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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길을 되돌아 나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한 두 시간 정도 걷자 자동차와 오토릭샤로 혼잡한 도로가 나왔다.

지나가던 오토릭샤를 잡아탄 민혁은 게스트 하우스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민혁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원섭은 인도 직원하고 무언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탓이 민혁이 들어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에고~ 힘 들어라.”

민혁은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그제야 원섭이 고개를 돌렸다.

원섭은 인도 직원에게 뭐라 뭐라 지시를 내리고는 민혁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왔냐? 일은 잘 끝냈고?”

“그럼요. 완벽하게 처리해 놓고 왔어요.”

“그래, 수고했다. 점심 먹어야지?”

“네. 이번에도 선배 솜씨를 기대할게요.”

“후훗, 녀석. 그래,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

“김치찌개는 얼마 전에 먹었으니, 이번엔 구수한 된장찌개로 부탁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



그릇 바닥까지 삭삭 긁어가며 식사를 마친 민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자 위에 늘어졌다.

그 모습에 원섭은 따듯한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님, 신경섭 사장한테 아무 연락 없었어요?”

“안 그래도 아침 아홉 시쯤에 전화 왔어.”

“뭐라고 하던가요?”

“한 열 시쯤에 컨테이너를 출고 받는다고 하더라.”

“그럼 지금쯤은 물건 다 내렸겠네요?”

“아니. 여긴 손으로 내려야 하니까 시간 좀 걸릴 거야.”

“지게차는 뒀다 뭐 하고요?”

“나는 지금까지 신 사장이 파렛트에 물건을 실어 온 것을 한 번도 못 봤어.”

“네? 원래 파렛트에 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파렛트에 물건을 실으면 컨테이너에 죽는 공간이 많이 생기는 문제가 발생해. 그래서 신 사장같이 욕심 많은 사람들은 절대로 파렛트를 사용 안 한다고 보면 돼.”

“그럼 상하차할 때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나요?”

“상차는 수출하는 사람 책임이니까 신 사장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하차는 이곳 인건비가 싸니까 여러 사람이 달라붙으면 금방 내릴 수 있어.”

“이야, 역시 신 사장이 그런 부분에서는 빈틈이 없네요.”

“그렇지.”

민혁은 원섭의 말대로 자신이 신 사장과 같은 입장이라도 똑같은 방법을 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 인도는 세관원에게 찔러주는 뒷돈이 상상 외로 많았다.

대개 컨테이너의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금액의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컨테이너당 얼마씩 고정적인 액수를 주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 업자들은 컨테이너를 가득 채워 오는 것이 조금이나마 이익인 것이다.

“그럼 작업은 몇 시쯤 끝날까요?”

“끝나면 곧장 이리로 온다고 했으니까, 잠시 기다리면 될 거야.”

“그래요? 근데 왜 온대요? 그냥 전화로 해도 될 것을.”

“아무래도 소고기 좀 먹어보라며 생색을 내려는 것이겠지.”

“음, 정말 그렇다면 얻어먹어도 되나 모르겠는데요? 그거 완전 뇌물이잖아요.”

“그렇지. 너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건데, 매몰차게 돌려보낼 거야?”

“하긴 뭐, 그냥 내쫓기도 좀 그러네요.”

“어찌 됐든… 고맙다, 민혁아.”

“뭐가요?”

“네 덕에 인도에서 소고기도 다 먹어보고.”

“네? 그럼 선배는 여기서 소고기를 한 번도 못 먹어보셨어요?”

“인도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냐?”

민혁의 순간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굳이 찾으면 먹지 못할 것도 아닌데 11년 동안 인도에서 한 번도 소고기를 먹어보지 못했다는 말에 민혁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 나라에서는 소가 죽으면 어떻게 해요?”

“나도 그 점이 궁금해서 인도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

“뭐라고 하는데요?”

“소는 살아 있을 때만 신성하지, 죽으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죽은 소는 먹어도 된대.”

“그러면 소고기를 먹는 게 완전히 금기시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죽은 소의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하층민하고 불가촉천민뿐이고, 그들만 먹는 것이 허락된다는 거야.”

“그건 또 왜 그런데요?”

“그 사람들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죽은 소를 치우는 사람들은 카스트 네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최하층의 불가촉천민이 한다고 들었어.”

들으면 들을수록 정말 신기하고 이상한 나라, 인도였다.



