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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어.”

도준은 마치 저승사자 같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수려한 풍경을 감싸며 흐르는 내린천 주변 솔밭에는 지금 민혁과 도준 패거리만이 자리해 있었다.

평소 민혁이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던 장소이기도 한 이곳이 지금은 마치 지옥의 한복판처럼 느껴졌다.

민혁은 한껏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발 자신이 끌려온 것이 오해이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때, 도준이 무게를 잔뜩 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선영이라는 계집애와 어떤 사이냐? 둘이 사귀냐?”

“응? 선영이?”

왜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던 민혁은 곧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순간, 도준에게서 주먹이 날아왔다.

퍽!

무방비 상태로 있던 민혁은 그대로 뺨을 얻어맞고 옆으로 쓰러졌다.

민혁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닥에 엎어진 몸 위로 도준의 발길질이 쏟아졌다.

허리와 등을 밟히고,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반항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잔인하게 구타를 당하는 동안, 그저 머리를 감싸고 몸을 말아 보호하는 게 민혁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끊임없이 용서를 구걸했다.

“악! 크윽… 제, 제발 용서해 줘, 도준아. 내가… 무조건 잘못했어.”

“하, 이 새끼 봐라? 그만한 덩치를 가지고 쪽도 못 쓰네?”

도준은 비굴한 민혁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맘이 좀 풀리는 듯했다.

마침내 폭행을 멈춘 도준이 익숙한 듯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치잇.

그러자 옆에 있던 현태가 쪼르르 달려와 라이터로 불을 붙여줬다.

맛있다는 듯이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인 도준이 마치 과시하듯이 연기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이야, 역시 주먹을 쓰고 난 뒤에 피우는 담배 맛이 정말 좋단 말이야.”

“흐흐, 나는 떡치고 난 뒤에 피우는 담배 맛이 더 좋던데.”

현태가 옆에서 비굴한 태도로 깐족댔다.

도준은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이겼다.

그러고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가 말이야, 재미 더럽게 없는 이 시골구석에서 유일한 낙을 발견했는데…….”

“…….”

“그 계집애 입에서 네 이름 석 자가 나오더란 말이지.”

“…….”

“그 계집애와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 얘기해 봐.”

민혁은 겨우 몸을 추슬러 무릎을 꿇고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난 그 애가 옆 반에 있다는 것밖에 몰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그래? 그럼 그 계집애 혼자서 너를 좋아했단 말이야?”

“…….”

민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대자, 도준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차현태, 이 개새끼야!”

“…응?”

“너, 나한테 구라 쳤지?”

도준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받은 현태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 아니야. 둘이 만나는 거를… 내가 직접 봤단 말이야.”

“진짜로 봤어?”

“그렇다니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가 확실해.”

“그런데 저 새끼 입에서 나오는 말은 뭔데?”

“당연히 거짓말이지. 선영이도 이 자식 좋다고 그러는 거 너도 들었잖아.”

민혁은 선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오가다가 몇 마디 가벼운 말을 한 것이 전부인데, 선영이는 그것이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영의 생각일 뿐이다.

지금 민혁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말을 도준에게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제발 믿어줘. 난 정말 그 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단 말이야!”

“야, 이놈 정말 웃기는 놈일세?”

도준이 비굴하게 말을 늘어놓는 민혁을 조롱했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민혁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도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선영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지금 알았단 말이야!”

도준은 민혁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눈독 들인 계집애가 이놈을 마음에 뒀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야, 이 새끼야! 그 계집애는 내가 찍었으니까, 앞으로 근처에도 얼씬하지 말라고.”

“알, 알았어. 그러니 제발 용서해 줘.”

민혁은 말까지 더듬으며 용서를 구걸했다.

이제야 마침내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겨우 마음이 놓인 듯했다.

그리고 그때, 도준의 눈에 민혁의 잘생긴 외모가 들어왔다.

그러자 갑자기 기분이 다운되었다.

“개새끼, 졸라 기분 나쁘게 생겼네.”

“…….”

“기분 나빠서 안 되겠다. 너 좀 처 맞고 가라.”

도준이 한쪽 옆에 서 있던 똘마니 무리에게 턱짓을 하자 무차별 난타가 다시 시작되었다.

퍽, 퍽!

“윽, 억… 커억!”

온몸을 두드리는 주먹과 발길질에 민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두들겨 패는 아이들에 대한 분노는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간절히 원했다.

