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7/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아신을 비롯한 사람들은 난데없는 양심고백에 놀라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이 인도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머머, 직장 상사들한테 완전히 뒤통수 맞으신 거네요?”

“그게 아니라… 제가 멍청했던 거죠. 제대로 확인도 해보지 않고 그저 닭고기로만 생각을 했으니까요.”

아신은 애달픈 눈빛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민혁의 처지가 너무도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때, 예스민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그 소고기들은 전량 폐기 처분하는 건가요?”

“네. 하루라도 빨리 폐기를 해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면 민혁 씨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회사에 손실을 입혔기 때문에 잘리거나, 아니면 어떠한 형태로든 징계는 받을 것이 확실합니다.”

“음…….”

예스민이 잠시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민혁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회사가 손해 본 부분만 채워 넣으면 징계는 피할 수 있겠네요?”

“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아요. 아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하찮은 일로 징계를 당하게 할 수는 없지요. 내가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볼게요.”

“정말이요?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민혁이 반색하며 되물었다.

사실 아신의 배경에 대해 알고 난 후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정말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한 줄기 구원의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아신도 민혁에게 보은할 수 있는 길이 생기자, 덩달아 신이 난 듯했다.

“정말이지? 엄마가 도와줄 수 있는 거지?”

“이 녀석아, 이 엄마를 못 믿니? 만약 내 힘으로 안 되면, 네 아빠가 나서줄 거다. 그렇죠, 여보?”

“음, 당연하지. 우리 귀여운 딸의 생명을 구해주신 분인데,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두 분의 배려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민혁은 이제야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듯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인도에 올 때만 해도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기연을 얻은 것뿐만 아니라 민혁을 옭아맨 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예스민 장관도 이제야 민혁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표정이 밝았다.

“저는 아신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이 나라의 내무부 장관입니다. 그 정도 문제는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민혁 씨가 나쁜 마음으로 일을 저지른 게 아니니, 당연히 구제해 드리는 게 옳은 일이지요.”

민혁은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록 인도에서 금기시되는 소고기와 관련된 문제이긴 해도 예스민 장관 정도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장관님, 그럼 현재 압류되어 있는 제품들은 역시 전량 폐기를 해야겠지요?”

“아직 처리 방법에 대해 결정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래도 그냥 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네요. 혹시… 민혁 씨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민혁은 이 순간 예스민이 자신에게 공을 넘겼다고 생각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대로 처리를 해주겠다는 뜻이었다.

민혁은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역시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도가 힌두교 신자들의 나라라는 것이 주저되었다.

한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민혁이 되든 안 되든 한 번 부딪쳐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인도 국민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들이기 때문에 소고기를 유통하기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시장에 유통이 되다 보면, 실수로 소고기를 섭취할 우려가 있지요. 물론 인도에는 힌두교 신자가 아닌 이들도 약 3억에 달합니다. 그들 대부분은 무슬림이거나 기타 종교를 가지고 있어요.”

“음, 저는 인도 사람들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인도에 살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소고기가 금지 식품이 아닐 겁니다.”

“이해했어요. 계속 말씀해 보세요.”

“만약에 장관님께서 힘을 써주실 수 있다면, 이 소고기가 통관 처리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첸나이에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만 판매토록 하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뭘. 그렇게 해드릴게요.”

예스민 장관은 민혁의 요청을 고민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오케이해 주었다.

“장관님, 정말 고맙습니다.”

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와 함께 활짝 웃으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골머리를 앓아온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된 셈이었다.

“자세한 처리 방법은 나도 잘 모르니까, 나머지는 내일 다시 만나서 얘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알겠습니다.”

“호호, 민혁 씨의 웃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이 떨려서 주체를 할 수가 없네요.”

“엄마!”

“험험, 여보.”

“누나!”

“어머, 죄송해요. 남편이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만 본심이 튀어 나왔지 뭐예요.”

예스민의 재치 넘치는 대답에 다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원섭은 민혁의 문제가 해결된 듯하자 슬슬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 꽃송이 게스트 하우스의 야심작, 꽃돼지 삼겹살입니다.”

“삼겹살이요?”

락시미 회장이 순간 눈을 빛내며 원섭에게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혹시… 삼겹살을 아십니까?”

