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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앤 키스

2화



“놔! 이거 놔! 이거 뭐 하는 짓…… 아!”

우락부락한 남자에게 팔이 잡힌 나현은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남자가 휴대폰을 가져가 버려 병호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으읏.”

남자가 손아귀에 힘을 싣자 통증을 느낀 나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놔!”

다른 쪽 팔마저 남자의 손에 결박을 당하자 나현은 얕은 비명을 내뱉었다.

“윽.”

나현은 남자의 손을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꿈쩍도 안 하는 커다란 바위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닙니다.”

언제 다가왔는지 ‘루카’라고 불린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 사람들이 자신을 언제 봤다고 도움 운운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도움?”

나현은 의심이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그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밥 먹고 헬스장에서만 살았던 것인지 나현을 옭아매고 있는 남자는 온몸에 근육만 있는 것 같았다.

“같이 가서…….”

“같이?”

나현은 얘기를 들어 줄 것처럼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그들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현의 눈은 분주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드나드는 사람들이 없었다. 고로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하필 점심시간이라 경비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경비가 있다고 한들 이들이 경비를 처리하고 왔을 것 같았다.

“도와줄 거라고 믿어요.”

“뭐……?”

이렇게 사람을 강압적으로 옭아매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는 도움을 달라니 완전 기가 막히는 일 아닌가. 게다가 믿음까지 들먹이며 말이다. 나현은 이 사람들이 정신 이상자가 아닌가 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부탁하는 사람치고는 예의가 없네요.”

나현의 말에 루카라는 남자의 한쪽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꿈틀하는 눈썹의 움직임으로 보아 기분이 몹시 상한 듯 보였다.

“우리가 좀 다급해서 실랑이는 반갑지 않은데…….”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피부가 싸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루카라는 남자는 매너 있는 태도에 정중한 말투였지만 나현은 소름이 돋았다. 합법적인 것이라면 이들이 이런 식으로 찾아올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뭘 믿고 이들을 따라나선단 말인가.

“그러니…….”

나현은 찰나의 순간 생각을 정리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건 나현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주도권을 뺏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손부터 풀어요.”

루카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내뱉자 팔을 잡고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루카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진다 싶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놓아줘.”

움직이지 못하게 자신을 옭아맸던 남자는 고분고분한 아이처럼 그의 말을 따랐다. 팔이 자유로워지자 나현은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부탁…….”

“부탁하려면 얼굴 정도는 드러내고 말해요.”

나현은 선글라스에 눈이 가려진 루카를 향해 날을 세웠다.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남자의 얼굴 정도는 파악해 두어야 한다고 여겼다.

“선글라스 벗으라고요.”

루카라는 남자는 나현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행동을 취하지 않고 서 있었다.

“선글라스 벗으라는 말 못 들…….”

“벗으면 감당은 할 수 있고?”

루카라는 남자는 짜증 난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남자의 되물음에 나현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남자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신상에 더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그래서 싫으면 그만두라고 말할 참이었다.

“싫으…….”

하지만 남자의 행동이 나현의 말보다 더 빨랐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던 남자가 선글라스에 손을 올리자 다른 두 명의 남자가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형님.”

“루카 님.”

얼굴을 드러내면 곤란하다는 듯 그를 다급하게 불렀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아…….”

나현은 작은 탄성을 내뱉고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괜찮겠습니까?”

남자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루카라는 남자를 쳐다보자 그가 나현을 올곧게 내려다봤다.

“이제 됐나?”

정중함이 사라진 루카의 말에 나현은 눈을 치떴다. 그래, 비밀 그런 건 너희들이나 유지하시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인이나 하지 뭐.

“하…….”

나현은 그의 부하들이 곤란해하거나 말거나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못 박힌 듯 선 자리에서 손만 올려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는 시선을 강하게 부딪쳐 왔다.

“모나현 씨,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좋은데.”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렸다. 마치 심기가 비틀렸다는 듯 그렇게.

“꽤 귀찮게 구네.”



#1장. 회수


검은색 머리칼이라 동양인일 거라고 짐작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동양인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숱이 많은 눈썹은 눈썹을 다듬는 여자들보다 더 반듯하고 모양이 예뻤다. 선이 굵은 이목구비였지만 그렇다고 투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햇빛의 반사로 인해서 색이 옅어진 것인지 눈동자에서 오렌지 빛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렌지 빛이 품고 있는 느낌이 좀 살벌했다. 상대를 일말의 미련도 없이 해치울 것 같은 느낌을 담고 있었다.

“동양인?”

“중요한가?”

