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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장

교환





“으음. 오늘은 블랙커피를 마셔 볼까.”

민이영은 커피 메이커를 가득 채운 유리 용기를 집어 머그컵에 따랐다. 따뜻한 검은색 물이 조심스레 따라지며 연기가 위로 풀풀 났다. 고소한 향에 무심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던 민이영은 소파에 늘어져 있는 한 인형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인생의 실패를 맛본 것 같은 추욱 처진 어깨와 무릎 사이로 파묻힌 얼굴. 급하게 나왔는지 머리칼이 약간 떠 있어 정돈이 안 되어 보이기까지. 이영은 한참이나 상대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다 뒤늦게 그가 한이준임을 깨달았다.

“대리님?”

긴가민가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부르니 무릎에 파묻힌 얼굴이 느리게 들린다. 역시나 한이준이었다. 이영은 반쯤은 반가워서 반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가 앉아 있는 소파로 이동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머리가 엉망이에요. 어머, 여긴 다크서클이…….”

가까이서 본 이준의 상태는 처참했다. 항상 단정하게 묶여 있던 넥타이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고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 다려져 있던 와이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 아래로 눈은 퀭한 데다가 진한 다크서클까지 내려와 있는 모습이 필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자랑 헤어지기라도 했나? 아니. 이영은 바로 추측을 접었다. 그녀가 알기로 이준은 애인이 없었다. 그럼 친구와 싸우기라도 했나? 왠지 그것도 아닐 것 같다. 그녀가 봐 온 이준은 성격이 참 좋은 남자였으니까. 웬만한 일로는 화도 잘 안 내고 그저 방긋방긋 웃는 그는 그녀의 활력소이기도 했다.

혹시 그도 아니면 부모님이 무슨 일이라도…….

“이영 씨…….”

어머, 정말 뭔 일이라도 났나.

이영은 울먹거리는 이준의 목소리에 없던 모성애가 생기는 것을 느끼며 커피잔을 유리 탁자에 내려놓았다.

“주말 동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상태가 너무 안 좋으세요.”

“엄청난 일이 있었어…….”

도대체 평소 깔끔한 그가 이렇게 출근할 정도면 어떤 일인 걸까. 이영은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에 눈으로 그를 재촉했다.

“나…… 합성 실패했어.”

“네? 하, 합성이요?”

이영은 순간 무슨 말인지 모르고 되물었다. 이준은 그녀의 반응에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이는 고개짓마저 너무 우울해 보인 나머지 이영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다행히 움찔거리는 선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응……. 나 무기 두 개 합성…… 6개월이나 공들였는데…… 엄청 노가다 뛰었는데…….”

그제야 이영은 그가 즐겨 하는 가상 현실 게임 ‘유토피아’를 말하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난 또 뭐라고. 상이라도 치른 줄 알았네.’

기겁했던 이영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머그잔을 쥐었다. 천천히 커피를 한입 마시면서 이영은 아기를 돌보는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엄청 공들이고 있는 게 있다 하셨죠. 6개월이나 공을 쏟았는데 실패라니……. 속상하셨겠어요.”

속으로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맞장구를 치는 이유는 역시나 관심이 있는 사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스스한 머리인데도 그것이 흠이 아니라 귀여워 보일 정도로 훈훈한 외모. 모공이 존재하지도 않아 보이는 새하얀 얼굴. 큰 키. 넓은 어깨. 스타일도 좋고 무엇보다 성격이 최고다.

허세 없지. 다정하지. 실수하면 다독여 주지만 물렁하게 대하지는 않지. 가끔 수고했다며 커피 사 오지. 세상에 이런 완벽한 남자라니. 남자 친구감을 넘어서 완벽한 남편감이다. 마케팅 2팀에 있는 동기가 자신이 여기로 소속된 것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가끔 이렇게 귀여운 모습도 보이지. 진짜 여기 입사하길 잘했다. 민이영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흑…… 모두 말릴 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이준은 어제까지만하더라도 이 순간을 위해 두 무기를 구했다고 말했으면서 실패하자마자 조언을 듣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고작 가상 현실 게임의 실패에 크게 우울해하는 이 귀여운 연상의 남자를 이영은 큰마음으로 품으며 어깨를 토닥거렸다.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잖아요.”

“그러려면 다시 무기를 구해야 해……. 6개월이나 또 노가다 뛰고 경매장에서 잘 안 파는 검을 사기 위해 사방팔방 돌아다녀야 해…….”

“무기를 왜 다시 구해요? 실패하면 무기가 사라지는 거예요?”

“응…….”

세상에.

이영은 황당한 시선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게임의 게 자도 모르는 이영이지만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고생해 가며 무기를 구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오래, 열심히 구해서 한순간에 잃을지도 모르는 짓을 했다고?

“대리님. 그거 도박이에요.”

민이영이 애정을 가지고 단호하게 지적했다.

“아니야, 이영 씨. 도박은 돈을 거는 거잖아. 난 돈 하나도 안 걸었어.”

“아까 경매장에서 검 사셨다면서요.”

이제는 말투가 취조하는 식으로 바뀌었지만 이영도 이준도 위화감 없이 문답을 나눌 뿐이다.

“그건…… 게임 돈이야.”

“그 과정에서 현금을 하나도 안 쓰셨어요?”

이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이준을 바라보자 이준이 찔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면서도 변명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썼지만 난 한도를 정해 놓고 현금을 쓴다고. 절대 무리해서 쓰지 않아.”

“대리님.”

이영은 한숨과 함께 그를 불렀다.

