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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섭은 민혁의 말에 걱정부터 들었다.

사실 그냥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인도의 고위직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지만, 밑바닥 조직들과의 충돌은 앞으로의 사업에 좋을 게 없었다.

물론 그보다 민혁의 신변에 혹시라도 위험이 닥칠까 저어되는 게 사실이었다.

“진짜 하려고?”

“네. 복수를 끝내고 나서 인도를 떠날 생각이에요.”

원섭이 걱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오자, 민혁은 긴장을 풀어줄 겸 가볍게 말을 꺼냈다.

“선배, ‘은혜는 두 배, 복수는 천 배’라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열 배 아니었냐?”

“어쨌든요. 근데 혹시… 이 근처에 빈 창고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있나요?”

원섭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곧 무언가를 떠올린 듯했다.

하지만 말을 해주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듯 민혁의 의사를 물었다.

“진짜로 복수하려고?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면 안 돼?”

“아니요. 전 이미 결심했어요.”

“그럼 경찰에게 맡기면 안 되냐? 사제한 총수에게 말하면 적극적으로 해결해 줄 텐데.”

“절대로 안 됩니다!”

원섭은 민혁의 단호한 어조에 자신이 말려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민혁이 해온 일들을 보면, 자신은 상상할 수도 없는 해결 방안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했다.

민혁에게는 거스를 수 없는 그 어떤 위엄이 불쑥불쑥 드러날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이 그러했다.

“알았다. 도와주마.”

“고마워요, 선배.”

“창고보다는 지하실이 좋지 않을까?”

“어디 좋은 데 있어요?”

원섭은 민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민혁아, 저기 건물 보이지?”

민혁은 원섭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짓다 만 건물이 하나 있었다.

“저 건물을 아세요?”

“응. 이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이 짓다 만 건데, 1층하고 지하실은 완성이 됐어. 저 건물 지하실을 내가 창고로 사용하고 있거든.”

“그곳에 있는 물건들은 어떻게 하고요?”

“지하실에 들어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 1층으로 옮겨놓으면 돼.”

“넓이가 얼마나 되는데요?”

“실 평수 기준으로 30평이 넘으니까, 그렇게 작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오늘 낮에 비워주세요.”

“알았다.”



쾅!

역시나 양아치 놈들이 사무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왔다.

오늘은 네 놈이었는데, 그중 한 놈은 지금껏 이곳에 온 적이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민혁은 그놈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딱 일주일 전, 자신이 보복 폭행을 당할 때 주변 양아치 놈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던 놈이었다.

양아치 같지 않게 곱상한 외모 때문에 더 확실히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걸로 봐서는 중간 보스급 정도 되는 놈 같았다.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내가 너는 반드시 손을 보고 돌아간다.’

쾅!

이놈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원섭에게 뭐라고 몇 마디 지껄이더니만, 바로 뒤돌아서서 사무실 문을 발로 걷어차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선배님, 자동차 키 좀 빌려줘요.”

원섭은 망설일 것도 없이 민혁에게 자동차 키를 던져 주었다.

민혁은 서둘러 나가 자동차 시동을 급하게 걸었다.

끼리릭.

“어라?”

그런데 시동이 안 걸렸다.

마음은 급한데 별게 다 문제라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당황한 마음에 이러저리 살펴보니, 기어가 ‘R’에 가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 정신 차려라.”

기어를 ‘P’로 바꾼 민혁이 다시 침착하게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이번에는 부드럽게 시동이 걸렸다.

민혁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켜 양아치 놈들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놈들은 바로 아지트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차를 세우더니, 근처에 있는 업소들을 하나하나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아마도 원섭 말고도 다른 이들에게 보호비를 뜯어내는 것 같았다.

“에이, 괜히 따라왔나? 차라리 본거지에서 기다릴 걸 그랬네.”

민혁은 두 시간 정도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양아치 놈들은 꼼꼼하게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협박을 늘어놓았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 이윽고 양아치 놈들이 퀸즈 파크 쪽으로 차를 모는 듯했다.

“드디어 네놈들 소굴로 돌아가는구나. 내일부터는 그냥 거기서 기다려야겠다.”

민혁은 놈들의 소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주차를 하고는 동태를 살폈다.

