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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민혁아, 일어나! 문 좀 열어봐!”

민혁은 방문을 시끄럽게 두드려 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음, 누구세요? 원섭 선배예요?”

“그래, 빨리 문 좀 열어봐.”

딸깍.

“선배님, 무슨 일인데요?”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사무실로 같이 내려가자. 엄청난 손님이 와 계셔.”

민혁은 묻지 않아도 그게 누구일지 짐작이 갔다.

사실 병원에서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행태를 참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와 버렸다.

물론 사제한의 행동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아직 민혁 스스로도 지금 상황이 꿈만 같은데, 그들이라고 별다를 것이 있겠는가.

얼떨결에 꾸며낸 비슈누 신의 가호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이 민혁의 인생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기분이 나쁜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믿기 어렵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을 면전에 두고 쌍둥이니 뭐니 온갖 호들갑을 떨더니, 급기야는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게 사람으로서 할 짓인가 말이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민혁은 빤히 알면서도 괜히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대체 누가 왔는데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야.”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누군데요?”

“음, 사실 나도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인도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들이야.”

“그래요? 그럼 한 번 만나보죠, 뭐.”

하지만 말과 달리 민혁은 밍기적밍기적 뜸을 들이며 아주 느긋하게 옷을 걸쳤다.

그 모습에 애가 탄 원섭이 민혁을 채근했다.

“민혁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니까? 얼른 내려가야 돼. 그러니 좀만 서둘러라.”

“선배, 걱정 마세요. 어차피 절 만나러 찾아온 거잖아요. 그럼 저야 급할 게 없죠.”

“응? 그런가?”

“네. 걱정 마시고, 선배도 저랑 같이 천천히 내려가요.”

“그래도 될까? 에이, 모르겠다. 네 말대로 하지, 뭐.”



민혁과 원섭은 정말 느긋하게 1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민혁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아신은 민혁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마자 도도도 달려와 그대로 몸을 내던졌다.

엉겁결에 그녀를 안게 된 민혁은 순간 당황했다.

‘우와! 이 아가씨, 정말 과감하네. 근데… 정말 피부가 부드럽네.’

민혁이 기분 좋은 감상에 젖어들려는 찰나, 아신이 목이 메인 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민혁은 조심스레 아신을 떼어냈다.

아신도 자신의 행동이 민망했던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자 초로의 남자가 다가와 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신의 아비인 락시미라고 해요. 내 딸을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강민혁입니다.”

두 사람이 악수를 주고받자 예스민도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과연 아신의 어머니답게 예스민도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쾌활하고 사랑스러운 아신과 달리 넘치는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예스민은 민혁에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요. 어떻게 사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례를 바라고 따님을 구한 게 아닙니다. 단지 젊은 아가씨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도 어찌 됐든 저희 딸이 민혁 씨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잖아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딱히 사례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어머, 아신을 구해주신 분답게 정말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사례를 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니, 이 점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예스민은 역시 노련한 관료답게 빈틈이 없었다.

딱히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일 줄 알았다.

하지만 민혁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그러시다면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공직에 계신 분이라 했는데, 그런 분께서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 해도 큰 수고를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예스민은 민혁의 태도가 조금 쌀쌀해진 듯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제한 3인방을 보고는 대강의 사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혹시 저들이 저지른 무례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분들로서는 당연한 의심이었겠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말로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그 일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민혁이었다.

예스민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하는 사이, 락시미 회장이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강민혁 씨, 같은 남자로서 민혁 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찌 보면 금전적으로 사례를 하려는 모습이 모욕적으로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용서를 구합니다.”

민혁도 락시미 회장이 강하게 훅 치고 들어오자 순간 당황했다.

사실 이들의 신분과 원섭 선배의 얘기를 듣고 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한 민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값을 끌어 올려야 하는데, 락시미 회장이 대뜸 용서를 구하고 나서니 더는 매몰차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문득 민혁의 눈에 경찰 3인방이 보였다.

셋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민혁의 눈치만 살피는 것이, 아무래도 예스민에게 단단히 혼이 난 모양이었다.

민혁은 저들과의 감정을 풀고 이참에 원섭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게 관계를 쌓아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쉽게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대단하신 그룹의 회장님께서 용서라 하시니, 저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렵네요. 그런데 저 세 분은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별로 저를 좋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던데요.”

민혁이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사제안과 스레얀, 수리야는 마치 칼에 찔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애당초 세 사람은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조용히 있다가 얼른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민혁이 자신들을 언급하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사제한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전에는 저희가 너무 성급하게 일처리를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럴 땐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재빨리 사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사제한이었다.