민혁은 그렇게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날 밤, 겨우 집으로 돌아오자 식구들은 난리가 났다.

하지만 민혁은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끼리 장난치며 놀다가 다쳤을 뿐이라고 안심을 시켰다.

비록 머리가 굵지 않은 고등학생의 소견이긴 하지만, 일이 커져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그놈들에게 해명도 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학교에 가자 종수가 다가와서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새끼들이 너를 왜 불렀는데? 뭣 때문에 맞았는데?”

“아, 아니야, 아무것도. 종수야, 너도 그냥 모르는 척해. 괜히 그러다 너도 다칠라.”

온몸이 아파서 말할 힘도 없었다.

하지만 괜히 종수까지 휘말릴까 봐 애써 주의를 주었다.

잠시 후, 도준이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교실로 들어왔다.

민혁을 쓰윽 쳐다본 녀석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아이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얘기했다.

“이것들아, 봤지? 누구든 내 비위를 건드는 놈이 어떻게 되는지.”

“응!”

“앞으로 저 새끼에게 말을 건네는 놈은 나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할 테니까, 잘 알아두라고.”



그러잖아도 조용하던 교실이 이날 이후 더욱 조용해졌다.

담임 선생님도 도준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아마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조용히 한 해를 넘기는 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괜히 일을 키워봐야 해결도 어렵고, 자칫하다간 자신도 도준 일행에게 린치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었으리라.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민혁은 그날부터 반 아이들에게 교묘한 괴롭힘과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민혁은 괴롭기 그지없었다.

소극적이긴 해도 그럭저럭 아이들과 친분을 쌓아왔다.

그런데 한순간에 아이들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을 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알아서 납작 기는 순박한 시골 아이들은 더 이상 도준이 놈의 흥미를 끌지 못한 듯했다.

아이들은 민혁과 얼굴만 마주쳐도 도준이의 살벌한 눈초리를 받았다.

결국 도준은 시골 생활의 무료함을 민혁을 괴롭히는 것으로 풀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민혁을 솔밭으로 데리고 가서 흠씬 두들겨 팼다.

그런 후, 아파서 괴로워하는 민혁에게 히죽 웃어주면서 살살 약을 올렸다.

그럼에도 민혁은 싫은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 도준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물에 뛰어들라고 하면 뛰어들었다.

개처럼 짖으라 해도 그대로 따랐다.



이 무렵, 민혁만큼 괴로운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여느 때처럼 민혁이 솔밭으로 끌려갔을 때, 그곳에는 잔뜩 겁에 질린 누군가가 있었다.

다름 아닌, 선영이었다.

도준은 보란 듯이 선영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히죽히죽 웃어 댔다.

민혁은 선영이 보는 앞에서 복날 개가 두들겨 맞듯 흠씬 얻어터졌다.

호감 있던 상대가 비참하게 바닥을 기고 개처럼 짖는 모습을 보고 만정이 다 떨어지라는 의도 같았다.

민혁은 사정없이 맞으면서도 얼핏 도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놈의 표정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저 지옥 밑바닥에 산다는 악귀가 아마 저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선영도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둘은 나락에 떨어진 처지로서 서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있었으나, 서슬 퍼런 도준이 놈 앞에서는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몇 년 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선영은 그때 도준이 놈한테 성폭행을 당해 낙태까지 했다고 한다.

그 소문은 선영을 돕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자신에 대한 나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민혁의 의지에 더욱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와, 민혁이 도준에게 찍혔다는 소식은 세 반밖에 없는 작은 학교에 금방 퍼져 버렸다.

그 후로 모든 아이들이 민혁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나마 도준이 몰래 종수가 걱정해 주며 이전처럼 허물없는 친구로 대해주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이후, 도준이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군단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군단장이 교장실에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으로 시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든 모든 일들이 일단락됐다.

당연히 도준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도준이 전학을 갔음에도 민혁은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한 학기 동안 맨 정신으로 버틴 게 용할 지경이었다.

도준의 폭력과 보복이 두려워 비굴하게 처신한 스스로를 한동안 용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한순간에 자신을 외면했다는 것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나마 모든 것을 잊고자 공부에만 매달린 것이 유일하게 얻은 소득이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강원도에서 나름 유명한 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그 억울하고 한심했던 기억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민혁은 남들보다 몇 배 더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는 무시당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나약한 정신을 단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군대도 특전사를 선택했다.

