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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이야기 4화

제1장. 봄의 신부 (4)


“저기, 저 숲 보이세요?”

클로드가 창밖 풍경을 손가락질하며 에티엔을 불렀다. 에티엔은 언제 그랬냐는 듯 클로드의 손가락 끝을 시선으로 좇았다.

“뭔가요?”

클로드가 가리킨 것은 평원 끄트머리에 보이는, 짙푸르다 못해 검은색에 가까운 숲이었다.

“저 숲 말입니다. 여기선 일부밖에 안 보이지만 사실은 저 너머로도 한참은 더 펼쳐져 있는, 굉장히 큰 숲이에요. 그리고 우리 가문의 유래이기도 하죠.”

“유래요?”

“네. 저 숲의 이름은 아주 오래전부터 검은 숲이었어요. 겉보기에도 까맣게 보이기도 하지만…… 안에 들어가면 빽빽한 나무 때문에 빛이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죠. 그래서 검은 숲. 그리고 우리 가문의 이름은…… 슈바르츠발트(검은 숲).”

“둘 다 검은 숲이군요.”

에티엔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럼 슈바르츠발트의 선조는 원래 저 숲에 살았던 건가요?”

에티엔의 물음에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모르죠. 본래는 사냥꾼이었을지 화전민이었을지. 아마 돌연변이로 베타 사이에서 나타난 알파 아니었을까 싶어요. 확실한 건 틀림없이 고귀한 출신은 아니었을 거라는 겁니다. 지금 저는 여기 성에 앉아 평민들을 내려다보지만, 만일 운이 좋지 않았다면 전 저 밑에서, 다른 베타들과 섞여 살고 있었을 테죠. 평민으로, 하루하루를…….”

클로드의 말끝이 흐려졌다. 에티엔은 클로드가 마저 말하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햇빛 때문인지 유달리 말갛게 빛나는 눈동자로.

어쩐지 창피하다. 쓸데없이 감상적인 모습을 들켜 버린 것만 같다. 평소엔 남들 앞에서 이러지 않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조금 전의 말을 모조리 지워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목청을 돋워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저기, 검은 숲으로 자주 사냥을 나가거든요. 운 좋으면 사슴도 잡을 수 있어요. 관심 있으면 다음에 한번 같이 가요.”

하지만 에티엔은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저 그런 건 젬병이라…….”

“말은 탈 줄 알잖아요? 걱정 마세요. 제가 같이 갈 테니까. 성 안에만 있으면 갑갑할 거잖아요. 가끔 바깥바람 쐬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에티엔은 눈을 몇 번이고 깜박이다 시선을 내리고 입술을 가만히 오므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주 잡은 양손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에티엔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약속한 겁니다? 그때 가서 마음이 바뀌었다느니,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돼요.”

클로드가 쾌활하게 웃으며 농을 던지자 에티엔도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띠었다. 보다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에티엔은 대답했다.

“약속할게요.”



***



성의 하녀 마르티나는 빨랫감을 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세탁실의 문을 열자 조안나와 칼이 산더미같이 쌓인 빨랫감을 분류하고 있었다.

“여기, 한 덩어리 더 왔다.”

마르티나가 옆에 바구니를 내려놓자 조안나가 으엑, 하고 죽는 소리를 냈다.

“또 왔어? 뭔 놈의 빨래는 이렇게 해도 해도 줄지를 않아. 마르티나, 너도 여기 앉아서 돕고 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네요.”

마르티나는 조안나 옆으로 의자를 끌어 앉고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빨래를 색깔과 종류에 따라 재빠르게 분류해서 던져 넣었다.

“오는 길에 베아트리스 님을 만났지 뭐야.”

마르티나가 말을 꺼냈다. 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겠다. 또 눈웃음 치고 지나갔지? 그분은 여자 베타만 보면 늘 그러잖아.”

“뻔하지 뭐. 그런다고 넘어갈 나도 아니지만. 나는 굳이 따지자면 베아트리스 님은 취향이 아니란 말이야.”

마르티나의 말에 조안나가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마르티나 굉장한데? 그럼 넌 누가 취향인데? 난 기사님들 중에서는…….”

“클로드 님이지?”

갑자기 치고 들어온 마르티나의 말에 조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르티나, 너 뭐야, 어떻게 알았어?”

“다 알지. 왜 몰라. 클로드 님 좋아하는 애들이야 널렸는걸. 잘생겼고, 키 크고, 우성 알파에다가, 무엇보다 영주님 외동아들인데도 전혀 잘난 척 안 하고 어디 다른 데 귀족님네들처럼 난봉도 안 부리니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러는 너는 별로라는 것 같네?”