나현은 자신의 말을 맞받아치는 남자의 시니컬한 여유로움에 미간을 구겼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스타일 같았다.

“그러는 그대는 혼혈?”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남자의 눈길이 자신의 머리칼을 스치고 얼굴로 움직이자 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보다는 아버지 쪽을 더 닮기는 했지만 머리칼과 눈동자 색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밝은 갈색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눈동자도 엷은 갈색이었다.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투명한 갈색이라고 했다. 투명한 갈색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게 중요한가?”

나현 또한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남자가 다시 선글라스를 끼더니 똑바로 응시해 왔다. 선글라스의 색이 진해 나현의 모습이 비쳤다. 나현은 남자가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탁할 일은…….”

“그런데 그 부탁이라는 게 말이죠.”

나현은 생긋 웃으며 루카의 말을 잘랐다. 그 일의 정당성도 모르면서 무조건 하란다고 해야 할 의무 따위는 자신에게 없었다.

“친하거나 적어도 안면이 있는 사이에 하는 겁니다. 이렇게 처음 본 사람이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게 부탁은 아니라는 거죠.”

“Hey!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

나현의 뒤에 서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한국어를 잘 못 알아듣는지 짜증 섞인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현은 그 남자를 슬쩍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리긴. 한마디로 니들이 요구하는 게 개소리라는 말이지.

“쯧.”

“……!”

낮게 혀를 차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 울리자 나현은 화들짝 놀랐다.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본다고 앞을 주시하지 못했다지만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니 섬뜩함이 들었다.

“개소리 잘 들었어.”

루카라는 남자의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까워진 탓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만 눈동자의 방향이 또렷하게 보였다. 당장에라도 자신의 목을 물어뜯어 버릴 만큼 화를 억누르고 있는 눈빛이었다. 나현은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소리는 ‘멍멍’이지.”

나현은 눈꼬리를 접으며 애써 느긋하게 웃었다. 이미 도박을 시작한 이상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다. 주춤해서 멈추거나 물러서면 이들에게 아니, 이 남자에게 정말 물어뜯길 것이다.

“내가 한 건 사람 말이고. 아! 이성이 바닥인 양아치들이라 내 말이 제대로 안 들리나?”

나현은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며 조심스럽게 한 발을 뒤로 뺐다. 이들을 화나게 해서 좋을 건 없지만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이들의 부탁이 무엇이든 간에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아까 통화를 하다 끊어졌지만 곧 병호가 도착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시간을 끌든가 잡히지 않게 도망을 치든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좋아하나 봐, 말장난?”

루카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낮고 음산하게 들려오자 나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가만 생각해 보니 도망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이 납골당 안과 마당에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이봐, 모나현.”

생각에 빠져 있던 나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씨’ 자를 붙이더니 이제는 그냥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그것도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말이다.

“잔머리 굴릴 생각 하지 말고.”

루카라는 남자가 검지로 그녀의 머리를 툭 건드리자 나현은 인상을 구겼다.

“시간을 끌어 봐야 손해나는 건 내가 아니라서.”

나현은 시간을 끌어도 손해나지 않는다는 남자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 분명 다급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실랑이가 반갑지 않다고 했는데.

“아!”

나현은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루카라는 남자가 머리가 좋고 심리전에 탁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객을 전도시킬 만큼 그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 같았다.

“일이 끝나면 진짜 보내 줄 건가?”

나현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냥 고분고분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자신을 편들어 줄 사람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으니 자꾸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끝난 후 돌려보내 준다고 해도 나중에 찾아와 해코지를 하면 어쩐단 말인가.

“나중에 나를 그곳에 두고 집에 보내 줬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곳? 어디를 말하는 거지?”

루카라는 남자가 피곤한 표정으로 되묻더니 팔짱을 꼈다.

“그러니깐 내가 말하는 그곳은…….”

나현은 중지를 세우고 나머지 손가락은 마디가 서로 맞붙게 접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갑자기 화를 냈다.

“야, 이게 돌았…… 아후! 씨발.”

“Are you crazy!”

흥분하는 두 남자와 달리 루카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더니 코웃음을 치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괜찮겠어?”

“뭐가?”

나현은 남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한 눈으로 물었다. 뭐가 괜찮으냐는 건지. 이미 괜찮지 않는데 말이다.

“정중한 부탁도 안 먹히면 다음 방법은 뻔한 위협이고. 그다음은 협박이지.”

이미 정중한 부탁을 거절했으니 위협을 가하겠다는 말이었다. 협박은 납치를 말하는 걸까. 나현의 머릿속이 토네이도보다 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