한 30분쯤 지나자 아지트에 들어갔던 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놈들은 각자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타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저놈들이 어디로 가는 거지? 누구를 쫓아가야 할까?”

민혁은 잠깐 고민을 한 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너로 결정했다. 얼굴 반지르르한 놈.”

민혁이 쫓아가는 자동차는 첸나이 시내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직 낮 시간대라서 그런지, 도로에는 온갖 종류의 탈것들이 나와 교통 흐름을 방해했다.

하다못해 소가 끄는 우마차까지 있었다.

덕분에 미행하기는 쉬웠다.

차는 첸나이 시내의 주택가로 들어가서 조금 큰 주택 앞에 멈춰 섰다.

놈은 자동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들어간 후에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이 놈의 집인 것 같았다.

민혁은 차에서 내려 저택을 유심히 관찰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2층 주택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CCTV나 감시 장치가 있는지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봤지만, 다행히 그런 장비는 없는 것 같았다.

문득 돌멩이를 집어 들어 담장 안으로 힘차게 집어 던져 보았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개를 키우지는 않는 것 같았다.

침입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민혁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밤에 보자. 기다려라.”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민혁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분명 처음 온 길인데 전혀 막힘없이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이것도 그 과일의 효능인가 보군. 정말 대단한데?”



***



한편,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원섭이 초조한 마음으로 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안 오지? 혹시 그놈들한테 당한 건 아니겠지?”

“애비야? 오늘 뭔 일 있냐?”

원섭의 어머니가 좀체 진정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 걱정된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아, 어머니.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 민혁이 총각은 어디 갔고?”

“시내에 잠깐 일 보러 나갔어요. 조금 있으면 돌아올 거예요.”

원섭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게스트 하우스의 정문으로 자동차 한 대가 들어왔다.

민혁에게 빌려준 자신의 자동차였다.

“저것 보세요. 지금 오네요.”

원섭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서 민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이왕 시내에 나간 김에 여기저기 구경하고 다녔어요.”

“성과는 얻었어?”

“조금은요. 선배, 저 배고파요. 얼른 밥 좀 주세요.”

“아니, 지금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했는데?”

“하하, 그러게요.”



민혁은 서둘러 점심을 먹고는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원섭과 향후 일정에 대해 대책을 논의했다.

“선배님, 지하실은 다 비워놓으셨어요?”

“그래. 혹시 모르니까, 니가 한 번 더 살펴봐라.”

원섭이 열쇠를 건네주자 민혁은 문득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선배님, 그런데 그놈들이 아침부터 움직이는 이유가 뭐죠?”

“응? 그야 낮에는 덥잖아.”

“네? 그게 전부예요? 그럼 밤에는 뭐 하는데요?”

“밤에도 활동 잘 안 해.”

“아니, 놈들이 무슨 아침형 인간이라도 되는 거예요? 정말 어이없네요.”

“여긴 서울이 아니거든. 첸나이는 밤 문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밤 열 시만 돼도 완전 적막강산이야.”

“햐, 진짜 신선한 문화 충격이네요. 그런데 선배님, 신 사장한테는 전화 왔나요?”

“응. 아까 왔어.”

“뭐라던데요?”

“첸나이 세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컨테이너는 내일 출고해 준다고 했대.”

“왜요? 원래는 오늘 아니었어요?”

“뭔가 서류가 하나 미비한 게 있었나 봐. 그래서 부랴부랴 보충해서 제출했나 보더라고.”

“내일은 확실히 출고되겠죠?”

“세관장이 직접 챙기고 있는데, 당연히 출고되겠지.”

“아! 그리고 선배님.”

“왜?”

“인도 회사의 법인명은 뭐로 할 거예요?”

원섭은 대답 대신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생각한 법인명이야.”

민혁은 메모지에 적힌 법인명들을 살펴봤는데, 하나같이 ‘엔터프라이즈’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선배는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을 무지 좋아하네요. 이거, 완전 집착 쩌는데요?”

“그런 거 아냐. 여기에서는 전부 다 그렇게 쓰더라고.”

“음, KI 엔터프라이즈라… 무슨 뜻이에요?”

“간단해. Korea와 India의 약자야.”

“InKo 엔터프라이즈도 마찬가지겠네요?”

“맞아. 이야, 우리 민혁이 똑똑한데?”

