”



***



레미가 이스카벨을 이끌고 뒷산 바위 동굴을 찾아간 것은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선생님, 계세요?”

음습한 바위 동굴이 마치 명의의 거처라도 되는 양 이스카벨은 공손히 소리 높여 안에 있을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연한 부랑자의 행색이었다. 유행이 지나도 몇 세대는 지난 새카만 로브에, 들고 있는 지팡이마저 지나치게 옛 시대의 양식이라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연극에 쓰이는 가장 용품을 두른 듯한 행색이었다. 머리를 막 감기라도 했는지 물기로 축축한 긴 머리카락만큼은 윤기가 났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기묘한 존재감을 뿜어내던 그 사람이 맞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이 사람이에요, 엄마. 이 사람이 아픔을 먹는 자라고 그랬어요.”

레미는 이스카벨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말했다. 분위기가 확 다르기는 해도 이 사람임은 틀림없었다. 그러자 시커먼 부랑자가 난처해하는가 싶더니 손을 내저었다.

“아, 그게, 음,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아픔을 먹는 자’라는 게 아니고…. 어저께는 꼬마 아가씨들이 워낙 귀엽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분위기를 타는 바람에…. 하하하….”

“어머, 그야 당연히 본인은 아니시겠죠. 행방불명된 지가 한참인 분인걸요. 말하자면 ‘그분과 같은 뜻을 잇는 사람이다’, 그런 뜻이셨던 거죠? 그분 본인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아니, 그분의 진짜 제자까지도 바라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그분과 비슷한 마법을 쓸 수 있으시다면…. 저희 아들을 도와주실 수만 있다면….”

이스카벨은 북받치는 감정을 삭이며 한번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넉넉한 살림은 못 되지만 은혜를 모르는 집안은 아닙니다. 저희 아들을 살려 주신다면, 기필코 은혜는….”

엄마의 말을 들으며 레미는 부랑자를 올려다보았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매는 안색이었다. 왜 저럴까. 은혜 운운하는 말이 부담스러워서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고, 레미는 그저 의아한 눈으로 부랑자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저기… 그게….”

신발코로 바닥에 낙서를 하다가 부랑자가 말했다.

“제가, 그…. 갖고 있는 마법이 정말로 별 게 아니거든요. 그냥 잠깐 안 아프게 해 드릴 수는 있는데 그것뿐이라….”

“그것뿐이라뇨!”

이스카벨이 부랑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희 레오를 도와주시기만 한다면….”

‘평생’, ‘은인’, ‘감사’, ‘진심’ 같은 단어를 절절히 쏟아 내는 이스카벨. 그 옆에서 레미는 부랑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뚜렷한 그 얼굴에는 왠지 ‘귀찮게 됐다’와 ‘내가 미쳤지, 왜 그랬을까’가 동시에 적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라고도 적혀 있는 것 같았다.



***



부랑자를 달고 마을로 돌아오자 수군거리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마법사들이 외양이 특이하다지만 레미 모녀를 따라오는 이 사람은 그중에서도 괴짜였다. 우선 의상부터가 그랬다. 이 사람이 대단한 분이 맞기는 한가. 레미는 덩달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씻겠습니다.”

깨끗한 물을 떠 와서 목욕재계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부랑자는 허릿수건에 물바가지를 하나 받더니 터벅터벅 동네 개울가로 걸어가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눈에 띄게 윤기가 흐르는 탐스러운 머리채를 빼면 영락없이 산짐승 따위로 목숨을 연명하는 흔하디흔한 떠돌이 놈팽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건 그렇고 남자였구나. 옷가지를 벗고 개울에서 몸을 씻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레미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



목욕에는 한참이 걸렸다. 쪼그려 앉아 그를 기다리던 레미는 어느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눈을 뜬 것은 한낮의 태양이 누그러진 후였다. 저벅저벅. 안정감 있으면서도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레미는 눈가를 비비며 눈을 떴다.

‘저렇게 생겼었나?’

탐스러운 견직물처럼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것이 맞았다. 그런데 저런 분위기였던가. 레미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레미의 엄마가 내어 준 옷은 단순히 활동하기 편한 면직 의상이었다. 축제나 의식 때 미혼 남녀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입는 옷차림으로, 장식이래 봤자 새하얀 소맷자락 끝을 잠그는 석재 단추와 부드럽게 펼쳐지는 치맛자락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 깨끗하고 소박한 의상만으로도 눈앞의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몸을 구속하는 구세대의 유물처럼 보이던 옛 의상을 벗은 것만으로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와, 그가 물었다.

“레오는 어디 있습니까.”



***



레미는 ‘치료’ 과정을 보지 못하게 쫓겨났다. 물론 칭얼거리는 마이를 데리고 달래 주는 것도 레미의 몫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이제 완연한 저녁이었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 레미는 흘긋, 문틈으로 집 안의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순간 소름이 끼쳤다.

자상한 오빠 레오가 석고처럼 창백해진 채 누워 있었다. 아픈 이후로 평소보다 핏기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더욱 희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엄마 이스카벨은 그런 레오 옆에서 가슴에 손을 꾹 얹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부랑자는.