“돈을 절제해서 썼든 조금 썼든 운에 맡겨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게 도박이에요. 대리님 그 합성 운에 맡긴 거예요, 아니에요.”

운이 아니야. 10%라는 가능성이 있는 합리적인……이라고 이준이 변명의 말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침부터 위험한 대화를 하네. 누가 도박했어?”

곧 시인할 것 같은 이준을 두고 말이 끊겼지만, 이영은 표정이 밝아졌다. 휴게실로 들어온 인물 중 하나가 그녀의 제2의 활력소였기 때문이다. 팀 후배인 민다한을 지나쳐 사장인 서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민이영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다한 씨.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요. 이영 씨도 좋은 아침이네요.”

“예.”

사장은 방긋이 웃으며 인사를 받더니 다시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아까 무슨 말이야? 도박?”

“그게 말이죠.”

이영은 미주알고주알 이준과 나누었던 대화를 일러바치듯이 이야기했다. 이준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어깨가 점점 더 내려갔다. 그것은 게임을 하는 것을 들킨 데에 대한 움츠림이라기보다는 실패한 어제의 장면이 회상된 탓이다.

“대리님 가상 현실 게임도 하세요?”

이야기를 다 들은 민다한이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이영이 했다.

“다한 씨 몰랐어? 대리님 게임광이야. 그 게임 출시되자마자 시작하신 초창기 멤버고.”

이영의 말에 이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핏 자부심마저도 보이는 끄덕거림에 이영의 입가가 다시 헤실헤실 풀렸다. 나이 서른에 저런 끄덕거림이라니. 정말 귀엽다, 귀여워. 속으로 이미 백 번은 머리를 쓰다듬은 이영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엄히 했다.

“아무튼 대리님. 도박 인정하시는 거죠?”

“으응.”

듣다 보니 일확천금을 노리고 로또를 산 청년이 된 것 같아, 이준이 우물쭈물 긍정했다. 그래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해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불법도 아니고 중독도 아니니 괜찮지?”

마치 허락이라도 받는 모양새에 이영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이대로 두다간 정말로 끌어안을 것 같아 이영은 고개를 홱 돌리며 ‘그, 그럼요.’라고 작게 대꾸했다. 말랑말랑한 두 남녀의 분위기에 민다한이 묘한 눈길을 보냈다.

“혹시 둘이 사귀어?”

그 분위기를 같이 느낀 것인지 사장이 장난스럽게 묻자 이영이 화들짝 놀랐다. 이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이영 씨가 아깝죠. 이렇게 어리고 예쁜데.”

이영은 겉치레일 수도 있지만 예쁘다는 칭찬에 볼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거슬리는 한 단어에 입을 열었다.

“스물다섯이 뭐가 어려요.”

대리님과 다섯 살밖에 차이 안 난다. 그러니 만나도 상관없다. 그런 뉘앙스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눈치가 없는 건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인지 이준은 다시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어리지. 스물다섯이면 애기야.”

사적인 자리였으면 어리지 않다고 우겼을 테지만 눈앞에 사장이 있고 후배라 하더라도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 남자가 서 있으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연다.

“어려도 이영 씨 유능한 거 아니까 오늘도 힘냅시다. 모두 일자리로 돌아가죠.”

사장의 환기에 모두들 휴게실에서 각자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기운이 없던 이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운을 차렸다. 사실 기운을 차렸다기보다는 일이 많다 보니 어제의 일에 정신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오전 회의가 길어지면서 그 검토 과정과 관리도 덩달아 길어지니 점심 식사는 평소보다 더 늦어졌다. 그러다 보니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북적한 평소와 다르게 초봄의 따스한 바람만이 가득했다. 이준은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입에다 가져다 댔다.

후, 하고 숨을 내뱉자 하얀 구름이 흩어진다. 금세 사라지는 연기를 보니 이준의 기분이 다시 울적해진다.

“덧없다, 덧없어.”

인생 참 덧없어.

내 아이템들도 이렇게 덧없이 사라져 갔지.

시간의 여유가 생기니 어제의 일이 다시 머릿속에 침투한다. 아마 몇 주는 잊히지 않을 듯했다. 너무 오랜 기간 고생한 탓이다. 또 자신이 얼마나 입방정을 떨었던가. 당장 오늘 접속하면 길드원들이 성공했냐고 물어 젖힐 것이다. 비통한 소식을 제 입으로 내뱉을 생각을 하니 우울하디우울했다.

끼이익.

이준이 홀로 우울함을 곱씹고 있을 때 옥상 문이 열렸다. 이 애매한 시간에 누구지. 이준은 느리게 상체를 틀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대리님. 있으셨군요.”

“응, 다한 씨도 담배?”

“예.”

팀 막내인 민다한이 길쭉한 다리를 휘적거리며 이준의 옆으로 왔다. 이준은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벽에 팔을 기댔다. 담뱃갑을 꺼내는 소리. 라이터를 켜는 소리. 담뱃갑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는 소리. 일련의 과정을 무심히 듣다가 이준이 느닷없이 물었다.

“근데 다한 씨 담배도 했어?”

“갑자기 물으시네요.”

민다한이 황당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준은 태연하게 뒷받침할 말을 더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옥상은 보통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울 때 쓰기 때문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별생각 없이 그도 담배를 피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석 달이나 같이 지냈는데 담배 피우는 모습을 처음 본다는 걸 깨닫고서 궁금증이 생긴 것이다. 상대는 이미 담배를 입에 물고 있어 늦은 질문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