칼이 눈치 빠르게 묻자 마르티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뭐, 싫다는 건 아닌데……. 너무 깨끗하다고나 할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조안나가 캐묻자 마르티나는 으음,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담백하고 금욕적이라고 해야 하나. 솔직히 나이가 이미 찰 만큼 찼잖아. 다른 귀족들이면 애저녁에 결혼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아직도 총각인데 연애 관련으로 소문 한번 안 나고. 다른 귀족 오메가들이 호시탐탐 노린다고 하는데도 말이야. 너무 깨끗해도 의심이 가잖아.”

“구실은 할 수 있을지 말이지?”

칼의 의미심장한 말에 조안나와 마르티나는 높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곧 주인의 험담에 웃었던 것을 지워 버리고 싶은 것처럼 재빨리 조안나가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결혼 적령기가 지나긴 하셨지.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안주인 님…… 그러니까, 에티엔 님보다도 나이가 많잖아. 에티엔 님이 몇 살이지? 스물?”

“그 정도였을걸. 딱 맞게 결혼한 거지. 그나저나 성에 오메가가 들어온 게 얼마만이야? 우리 성에는 이상하게도 오메가가 없잖아.”

“아네테 마님이 돌아가시고 나선 처음이니까 거의 5년 만이네. 뭐 그래 봤자 각인되었을 테니까. 각인된 오메가는 베타나 마찬가지지. 페로몬을 못 뿌린다잖아?”

칼은 그렇게 말하면서 흰 튜닉을 옷더미 위에 집어던졌다.

“각인 안 된 오메가가 이 성에 들어오면 난리가 날걸. 여긴 온통 한창 나이 알파들로 바글바글하잖아.”

“그래 봤자 그분은 열성이라던데? 열성은 페로몬이 거의 안 나서 베타랑 거의 구별이 안 간대. 알파들도 구별 못 한다잖아. 말이 괜히 열성인 게 아니지. 각인 됐든 안 됐든 거기서 거기일 거다, 아마.”

마르티나가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고는 갈색 가죽 바지를 바구니에 던졌을 때였다.

“저기, 잠시만요.”

약하고 작은 목소리. 마르티나와 조안나, 칼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 사람은 심장이 떨어진다는 감각을 함께 경험했다.

“잠깐 물어볼 게 있어서요.”

세탁실 문가에 에티엔이 서 있었다. 설마 아까 이야기하던 걸 다 들었을까? 언제부터 들었던 걸까? 마르티나와 조안나, 칼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서로 바쁘게 주고받았다. 그나마 그중에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마르티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별 건 아니고요. 미레트 부인을 찾고 있는데 어디쯤 계실지 알고 싶어서요.”

에티엔은 아랫사람을 대하고 있으면서도 평소처럼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 평온한 표정을 보며 마르티나는 마음속에 꼿꼿이 세웠던 긴장을 풀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이쪽으로 걸어가서 1층 창고로 내려가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봄맞이 창고 정리를 한다고 했거든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에티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가 잘 나지 않는 걸음걸이로, 그는 아침 햇살이 창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이 이상하게도 연하고 투명해서, 금방이라도 햇빛에 녹아 사라질 것만 같다고. 마르티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가만히 쳐다보다가 몸을 내밀고 외쳤다.

“저기, 에티엔 님!”

에티엔이 고개를 돌렸다. 갓 씻어 말린 순면 천처럼 하얗고 말간 얼굴이 의아한 빛을 띠고 마르티나를 향했다.

“걸어가다가 나타나는 두 번째 계단에서 내려가셔야 해요. 첫 번째 계단은 후문으로 가는 길이니까 헷갈리시면 안 돼요.”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에티엔이 살풋 웃었다. 새물내가 나는 미소였다. 마르티나는 멀어지는 에티엔의 모습을 보다가 세탁실로 돌아왔다. 조안나와 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뭐야? 다 들었을까?”

조안나가 호들갑스럽게 두 손을 맞잡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마르티나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들었다 하더라도 해코지할 분 같지는 않아 보였어.”

조안나는 그래? 하고 반색했지만 칼은 눈살을 찡그렸다.

“정말로 그럴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도 셰니에 가문 사람이잖아.”

