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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신 사장이 지금까지 자신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무척이나 고무적이라 여겼다.

지난주 처음 만났을 때는 거짓말로 일관하던 사람이 지금은 모두 사실에 입각한 말만 하고 있었다.

역시 신 사장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지금은 확실하게 민혁에게 굽혀야 할 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듯했다.

이재에 밝고 사리사욕에 강한 신 사장의 사업 스타일은 역시 민혁에게 신뢰를 주지는 못했다.

앞으로 혹시나 사업적으로 그와 엮일 일이 있어도 가능한 한 피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다시 한 번 내리는 민혁이었다.

신 사장은 저녁까지 먹고 천천히 시간을 보내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민혁과 원섭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런 신 사장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신 사장이 지금까지 안 가고 버틴 이유가 뭘까요?”

“너하고 첸나이 세관장과의 관계가 궁금했겠지.”

“그게 뭐가 궁금한데요?”

“설마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나를 어떻게 이용해 보려고 한다는 거예요?”

“거의 100% 확실할걸? 무역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세관원들인 것은 알고 있지?”

“저도 무역 회사 밥을 먹은 것이 2년은 훨씬 넘었어요.”

“신 사장은 네가 지금 황금 알을 낳는 거위로 보일 거야. 이곳에서 세관장하고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특히 한국 사람들 중에서 말이야.”

“그럼 첸나이에서는 제가 처음이라는 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걸?”

“선배님은 두 번째고요?”

“그렇지. 이제 나도 한 끗발 하는 사람이야.”

원섭이 뻐기듯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크, 동네 양아치 놈들도 제대로 상대 못하시면서 끗발 찾아서 뭐 합니까?”

“에고고, 네가 내 급소를 찌르는구나.”

“건배나 하시죠.”

민혁은 원섭과 잔을 부딪친 후, 단번에 소주를 들이켰다.

“으, 쓰다.”

소주 특유의 쓴맛이 느껴져 원섭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는 역시 소주와는 별로 친하지 않은 듯했다.

“음, 이게 뭐가 맛있다고 마셔들 대는지…….”

“선배님, 저 진짜 한국에 들어가면 소주 열 컨테이너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농담 아니었어?”

“시드 머니 좀 만들어놓아야 하잖아요.”

“차라리 아신한테 빌려 달라고 했으면 편하게 갈 길을 굳이 어렵게 가는 이유는 뭐야?”

민혁은 고개를 돌려 깜깜해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지우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님, 오늘이 제가 인도에 온 지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에요.”

“그게 뭐 어때서?”

“제가 여기올 때의 마음은 저 밤하늘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암흑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 정도만 되어도 저는 만족해요.”

“알았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내가 널 어떻게 말리겠냐.”

“선배님이 문자를 썼으니 저도 문자 하나 쓸게요.”

“어디 써봐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신네 집안과는 앞으로도 어떻게든 엮일 것 같으니까, 조급한 마음을 버리자고요.”

“그래, 알았다. 슬슬 막잔하고 올라가서 자라.”



민혁은 술자리를 마치고 숙소인 301호로 올라왔다.

침대에 누워 그동안 벌어진 일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게 흘러갔다.

단 하나만을 빼고.

“이놈의 새끼들, 난 빚지고는 절대 못 산다. 내일부터 철저히 복수해 주마.”

자신이 인도로 오게 된 컨테이너 건은 잘 해결되었지만, 원섭 선배를 협박하던 양아치가 자신을 습격한 놈들과 한패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놈들이 자신의 눈에 띈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이 내려주신 기회가 분명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말이다.

민혁은 눈을 감고 오랜만에 과거의 한순간을 떠올렸다.

민혁이 복수에 집착하게 만든 그 옛날의 기억을.



***



민혁이 태어난 강원도 현리는 휴전선과 가까이 위치한 탓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많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기에 일반 주민보다 군인들의 숫자가 압도적 많고, 3군단 사령부까지 위치해 있다 보니 군인 가정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민혁이 나온 기린 중학교와 기린 고등학교에도 군 자녀들이 많이 다녔다.

아마도 전체 학생 수의 사분지 일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군인 자녀들과 시골 출신 아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섞일 수 없었다.

도시 물을 먹은 군 자녀들은 이곳 아이들을 은근히, 아니,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라온 환경이나 생활 습관, 학습 방법 등이 많이 달라 은연중에 우월감을 드러내곤 한 것이다.

민혁은 중학교 때 이미 키가 180㎝에 이르렀으나, 급격하게 자란 탓에 살집 없이 빼빼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소극적인 성격과 마른 체형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똑똑한 머리 덕분에 성적 상위권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교육열 높은 군 자녀 아이들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가난한 가정 형편은 민혁의 소극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더욱 일조하였다.

한마디로 말해 민혁은 평범한 시골 아이일 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공부를 잘한 상위권 친구들은 춘천 등 큰 도시로 유학을 떠나갔다.

민혁 또한 그런 곳에서 교육을 받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옆에 붙어 있는 기린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민혁은 멀대같이 크기만 하던 몸에 근육이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신장도 조금 더 자라고 덩치마저 커지자 잘생긴 외모가 빛을 발했다.