“하하, 내가 한국 출장 갈 때마다 즐겨 먹는 것이 바로 삼겹살하고 소주입니다. 삼겹살 한 점을 상추에 올려놓고 온갖 야채와 쌈장을 더한 후에 소주 한 잔과 함께 입에 넣으면… 캬~ 벌써부터 군침이 도네요.”

“하하, 역시 삼겹살을 먹을 줄 아시네요.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음, 말만 들어도 침이 나오네요. 저희들도 어서 그 삼겹살이라는 것을 먹어보고 싶습니다.”

“네. 넉넉히 구웠으니, 혹시 모자라시면 말씀 주십시오. 아직 고기는 많이 있습니다.”

원섭이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삼겹살을 먹기 좋게 잘라 내놓자, 모두들 침을 꿀꺽 삼켰다.

거기에 온갖 채소와 반찬을 세팅해 주자,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다들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빛으로 음식을 바라보고 있자, 민혁은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원섭 선배, 이분들 삼겹살에 푹 빠진 듯하니 이참에 바가지 왕창 씌우세요.”

철썩!

원섭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민혁의 등판을 치고 지나갔다.

두 사람의 익살스런 모습에 아신이 궁금하다는 듯이 연유를 물었다.

“아~ 그거요? 아신 씨네 집이 부자인 것 같으니까, 바가지 옴팍 씌우라고 했어요.”

“호호호, 정말요? 걱정 마세요. 민혁 씨를 위해서라도 제가 다 낼게요.”

“이 녀석아, 그게 인도 최고 부자인 아빠를 앞에 두고 할 소리냐?”

“아신아, 이 외삼촌도 돈이라면 남한테 꿀리지 않는단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서 사제한이 은근슬쩍 대화의 장에 동참했다.

그걸 가만 내버려 둘 예스민이 아니었다.

“사제한, 너는 입 다물고 있어. 여긴 네가 낄 자리가 아니야.”

“쳇, 누나는 나만 미워하는 거 같아.”

“호호호, 엄마, 이제 그만 외삼촌을 용서해 주세요.”

“어휴, 알았다. 내가 아신을 봐서 이번만 용서를 해주는 거야!”

“알았어요, 누나. 다음부터 잘할게요.”

“저희들도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스레얀 첸나이 경찰총장과 수리야 중앙 수사국장도 덩달아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역시 예스민 장관은 만만치 않았다.

“네놈들은 안 돼!”

마치 맹수가 으르렁대듯 단칼에 쏘아붙이자, 두 사람은 마치 연약한 짐승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아신이 이번에도 다시 나섰다.

“엄마, 저분들도 용서를 해주세요.”

“알았다. 이 녀석아.”

결국 딸의 요청에 마음을 풀고 마는 예스민 장관이었다.

민혁은 일이 모두 잘 풀리자 그제야 편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더구나 전화위복이 되어 회사일도 잘 해결되었으니, 그야말로 만만세였다.

“사장님, 여기 소주 좀 더 주세요.”

모두들 흥겹게 술과 고기를 즐기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중에 스레얀이 소주를 추가 주문했다.

그러자 민혁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스레얀 총장님.”

“네, 민혁 씨.”

“소주가 이곳에서는 상당히 비싸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저도 그래서 가끔씩만 소주를 얻어다 마시고 있어요.”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는데도요?”

“에이, 소주가 마약도 아닌데… 특별히 허가된 곳에서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왜 인도에서는 소주가 비싼지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정말 싸거든요.”

“그야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그렇지요.”

민혁은 잔에 담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알싸한 맛이 역시 최고였다.

특히 삼겹살에는 소주만 한 것이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의할 터였다.

그래서 민혁은 내친김에 슬쩍 찔러보았다.

“이 소주만 제대로 가지고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대박 날 텐데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새삼 소주에 필이 꽂힌 민혁은 이 사업 아이템을 어떻게든 살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민혁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제한은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밀수를 하는 거겠죠.”

“음, 정식으로 수입 계약을 맺으려면, 좀 어려울까요?”

민혁이 계속 소주에 집착하는 듯 보이자 아신이 관심을 보여왔다.

“민혁 씨는 한국에 돌아가시면 회사를 그만둘 거예요?”

그녀는 약간 취기가 오른 듯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 민혁은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아니요. 내 유일한 밥줄인데,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는 없지요.”