“그 정도는 초딩들도 알아요. 좀 더 산뜻한 거 없어요?”

“그게 내 머리의 한계야.”

그 순간, 메모지 맨 밑에 적혀 있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송이 엔테프라이즈? 선배, 이건 좀 괜찮은데요? 게스트 하우스 이름도 ‘꽃송이’잖아요. 적당히 친숙해서 한 번 들으면 잊을 것 같지 않고, 흔하지도 않을 것도 같고요.”

“네 회사니까, 네 마음대로 해라.”

“네?! 그게 어떻게 내 회사예요, 선배 회사지.”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정말 송이 엔터프라이즈로 한다?”

“그러세요. 한국 법인명도 송이무역으로 할 테니까요.”

거의 장난처럼 작명한 ‘송이무역’과 ‘송이 엔터프라이즈’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선배님, 그리고 오늘 밤에 차 좀 쓸게요.”

“왜? 오늘 밤부터 움직이게?”

“네. 오늘 아침에 온 놈들 중에서 곱상하게 생긴 놈 혹시 기억나세요?”

“그놈하고 뭔가가 있는 거야?”

“내가 폭행당하던 날, 그놈이 양아치들한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을 봤거든요.”

“그놈이 대장이야? 그건 아닌 것 같던데?”

“어떤 근거로요?”

원섭은 아침에 있던 일을 민혁에게 얘기해 주었다.

“…다른 양아치 세 놈이 놈더러 도련님이라 했다고요?”

“내가 똑똑히 들었다니까. 그리고 그렇게 곱상하게 생긴 놈이 양아치 우두머리라는 게 조금 그렇지 않냐?”

“일단 알았어요. 그래도 그놈은 그냥 안 놔둘 거예요.”

그 확고한 표정을 읽은 원섭은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민혁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걱정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왠지 민혁이라면 이 모든 일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알았다. 하여간 몸조심하고.”

“선배님, 시장은 어디 있어요?”

“왜? 뭐 필요한 물건 있어?”

“그놈 집을 타 넘을 때 쓰려고요.”

“차라리 나한테 말해봐. 내가 구하는 것이 빠를지도 모르잖아.”

민혁은 원섭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알려주었다.

“굳이 쇠파이프여야만 되냐? 그냥 야구방망이로 대체하면 안 돼?”

“뭐, 그다지 상관없어요.”

“알았어. 내가 전부 구해다 줄 테니까, 너는 방에 올라가서 휴식이나 취하고 있어.”

“고마워요, 선배님.”

“걱정은 된다만, 이참에 은혜를 갚는 데 일조라도 해야지.”



민혁은 야심한 시간에 차를 몰고 첸나이 시내로 향했다.

낮에는 그 많던 자동차와 오토릭샤 등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도로는 텅텅 비어 있었다.

민혁은 낮에 봐둔 곱상한 놈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민혁은 차에서 내려 가볍게 준비운동을 했다.

그런 후, 복면을 쓰고 배낭을 메고는 침입 준비를 마쳤다.

몇 번 발을 굴러 자세를 가다듬은 민혁은 그대로 내달렸다.

담벼락 몇 미터 앞에서 힘차게 뛰어오르자 어렵지 않게 상단에 손을 짚을 수 있었다.

탁!

그 상태 그대로 몸을 띄우더니, 훌쩍 안으로 넘어 들어갔다.

마치 고양이처럼 정원 잔디밭에 가볍게 착지한 민혁은 빠르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본채에 다가간 민혁은 조심스레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 돌려보았다.

예상한 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혹시나 싶어 창문들을 살펴보았으나, 역시 모두 잠겨 있었다.

민혁은 망설이지 않고 배낭에서 갈고리가 달린 로프를 꺼냈다.

이미 군 시절 많은 경험을 통해 로프를 다루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몇 바퀴를 돌리더니, 원심력을 이용해 그대로 2층 난간을 향해 던졌다.

덜컥!

작은 소음과 함께 갈고리가 난간에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나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다행히 다른 인기척은 없었다.

민혁은 숨을 죽인 채 로프를 잡아당겨 보았다.

팽팽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로프를 타고 올라가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이놈, 기다려라. 곧 지옥을 보여주마!’

민혁에게 오늘 밤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