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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앤 키스

1화



· 일러두기

1. 본문 중에 외국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2. 본 소설의 등장인물, 지명, 사건 배경 등은 실제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프롤로그. 상면(相面)


“일란성 쌍생아는 같은 유전자 소질을 갖고 있고, 이란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유전자 소질을 갖고 있어요. 범죄 일치율 쪽으로 보면 일란성 쌍생아 쪽이 높다고 할 수 있어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나현은 손을 든 학생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질문하라는 고갯짓을 했다.

“일란성 한쪽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다른 한쪽이 같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네,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한 명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다른 한 명이 같이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다만, 쉽게 동조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나현은 강의 시간이 얼마쯤 남았는지 확인하려 손목시계를 슬쩍 내려다봤다. 강의가 끝나고 점심시간 전에 예준에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질문 있습니까?”

나현은 학생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마무리를 짓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학기에는 쌍생아 연구 이후 나온 양자연구(養子硏究)에 대해 알아보게 될 겁니다. 이 연구는 양자의 범죄성이 실부모의 영향을 받는지, 양부모의 영향을 받는지를 비교, 검토하는 겁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은 나현은 가뿐한 마음으로 책을 덮고는 고개를 들었다.

“1학기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나현의 말이 끝나자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부산스럽게 책을 챙기기 시작했다.

“기말고사 잘 치르고 방학 잘 보내요.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교수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인사를 건넨 학생들이 썰물 빠지듯 나가자 강의실은 어느새 적막감이 들었다.

짐을 챙기던 나현은 텅 빈 강의실을 훑었다. 몇 번의 강의 요청이 있었지만 개인 시간이 침해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는데 막상 하고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이 넘치는 몇몇 학생들에게서 좋은 에너지도 받아 흡족했던 시간이었다.

“좀 섭섭해지려 하네.”

어깨를 으쓱하며 책을 챙긴 나현은 감회가 새롭다는 듯 강의실을 한 번 더 훑어보고는 천천히 걸음을 뗐다.

“후, 덥네.”

주차장에 도착한 나현은 혼자 중얼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차 안으로 쏟아지는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선글라스를 써서 가리고는 시동을 걸었다.



* * *



“예준아, 날씨 억울하게 좋다.”

납골당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 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나현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염색을 했다고 착각할 정도로 밝은 갈색 머리칼은 영국인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글라스를 검지에 건 나현은 들고 있던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흐음, 꽃향기도 억울하게 좋네.”

예준이 떠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간 잘 가네.”

어깻숨을 내쉬며 안타까운 듯 혼잣말을 한 나현은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대리석이 깔린 로비에 스틸레토 구두 소리가 경쾌하게 또각또각 울렸다.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입구로 들어서자 전면 유리창을 넘어온 햇살이 길게 납골당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잘 있었어?”

곧장 예준의 앞으로 다가간 나현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꽃다발을 들어 보였다.

“예쁘지? 네가 좋아하는 주황색 장미야.”

사진 속의 예준은 대답이 없었지만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복을 입고 꽃다발을 안은 예준의 뒤로 경찰대 졸업을 축하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때 같이 찍을걸…….”

예준이 혼자 찍은 사진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여 나현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

“나 기말시험 채점 끝나면 다음 주부터 한가해.”

나현은 예준과 대화하는 것처럼 상상하며 맑게 웃음 지었다.

‘모나현이 강의를 다 하고. 출세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은 나현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엄청 바쁜데도 너 보러 온 거야. 나 잘했지?”

눈이 반달이 되게 접은 나현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유리에 손을 올렸다. 대답도 없고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예준은 그저 사진 속에서 웃고만 있었다.

‘생색은.’

예준이 살아 있었다면 분명 저렇게 투덜거렸을 거라고 생각한 나현은 혼자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예준의 사진을 뚫을 듯이 쳐다봤다.

“그날 내가 가지 말라고 말렸으면…… 너는 지금쯤 살아 있을까?”

나현은 예준의 납골함을 만지듯 유리를 쓰다듬다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손을 흔들며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만 움직여 ‘또 올게’라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소리를 내면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구름도 억울하게 예쁘다.”

계단 중간쯤 밖이 훤하게 보이는 커다란 창을 통해 하얀 구름이 수놓인 하늘이 보였다.

“어?”

남은 계단을 내려가려던 나현은 검은색 세단에서 내리는 남자들을 쳐다봤다.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려 급하게 문을 열어 주자 다른 남자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위의 분위기를 압도하면서 모습을 나타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전해지는 카리스마가 예사롭지 않았다.