이미 신체적으로는 남부러울 게 없는 민혁이었기에 군 생활은 딱히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신을 연마하며 점점 더 성장해 나가는 자신을 보며 많은 만족감을 느꼈다.

제대를 한 후에도 몸과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생활이 힘들고 마음이 나약해질 때면 의식적으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잡았다.

다행히 그런 노력의 결과는 대체로 성공한 듯했다.

시골 놈이 도시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법을 익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LK라는 안정된 직장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어느새 또다시 과거 비굴하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민혁은 깨달았다.

자신이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면, 아무리 성 과장이나 고 부장이 음모를 꾸몄다 해도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초심을 잃어버린 자신을 자책하며 민혁은 새삼 각오를 다졌다.

이제 더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꺾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당하면 몇 배로 갚아주리라.

순하고 사람 좋던 민혁은 이제 없다.

신비한 과일을 먹은 후로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르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민혁이었다.



“으라차차차!”

민혁은 어제보다 더욱 과격하게 몸을 풀었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이 가뿐했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에서 쉴 새 없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좀처럼 온몸의 열기가 식지 않아 사무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들이켰다.

벌컥벌컥.

“으, 시원하다!”

그 요란한 행동에 장부를 살펴보던 원섭이 말을 걸어왔다.

“어?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내려온 거야? 잠이 안 와?”

“아, 네. 한국에 전화 통화 좀 하려고요.”

민혁은 벽에 걸려 있는 국가별 시각을 확인해 봤다.

마침 서울은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민혁은 사무실에 설치된 전화기를 잡고 하나하나 버튼을 눌러갔다.

몇 번의 신호가 가고 난 뒤에 전화가 연결되었다.

[반갑습니다. 무역 1팀의 조민수입니다.]

“조 부사장인가? 인도의 강 사장일세.”

[아! 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사업은 잘되시죠?]

이 녀석이 엉뚱한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뭔가 곤란한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한 민혁은 바로 목소리 톤을 바꿨다.

“조민수 씨, 이번에 술 좀 수출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강 사장님, 진짜요? 잘됐네요, 그렇게 고전을 하시더니만. 소주인가요, 맥주인가요?]

“소주로 할 생각이야.”

[축하드립니다, 강 사장님. 당연히 저희 회사랑 거래하시는 거죠?]

“생각 좀 해보고.”

[제가 잘해 드릴게요.]

“알았어.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고.”

[네. 급한 일 먼저 정리하고 나서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민혁이 통화를 마치고 나자 원섭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어째 통화 내용이 요상하네?”

“아~ 회사의 후배 녀석인데, 뭔가 통화하기가 곤란한 상황 같더라고요.”

“어쩐지.”

“조금 있으면 전화가 올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형, 나야.]

“그래. 옆에 누가 있었냐?”

[응. 성 과장 새끼가 착 달라붙어 있었어.]

“왜? 중국 부품 건 때문에?”

[응. 나한테 얼마나 껄떡대는지, 머리 아파 죽겠어.]

“최대한 버티라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러고 있는 중이야. 그나저나 별로 안 좋은 소식이 들리던데?]

“성 과장, 그 새끼가 그러든?”

[고 부장도 그러더라고.]

“두 새끼 다 같은 족속이니까, 신경 쓰지 마라.”

[알았어. 그런데 아까 소주 얘기는 뭔데?]

“농담이었어. 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할게.”

[기왕 간 김에 실컷 놀다 오지 않고?]

“놀더라도 한국에서 놀고 싶다.”

[왜? 재미없어? 나는 재미있을 것 같던데.]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나중에 두고 보겠어. 그때, 네가 재미없다는 소리하면 알지?”

[아이고, 무서워라. 그런데 역시 수상한데… 형, 뭔가 있는 거지?]

“시끄럽고,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이만 끊자.”

[형, 내가 전화한 거잖아. 얘기 좀…….]

딸깍.

민혁은 민수가 뭐라 더 묻기도 전에 가차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국 상황은 이미 민수를 통해서 파악해 놓았다.

민수는 그나마 LK에서 민혁이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이기에 걱정은 없었다.

“통화는 다 끝났냐?”

“네.”

“그럼 이제 뭐 할 건데?”

원섭의 물음에 민혁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잔뜩 무게를 잡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Revenge is M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