마르티나는 입을 다물었다. 셰니에 놈들은 믿을 수 없어, 셰니에는 자기 잇속만 챙겨, 셰니에는 교활한 놈들이야……. 수없이 들어온 이야기였다. 마르티나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일이나 하자고 소리쳤다.



창고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레트 부인은 그 앞에 서서 일꾼들에게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 창고 정리의 주목적은 겨우내 창고 속에 묵혀 놔 곰팡이가 필락 말락 하는 곡식들을 봄볕에 늘어놓고 말리는 것이었다.

그 김에 창고 안에 함께 녹슬어 가던 농기구와 병장기나 좀먹기 시작한 무명천 따위를 꺼내 손질하는 작업도 해야 해서 보통 바쁜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작업을 전두 지휘하고 있는 미레트 부인은 마치 전쟁터의 사령관처럼 험악한 얼굴로 덩치 큰 일꾼들을 손끝 하나로 부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에티엔은 예상외로 전투적인 모습에 잠시 멈춰 섰다. 말을 걸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도저히 잡기가 어려웠다. 에티엔은 언제나 이런 데에 약했다. 아까 하인들한테 말을 걸 때도 그만 깜짝 놀라게 해 버렸다. 딱히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화낼 생각도 기분 나빠할 생각도 없는데. 원래 아랫사람들이란 윗사람 씹어 대는 낙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걸 에티엔은 잘 알고 있었다.

에티엔은 조심스럽게 미레트 부인 곁으로 다가갔다. 존재감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미레트 부인은 에티엔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니야, 루드, 그건 봄밀 종자니까 저기로 갖다 놓으라고 했잖아! 한 번만 더 또 저기 갖다 놓으면 네 머리를 도리깨로 쳐 버릴 테니까!”

“저기, 미레트 부인.”

“요한, 그건 삼베로 감싸라고 했잖아. 삼베는 저기 안쪽에 있어! 귓구멍에 솜이라도 틀어막았어? 한 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

“미레트 부인!”

결국 에티엔이 목소리에 힘을 실어 외치자 그제야 미레트 부인은 고개를 돌렸다.

“에티엔 님. 여긴 웬일이세요?”

조금 전까지 일꾼들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치 매끈하게 정돈된 목소리였다.

“아, 저…… 봄맞이 창고 정리를 한다고 해서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그게…….”

에티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보통, 안주인은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들어서요.”

미레트 부인은 잠시 가만히 에티엔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주름진 눈이 에티엔을 면밀히 살펴보더니 곧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이게 보기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서요. 창고에 뭐가 어떻게 있는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다 알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에티엔 님은 아직 그런 걸 잘 모르시잖습니까. 지금 너무 바빠서 제가 그걸 다 일일이 가르쳐 드릴 틈도 없고요. 죄송하지만 그냥 돌아가시는 편이 낫겠군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단 한 줌의 반론도 허용하지 않는 논리 정연한 말에 에티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에티엔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일손이 모자라 보이는걸요. 거기다 이건 분명 제가 해야 하는…….”

“저희끼리도 충분합니다.”

미레트 부인이 에티엔의 말을 가로막았다. 명백히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미레트 부인은 이만하면 알아듣지 않았냐는 듯 에티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눈치 없는 일꾼 하나가 미레트 부인에게 “이건 어디다 둬요!” 하고 물어보자 미레트 부인은 고개를 돌려 “거기 놔! 바로 앞에 있잖아”라고 일갈한 다음 다시 에티엔을 쳐다보았다.

“돌아가서 쉬고 계시지요. 여긴 제가 다 처리할 테니까요. 원래 이런 궂은일은 저희 같은 아랫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아까보다 확연히 부드럽게 꾸민 목소리로 미레트 부인이 말했다. 에티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에티엔은 자리를 떠나기 직전,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미레트 부인. 혹시, 예전의…… 아네테, 공작부인도, 이랬나요?”

미레트 부인의 눈빛이 기묘해졌다. 그녀는 잠시 빤히 에티엔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딘가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아네테 마님은 정말 완벽한 분이셨죠.”

그건 무슨 의미일까. 에티엔은 재차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미레트 부인은 네모나게 각진 턱을 굳게 다물고는 짧게 에티엔에게 묵례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에티엔에게 오늘 유일하게 보인 아랫사람다운 몸짓이었다. 에티엔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



서재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에 클로드는 조금 놀랐다가,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이제껏 서재엔 아무도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고작 몇 주 에티엔이 서재에 있는 것에 그새 익숙해져 버리다니.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머금었다.