어떻게든 대학만은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집중하자 좋은 성적으로 보답 받았다.

당연히 주변의 여자 아이들에게도 서서히 주목을 받았으나, 본인의 무관심과 소극적인 성격 탓에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다.

민혁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3월 초순경, 군단장의 아들이 전학을 온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졌다.

군 자녀 그룹 중 한 명인 현태에게서 나온 정보였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군단장의 아들이 크게 사고를 치고 도망치듯 전학을 온다는 것이었다.

대개 고등학생 정도 되면 장교의 자식들은 더 이상 이곳 현리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앞날을 생각해 봤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학업 성취도에 대한 이유도 있지만, 이곳에서 학교를 다녀봤자 아무런 인맥도 쌓을 수 없으니 도시로 나가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도시로 나가고, 아버지만이 관사에 머무르는 게 기본적인 패턴이었다.

기린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개 지역 주민의 자식이거나 재력이 부족한 부사관급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군단장의 아들이 전학 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 뒤로 어기적어기적 따라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한눈에 딱 봐도 양아치였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하며, 요란한 귀걸이와 액세서리까지.

아무리 교풍이 널널한 시골 학교라지만, 그렇다 쳐도 무척이나 규범 밖의 비주얼이었다.

“자, 오늘부터 함께 공부할 친구를 소개하겠다.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해라. 너도 자기소개하고.”

건방지게 짝다리를 짚고 있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박도준이다.”

그게 끝이었다.

순간,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 모두 멍하니 도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담임 선생님이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하하… 짧고 강렬한 소개구나. 자, 다들 새로운 친구에게 박수도 쳐주고. 도준이는 지금 빈자리가 저 뒤밖에 없으니까 일단 거기에 앉도록 해라.”

하필이면 민혁의 바로 옆자리였다.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도준과 민혁의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순간, 도준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올라 갔다.

민혁은 직감적으로 도준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도준은 이 반의 짱이 민혁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민혁이가 반에서 덩치가 제일 큰 탓이었다.

이미 주변을 둘러보고 아이들을 파악한 도준은 이 반을 접수하기 위해서는 민혁을 꺾을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민혁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가능한 한 도준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도준은 정말 질이 안 좋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도준은 중간 정도의 키에 체격도 그리 대단할 게 없었다.

그러나 저 눈에 확 띄는 금발과 껄렁거리는 태도, 사람을 쏘아보는 눈초리와 비릿한 웃음은 위험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다행히도 이날 하루는 걱정과는 다르게 별일 없이 지나갔다.

도준이 한참을 노려봐도 민혁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금세 시들해졌는지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잤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규 수업이 끝나자 도준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어슬렁거리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마도 야간 자율학습은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긴장하던 아이들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떠들어 댔다.

“야, 도준이가 엄청 괴롭히던 애가 자살을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여기로 전학을 온 거래.”

“진짜야?”

“응. 완전 퇴학감이었는데, 군단장 백으로 여기로 온 거래.”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현태 아버지가 얘기하는 걸 현태가 들었대. 걔네 아버지가 군단장하고 같이 근무하나 봐.”

몇몇 아이들 사이에서 시작된 이 무서운 소문은 삽시간에 전교에 퍼져 버렸다.

전교생 모두가 벌써부터 도준에게 겁을 먹고 공포에 빠져들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하게 지내던 어느 날, 또다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야, 옆 반 현태 있잖아. 걔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아서 병원에 입원했대.”

“누가 그랬는데?”

“당연히 도준이지. 소문 퍼뜨린 것이 현태라고 밝혀져서 엄청 두들겨 팼다더라.”

“와, 그 새끼, 무지 나쁜 놈이네.”

“더 웃기는 건 뭔지 알아?”

“뭔데?”

“현태 아버지가 병원에서 도준이한테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고 하더라고.”

“왜?”

“군단장의 부하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다시 며칠 후, 어느덧 도준은 군 자녀 그룹을 몰고 다니며 학교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계급이 서열을 매기는 기준이 된다고 했다.

당연히 도준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현태는 도준의 가장 충성스런 부하가 되어 있었다.

이후, 민혁의 반은 살벌한 도준 덕분에 쥐 죽은 듯 조용한 교실이 되었다.

도준이 있을 때는 제대로 숨도 못 쉬다가, 도준이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겨우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어느 날, 아침부터 도준이 민혁에게 다가오더니 으르렁대듯 말을 건넸다.

“니가 민혁이라는 새끼냐? 수업 끝나고 나 좀 보자.”

민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이 바짝 얼어붙어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여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 쟤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나도 진짜 모르겠어.”

같은 동네에 사는 종수가 조용히 물어볼 뿐, 아무도 주위에 다가오지 못했다.

괜히 도준에게 찍힐까 봐 다들 두려운 것이었다.

조용하던 교실에 숨 막히는 긴장감마저 더해져 마치 조용한 산사를 보는 듯했다.

수업을 하던 선생님들도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도준의 눈치를 살피며 뭐라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윽고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도준은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민혁에게 날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 민혁은 어슬렁거리며 걷는 도준을 따라 학교를 나왔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도준의 똘마니들이 하나둘씩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