“이참에 인도랑 무역하시면 되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드 머니가 없어서 어림도 없을 거예요.”

“흐음, 제가 감사의 마음으로 드릴 수도 있는데?”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헤헤, 알았어요.”

민혁은 생각 같아서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 의지대로 돌아가는 일이 있나, 능력을 인정해 주기를 하나.

월말만 되면 실적에 쫓겨 허덕대야 하고, 상사라는 사람들은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정말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회사였다.

그래도 이만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LK상사에 입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가.

이번 소고기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견딜 만은 했다.

가진 게 없어 당하기만 할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신비한 능력을 보유했다.

그러니 당장은 어렵겠지만, 기회만 된다면 자신의 사업을 차릴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이제부터는 남의 의지가 아닌, 내 의지대로 살아가야겠다고 민혁은 굳은 다짐을 했다.



***



“민혁아,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냐?”

“네? 뭐가요?”

아신 일행을 돌려보낸 후, 민혁과 원섭은 식당에 앉아 간단하게 맥주로 입가심을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왜 저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너한테 꼼짝도 못하는 거냐고.”

“아, 내가 선배한테 얘기 안 했나요?”

“이 녀석아, 안 했으니까 물어보는 거지.”

“사실 내가 아신을 괴한들한테서 구해줬거든요.”

“응? 네 옷이 다 찢어진 날?”

“네, 맞아요.”

“야, 그렇게 큰일이 있었으면서 어떻게 내색 한 번 안 하냐?”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저도 사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어쩐지, 그날 서둘러 변명을 하는 것 같더라니. 그럼 보상금 좀 왕창 뜯어내지 그랬냐?”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사람 목숨을 구했으면 정말 좋은 일을 한 거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대가를 바란다는 게 좀 내키지 않더라고요.”

민혁은 원섭에게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왠지 순수한 의도를 희석시키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 네가 그렇다면 더 이상 물어보지 않으마. 하여간 오늘은 네 덕에 진기한 경험을 했다.”

원섭은 요 며칠 민혁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고향 후배라서 그런가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런 감정과도 조금 달랐다.

민혁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심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원섭 자신과는 앞으로도 중요한 관계를 쌓아 나가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민혁 또한 며칠밖에 겪지 않은 원섭에게서 마치 친형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

단순한 고향 선배를 넘어, 민혁의 인생에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라는 울림이 몸 전체를 감쌌다.

“그나저나 선배님, 음식 값은 확실하게 받았죠?”

“으응~ 근데 너무 많이 주고 갔어.”

“얼마나 받았는데요?”

“10만 루피.”

“밥값으로 2백만 원이나 받았다고요? 이야, 제가 바가지를 씌우라고는 했지만, 역시 선배도 만만찮네요.”

“야, 강제로 주고 가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아니에요. 잘하셨어요.”

“크크, 잘했지? 민혁아, 그리고 이거 받아라.”

그러면서 원섭이 봉투를 하나 내밀었었다.

두툼해 보이는 것이, 돈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아까 치료비랑 전화기 값 받았어?”

“아차,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못 챙겼네요.”

“달러가 없다고 루피로 주고 갔어. 너한테 전달해 주라더라.”

민혁이 잘됐다는 듯 봉투에서 돈을 꺼내 세어보았는데, 11만 루피였다.

“엥? 이 사람들이 만 루피를 더 주고 갔네요?”

“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환전 수수료 포함이라고 하더라.”

민혁은 지폐 다발에서 천 루피를 빼 원섭에게 건네려 했다.

“이게 뭐냐?”

“천 루피 빌렸잖아요.”

“괜찮아. 안 받아도 돼.”

이미 원섭은 이미 민혁에게 그 이상을 받은 거나 진배없었다.

음식 값도 그렇지만, 인도 고위층을 만나 술을 주고받는 진귀한 경험도 했으니까 말이다.

“선배님, 설마하니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러시는 거는 아니죠?”

“당연하지. 내 인생에 외상은 없어.”

“그럼 저도 마차가지예요. ‘공은 공, 사는 사’가 제가 세운 원칙 중 하나예요.”

“알았다. 거참, 할 말이 없게 만드는구나.”

다시 한 번 민혁이 마음에 드는 원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