***



“고생했어.”

“고생이랄 거까지 있나요?”

“물품은 그대로 있던가?”

“닭고기 몇 박스가 없어지긴 했는데, 소고기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세관 놈들이 가지고 간 건가?”

“그놈들 말고는 그럴 인간이 없죠.”

“뭐, 그 정도는 선물로 줬다고 생각하자고. 그래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하구먼.”

“저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흐흐흐, 이번에는 돈 좀 만질 수 있을 거야.”

“부대비용까지 우리가 부담한다고 해도 세 배 가까이 남을 겁니다.”

신 사장은 계산기를 집어 들어 이익이 얼마 될지 한 번 두드려 보았다.

도출된 계산 값이 눈에 들어오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대략 8~90만 달러 가까이 남는다는 얘기네?”

“재고만 안 남으면 그렇게 될 겁니다.”

“조금 덜 남겨도 상관없으니까, 재고 남길 생각 하지 말고 빨리 판매하자.”

“네? 왜요?”

“이 사람아, 강민혁이라는 좋은 패를 들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 둘 거야?”

“강민혁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물론 마주 대하면 무섭긴 하지만… 그거랑은 다르잖아요.”

“자네는 첸나이 세관장이 강민혁에게 설설 기는 것을 못 봐서 그래.”

신 사장은 세관장실에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때, 라메시 세관장의 태도는 마치 자신의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민혁의 위상을 확인한 신 사장이 은근한 목소리를 물었다.

“그나저나, 소고기 좀 챙겨놨어?”

“등심과 안심, 갈비로 해서 각각 10㎏씩 챙겨놨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의 호구가 되어주실 분을 향해 출발해 보자고.”



같은 시각, 민혁은 숙소에서 만화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직 신 사장이 오려면 멀었고, 그사이에 양아치 놈들을 손 보기에도 시간이 애매했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나야.”

딸깍.

민혁이 문을 얼른 열어주자, 원섭은 뭘 하느라 문까지 잠가뒀냐며 투덜거렸다.

“그냥 만화책 좀 봤어요.”

“정말? 뭔가 딴짓한 것은 아니고?”

“에이, 선배도 참. 제가 뭐, 그럴 나이인가요.”

“응? 그게 나이랑 뭔 상관이라고?”

“어휴, 됐어요. 그나저나, 신 사장 왔어요?”

“방금 출발한다고 전화 왔으니까, 30분쯤 지나면 도착할 거야.”

“그러면 지금 내려가야 하나요?”

“그럴 것까지는 없고, 그냥 천천히 내려가자고.”

“네. 근데 선배님, 왜 이렇게 만화책이 많아요? 만홧가게 차려도 되겠어요.”

“으응~ 그거?”

원섭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순순히 이유를 털어놓았다.

“이 나라는 놀 거리가 정말로 부족한 나라야. 술이나 고기도 마음대로 못 먹고, 그렇다고 유흥이 발달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한국에서 출장 온 사람들이 할 게 뭐가 있겠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잠자는 것하고, 만화책 보는 거밖에 더 있겠어?”

“그러고 보니 한국 채널도 두 개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내 말이. KBC World는 만날 재방송만 틀어주지, YTM은 뉴스만 틀어주는데, 뭔 재미가 있겠냐. 솔직히 요새 한국 소식 들어봐야 신나는 일도 없고.”

“그건 선배님 말씀이 맞네요.”

민혁과 원섭은 한동안 더 노닥거리다 슬슬 게스트 하우스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신 사장이 도착할 때가 거의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사무실로 내려오자, 마침 신 사장도 케네디와 함께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섰다.

신 사장은 케네디를 시켜 차에서 냉동 소고기를 꺼내 왔다.

“신 사장님, 어서 오세요.”

원섭이 먼저 신 사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신 사장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입에 발린 인사를 꺼냈다.

“허허허, 자주 뵙네요, 장 사장.”

“더우시죠? 어서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오세요.”

“고맙습니다.”

신 사장은 자리에 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케네디는 사무실 문가에서 냉동 소고기 박스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결국 보다 못한 민혁이 케네디를 불렀다.

“케네디 씨도 이리로 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 좀 쐬세요.”

그럼에도 케네디는 꼼짝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민혁 씨, 이 소고기를 빨리 처리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순간, 신 사장이 민혁과 원섭에게 들으라는 듯 한마디를 했다.