“분위기 장난 아니네.”

주위를 슬쩍 둘러보는 남자의 뒤로 똑같은 선글라스를 쓴 두 명의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품고 있는 분위기는 범접할 수 없는 뭔가에 싸여 있는 것 같았다. 그중 앞서 걷는 남자의 아우라는 기가 죽을 만큼 단단하고 싸늘하게 느껴졌다. 마치 밟고 지나온 잔디가 다시는 뿌리 내리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루카 님. 시간도 촉박한데 굳이 이렇게 나서실 필요는 없…….>

뒤에 선 남자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하자 앞서 걷던 남자가 뒤를 돌아봤다.

“아, 고개를 돌려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독화(lip reading)를 할 수 있는 나현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영국에서 자란 엄마 조엘은 청각 장애인으로 상대가 말할 때 입술을 읽어 내는 능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나현은 그런 엄마가 신기해 자신도 독화를 하고 싶다고 졸랐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배웠지만 독화는 생각보다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들마다 발음이나 억양이 다른 것처럼 입술의 움직임도 제각각이었다. 그중 입안에 말을 넣고 웅얼거리는 사람의 입술을 읽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네, 차질 없이 준비해 두었습니다.>

앞선 남자가 뭐라고 지시를 내렸는지 뒤따르던 남자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선 남자의 입술을 읽어 낸 나현은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픽 웃어 버렸다.

“고질병. 상관도 없는 사람의 말은 왜 자꾸 읽고 있는 거야.”

나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질책하다 움찔 놀랐다. 뒤를 보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설마…….”

느낌이 이상해진 나현은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고개를 저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고, 건물 유리로 인해 빛이 반사된 것이지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아니라고 애써 부정했다.

“아! 늦겠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세 명의 남자가 보이지 않자 나현은 걸음을 재촉했다. 막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아까 본 세 명의 남자가 납골당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본 나현은 관심 없는 척하며 지나가려 했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와중에 꽉 다물린 남자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몇 구역이지?>

나현은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또 입술을 읽어 내다 미간을 구겼다. 보통 어느 쪽이지, 라든가 몇 층이지, 라고 묻는 게 일반적인데 남자는 다른 단어를 쓰고 있었다.

“하아, 또…….”

막 그들을 지나친 나현은 자신을 나무랐다. 상관없는 사람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본 것이 미안해진 나현은 혼자 멋쩍은 얼굴로 건물 입구 문을 열었다.

“……!”

유리문을 열다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 나현은 멈칫했다. 계단을 올라간 남자가, 그들의 보스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나현은 순간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을 쳐다보던 남자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다시 걸음을 떼자 나현은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1초밖에 지나지 않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입술이…… 비웃고 있었어.”

독화를 하는 나현은 상대의 눈보다 입술을 먼저 쳐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돌아서던 그 남자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벗지 않아 하관이 더 눈에 들어왔다.

“왜, 나를 보고 웃었지? ……착각인가.”

애써 고개를 내저은 나현은 손으로 소름이 돋은 팔을 벅벅 문지르고는 주차된 차로 걸음을 재촉했다. 차 문을 열려고 손을 뻗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순간 섬뜩한 느낌이 전해져서 나현은 흠칫 놀랐다.

“……어, 병호야.”

기분 나쁜 느낌과 달리 발신인은 예준의 경찰대학교 후배 병호였다.

― 선배님, 지금 납골당이세요?

“응.”

바로 납골당이냐고 묻는 것으로 보아 예준의 기일을 병호도 챙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예준이 기억하는 사람 많아 좋겠다.

“이제 납골당에서 나가려고…….”

“모나현 씨?”

등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탁한 음성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현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바짝 주며 뒤를 돌아봤다.

“모나현 씨 맞습니까?”

나현은 부정도 긍정도 못 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아까 납골당 로비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들과 안면이 전혀 없는데 남자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선배, 나도 곧 도착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휴대폰에서 병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남자 때문에 당황한 나현은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모나현 씨, 부탁이…….”

“다, 당신 뭐야?”

남자가 손을 뻗자 놀란 나현은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도움을 청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라는 말에 나현은 남자의 뒤쪽을 쳐다봤다.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던 남자가 팔짱을 끼고 건물 입구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선배! 무슨 일이에요?

병호가 외치는 소리에 정신이 든 나현은 위험을 감지하고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남자가 한발 더 빠르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