더는 부랑자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지난밤 어둠 속에서 보았던 고요하고 음침한 존재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게 마법사의 진짜 모습이구나. 레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깨끗한 복장과 위압감을 일으키는 외모뿐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그를 휘감은 채 맴돌고 있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무언가. 느껴지지 않는 듯하면서 느껴지는 무언가. 마력이 무엇인지 레미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레미는 그것이 바로 마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사는 레오의 손목을 깨물고 있었다. 레오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끈적하고 반투명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스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레미는 숨을 삼켰다.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일었다. 구물거리는 벌레처럼, 끈끈한 진창 같은 질감의 검은 안개가 레오의 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혐오스러운 기운이 향하는 방향은 한 곳이었다. 레오의 손목을 깨문 마법사의 입.

다시 보면 그것은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모습으로도 보였다. 과일에 빨대를 꽂아 즙을 빨아들이듯이, 마법사는 레오에게 송곳니를 박고 시커먼 무언가를 레오로부터 빨아들이고 있었다.

“으응….”

뒤에서 마이가 칭얼거렸다. 흠칫하다가 레미는 바스락, 문가의 나뭇조각을 밟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법사가 눈을 들었다. 시선이 레미를 향했다. 맹수에 뒷덜미를 물린 산짐승처럼 몸이 뻣뻣해지려 했다. 그때 마법사가 싱긋, 미소 지었다. 평온하고 태평한 미소였다. 꽃대를 다듬는 엄마처럼, 가게 앞을 비질하는 아빠처럼, 너무도 일상적인 일을 하는 도중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왜인지 기분 나빠서, 낯설어서, 레미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그리고 여동생 마이의 손을 꼭 부여잡고는 종종종 어딘가로 마구 도망쳤다. 오빠의 몸에서 시커먼 것이 흘러나오는 모습도, 그것을 검은 눈동자의 마법사가 삼키는 모습도, 자기가 보아서는 안 되는 광경인 것만 같았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스카벨은 눈물까지 훔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마법사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끝을 꿈지럭거렸다.

“답례는 정말 이거면 충분하시겠어요?”

“예에, 뭐, 달리 필요했던 것도 없고….”

레오의 오래된 통증을 없애 준 대가로 마법사가 요구한 것은 말린 과일 다섯 묶음에 절인 고기 세 뭉치였다. 깨끗한 면 가방에 정성스레 식량을 담아 챙기며 이스카벨은 몇 번이고 아들을 살려 준 대가가 이거면 충분하느냐고 물었다. 마법사는 물론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했다.

“이제 이 마을을 떠나시나요?”

“아, 예, 그 뭐냐, 가 봐야 할 데가 있어서….”

“그렇죠, 이렇게 고매한 마법사님이니 바쁘시겠죠, 죄송합니다, 저희 집에 너무 오래 붙잡아 놓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사님, 제가 이 은혜를….”

이스카벨의 절절한 인사를 들으면서도 마법사는 한 귀로 흘리며 연신 바깥을 흘긋거렸다. 사실 이스카벨의 짐작과 달리 마법사에게 바쁜 용무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법사가 이렇게 출발을 서두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이제 곧 소문 냄새를 맡은 마을 사람들이 자기도 도와 달라며 몰려올 게 뻔해서였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을 도와주기 귀찮아서였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든 이 마을에 오시면 저희 집에서 모실 테니 찾아 주세요.”

보아하니 이제야 긴 감사의 인사가 끝날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이스카벨이 내어 준 식량 가방을 고쳐 메었다. 이 집에서 내어 준 복장으로 옷도 깨끗이 갈아입었겠다, ‘치료’도 무사히 끝났겠다, 가뿐히 길을 떠나기 딱 좋은 때였다. 이대로 가방을 메고 이 집을 나서면 된다. 그러면 귀찮은 사람들에게 잡히기 전에 산뜻하게 떠날 수 있을 테고 상쾌한 밤바람을 즐길 수 있을 테고….

…그렇지만 결국 마법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떠나기 전에 레오와 이야기하게 해 주십시오.”



***



이스카벨은 남편과 어린 딸들을 데리고 자리를 비워 주었다. 소박한 집에 남은 것은 병석에서 막 회복된 레오와, 레오를 ‘치료’한 마법사였다.

“…안녕하세요.”

레오가 낯을 붉히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제가 앓아누워 있는 동안 ‘치료’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마법사는 레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언제 앓아누워 창백했나 싶게, 생기를 되찾은 레오는 혈색 좋고 어깨와 가슴이 단단한 호청년의 모습이었다.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데도 주변에선 그런 줄을 몰랐다더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그, 뭐냐, 있잖아…. 꼬마야.”

마법사는 침상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모자를 벗었다.

“나는 너를 치료한 게 아니야. 아픔을 없애 놓은 거지.”

“…그게 치료한 거 아니에요?”

“아니지. 문제가 있으니까 아픈 건데, 나는 아픔만 없애 놓았어. 문제는 그대로다.”

“…….”

“그리고, 마음의 문제인 것 같던데.”

마법사의 말에 레오는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어차피 마음이 곧 몸이고 몸이 곧 마음이긴 하다마는, 너는 특히나 마음에 문제가 있어서 몸이 아팠던 것 같거든.”

“제가요?”

“그래.”

“아뇨, 딱히, 그럴 만한 일은….”

레오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마음의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마법사는 한숨을 쉬고는 레오를 응시했다. 누군가의 아픔을 대신 먹어 치운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눈빛이 있었다. 마법사는 레오의 눈을 오래 응시했다. 레오의 짙푸른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