“아, 맞다. 장 사장님, 저 소고기는 녹으면 안 되니까, 얼른 냉동고에 넣어두세요.”

“네? 신 사장님, 저는 소고기를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하하하, 잘 알면서 왜 그러세요, 선수들끼리.”

“크흠, 그런 건가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거, 혼자만 몰래 드시지 말고, 민혁 씨가 한국 들어가시기 전에 거하게 함께 구워 드세요. 제가 일부러 상등품으로만 골라 왔습니다.”

민혁과 원섭은 신 사장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위해 특별히 소고기를 챙겨 왔다’라는 기색을 폴폴 풍겨 대는데, 그걸 못 알아차리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에 민혁은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야~ 신 사장님 덕분에 한국에서도 제대로 못 먹는 소고기를 인도에서 맛보게 되네요. 잘 먹겠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원섭은 인도 직원을 불러 소고기를 냉동고에 옮겨 넣으라고 지시를 내린 후,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의 노림수가 먹혀든 듯하자 신 사장은 다시 한 번 공치사를 했다.

“민혁 씨 덕분에 큰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 제가 뭘 했다고요.”

“에이, 다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역시나 듣기 좋은 노래도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민혁은 신 사장의 입에 발린 말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사장님, 감사 인사는 이쯤 하도록 하죠.”

“허허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모든 비용이 정리되나요?”

“데머리지 비용은 내일 오전 중으로 입금할 예정입니다. 물론 물품 대금도요.”

“그럼 모레쯤에는 한국에서도 확인할 수가 있겠네요?”

“아, 그건 아마 못할 겁니다.”

“네? 아니,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민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민혁 씨가 국제 송금 시스템을 잘 몰라서 하는 말 같은데요, 제가 이곳 인도 은행에서 한국의 지정된 은행으로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요? 저는 처음 듣는데요?”

“저도 국제 금융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만, 제가 여기서 돈을 송금하면 우선적으로 인도 은행과 환거래 계약을 맺은 은행으로 송금 내역이 보내질 겁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국의 은행으로 돈이 송금되는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빨리 간다손 치더라도 사나흘은 기본적으로 걸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알아보세요.”

“음, 한마디로 복잡 미묘하네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그 복잡 미묘한 국제 금융 시스템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대신 각종 증빙 자료는 내일까지 모두 저한테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한국에서는 연락이 없습니까?”

“저는 지금 베트남 출장 중인 셈이라 연락이 없는 것 같은데, 케네디한테는 자주 연락이 오는 것 같더라고요.”

“왜요?”

“아무래도 8월 발주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신 사장은 그러면서 지난주에 성 과장하고 통화한 내용을 민혁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 새끼가 그런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민혁 씨도 한국에 들어가시면 단단히 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사장님이 피해를 입으실까 걱정입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번 참에 진드기 같은 세 인간을 떼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민혁은 신 사장과 연관된 것이 고인선 부장과 성민호 과장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신 사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한 명이 더 있다는 게 아닌가.

민혁이 전에 건네받은 리베이트 지급 장부에도 그 사람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네?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한테는 크게 뜯긴 것이 없어서 따로 말씀을 안 드렸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고 부장 위에 있는 박만호 상무입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민혁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한패라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는 챘지만, 신 사장 입에서 직접 박만호 상무가 언급되자 새삼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왠지 그들이 벌이는 일들이 작은 규모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얽힌 인도 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이곳에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고 부장과 성 과장을 날려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박만호 상무가 사전에 차단할 것이 분명했다.

“박 상무님이라고요?”

민혁이 놀라 묻자, 신 사장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술술 이야기를 털어놨다.

“네. 제가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한 번 이상 만나서 접대를 하는데, 싸구려 술집은 아예 갈 생각을 안 합니다. 하룻밤 술값으로 최하 오백에서 천만 원 정도는 기본적으로 씁니다.”

“박 상무님하고 단둘이 마십니까?”

“주로 넷이 만나서 마시는 게 거의 대부분인데, 가끔 따로 마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어찌 됐든 사장님한테는 최대한 피해가 안 가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후, 신 사장과 케네디는 원섭이 차려준 푸짐한 저녁까지 얻어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식사를 하는 내내 신 사장은 민혁과 라메시 첸나이 세관장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물었는데, 민혁은 적절한 선에서 이야기를 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