에티엔은 함께 있기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함께 있으면 어쩐지 편해지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옅고 차분한 미소를 띠고서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클로드의 말에 호응하고 맞장구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길게 말할 때면 항상 대화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거나 클로드에게 장난으로 짓궂게 얼굴을 찡그려 보일 때면 놀랄 만큼 어려 보였다.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클로드는 에티엔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의외로 손재주가 없고 여기저기 잘 부딪치는 데다 피부도 약해 언제나 멍을 달고 있고, 클로드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성적으로 설명해 준다든가. 에티엔 역시도 클로드가 은근히 입이 짧고 하루에 두 시간은 꼬박꼬박 검술 훈련을 하며 서재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것치고는 책을 많이 안 읽는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클로드는 언제부턴가 에티엔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성에 자기 또래의 아이들은 많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알고 지냈던 베아트리스도 그렇고, 다른 기사들도 클로드와는 동년배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클로드는 ‘도련님’이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지내는 또래 친구는,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무예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래서일까, 클로드는 에티엔과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편안한 기분이었다. 지금 언제나 서재에 있던 에티엔이 보이지 않자 아쉬움을 느낄 만큼.



클로드는 서재에서 나와-또다시 길고 복잡한 계단과 계단을 한참이나 거쳐- 성 안의 뜰을 가로질러 가다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누군가 뜰 한쪽 구석에 꾸며 놓은 정원 바위에 앉아 있었다. 따스한 봄볕이 그늘도 없이 고스란히 내리쬐는 그곳에서 그는 무언가를 흔들고 있었다. 작은 몸집,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무엇보다 저 한가로운 몸짓을 보자 클로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에티엔이었다.

에티엔은 클로드에게서 등을 돌린 모양새였다. 동그란 갈색 뒤통수는 노랗게 햇살을 반사하고, 등은 살짝 구부정하게 숙였다. 손에서 살랑이며 흔들리는 초록색. 무엇을 들고 있는지는 몰라도 손을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 몸짓에 못 이겨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허리를 세웠다. 그 순간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하핫,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티엔은 손에서 떨어진 초록색 무언가를 허리를 구부려 주웠다. 클로드는 그 곁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예요?”

에티엔이 고개를 돌렸다.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개나리처럼 샛노란 빛이 에티엔의 피부에서 부드럽게 빛났다. 몸 전체가 봄볕에 그대로 물들은 양 밝고 따스하게 번지는 미소. 햇살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클로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햇빛에 바짝 마른 빨래의 냄새처럼 깨끗하고 따뜻하고 바삭이는 냄새가.

“어라, 클로드네요. 여기 웬일이에요?”

“그건 내가 물을 말인데.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그…… 강아지풀로?”

클로드가 에티엔의 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묻자 에티엔이 배시시 웃었다.

“이거요, 음, 그게…… 고양이가 좋아해서요.”

그러면서 에티엔은 맞은편에 벌러덩 누워 있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흰 털에 노란색 얼룩이 있는 큰 놈이었다. 쥐잡이용으로 성 안에 풀어 둔 고양이들 중 하나로 클로드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이었다.

“강아지풀을 흔들어 주면 잡으려고 하거든요. 그게 귀여워서 계속하다 보니…….”

에티엔이 조금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으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게 설명하는 본인이 더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클로드는 굳이 말하지 않고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 웬일로 서재에 없어서 어디 갔나 했는데, 여기서 볼 줄은 몰랐습니다.”

클로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에티엔은 아, 하고 조금은 난처한 듯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게, 사실 오늘 성의 곡식 창고를 정리한다고 해서…… 좀 도와줄 게 없나 하고 갔거든요. 그런데 미레트 부인이 아직 전 여기 사정을 잘 모르니까 그냥 쉬고 있는 편이 나을 거라고 해서요. 그래서 그냥 여기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어요.”

클로드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결국엔 ‘넌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를 돌려서 말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 성의 안주인은 그다지 한가한 역할이 아니다. 거대한 성 안의 하인과 하녀들과 일꾼들, 온갖 살림을 총괄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며 그 탓에 평소엔 성주보다도 훨씬 바쁜 사람이 바로 성의 안주인이다. 하지만 에티엔은 여기에 온 이래로 그저 하릴없이 서재와 방, 안뜰을 오가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지금껏 성의 살림을 관리해 오던 미레트 부인이 늘 이런 식으로 에티엔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도 넘기지도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차피 외부인이라는 것처럼, 외부인은 외부인답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허수아비로 존재하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