민혁도 이쯤에서 사과를 받아주며 좋은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지금은 이렇게 굽신굽신대지만, 혹여 앙심을 품고 원섭에게 보복이라도 했다간 대책이 없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다음에는 그런 실수 하지 마세요.”

민혁의 통 큰 용서에 사제한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민혁이 그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락시미 회장에게 말을 꺼냈다.

“참, 보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민혁은 포기했던 100만 원을 다시 찾을 기회임을 직감했다.

“네, 말씀해 보세요.”

“특별히 사례는 필요 없지만, 제가 낸 병원 보증금하고 핸드폰 파손 비용은 보상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물론이지요.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음… 모두 합쳐서 2,000달러는 주셔야 합니다.”

“네? 2,000달러요? 2만 달러가 아니라요?”

“네. 그거면 족합니다.”

락시미 회장은 민혁을 처음 볼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파악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눌수록 그 생각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이쪽이 신세를 지고 무례를 끼쳤다고는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꼿꼿한 태도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 면면이 경찰 총수에 내무부 장관, 게다가 인도를 주름 잡는 회장인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자신들을 상대로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민혁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대단한 지위를 갖고 있더라도 제 할 말을 확실히 했다.

그 모습이 마치 히말라야 산맥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에베레스트산처럼 느껴진 락시미 회장이었다.

“좋습니다. 2,000달러는 바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사실 생활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거든요.”

“그러시면 저희가 보상비를 더…….”

“어허!”

그 순간, 락시미 회장은 벼락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터져 나온 민혁의 말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실 락시미 회장은 인도의 제왕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지위와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당연히 어릴 적부터 배워온 제왕학과 많은 경험이 살이 되어 이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조차도 지금 민혁이 보여준 카리스마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비슈누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게 정말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와 함께 저도 모르게 입에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락시미 회장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앞서 민혁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했던 것도 그저 예의상 한 말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정말 민혁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절실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한편, 민혁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 화를 낼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입에서 노호성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자신에게 귀신이 단단히 씐 것 같았다.

경찰 총수나 장관 같은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점도 그렇고… 입사 이후 자신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얼른 사과부터 해야 했다.

“아,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아닙니다.”

“사실 제 신조가 ‘스스로 땀 흘려 번 것이 아니면, 남의 돈을 탐하지 말자!’입니다. 그러니 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쯤 되자 락시미 회장은 민혁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강인한 외모, 그리고 지금까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보여준 인성까지… 정말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는 젊은이였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민혁과 인연을 맺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민혁은 무언가 난처하다는 듯이 접근할 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락시미 회장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직 저희가 저녁을 못 먹었는데, 이곳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요?”

“그, 그럼요. 당연하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순간, 지금껏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원섭이 얼른 나섰다.

그가 보기에 지금 민혁을 찾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면면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사정으로 민혁과 얽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민혁이 ‘갑’의 위치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당장 이 지역의 조직에 대한 압박도 해소할 수 있을 테고, 더 나아가 권력을 가진 이들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원섭은 양해를 구한 후,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대단한 손님들인 만큼 허투루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

게스트 하우스의 일반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식사를 그대로 낼 수는 없었다.

무언가 만족할 만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관계 구축의 첫걸음이었다.

‘제발 괜찮은 식재료들이 있어야 할 텐데…….’

정 안 되면 삼겹살이나 구워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원섭은 식당으로 발걸음을 급히 서둘렀다.



한편, 민혁은 어찌해야 할지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실 민혁으로서는 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긴 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온갖 폼을 잡으며 보상에 대한 마무리를 지어버렸으니, 이제 와 다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락시미라는 양반이 저녁을 먹고 가겠다고 나섰다.

분명히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자는 의도 같은데, 정작 자신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자리에 함께 남아 있는 것도 조금은 뻘쭘했다.

괜히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혁은 슬쩍 말을 꺼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시고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네? 저희랑 같이 식사를 하셔야죠.”

락시미 회장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이 민혁에게 식사 제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말씀을 드리지 않았네요.”

평소 카리스마 넘치는 락시미 회장이지만, 오늘따라 영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민혁으로서도 기다리던 말이 나왔기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음,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허허허, 당연하지요.”

락시미 회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이상하게 꼬여가는 상황을 정리했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은 원섭이 솜씨 좋게 삼겹살을 굽는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무실에서는 이런저런 오해와 감정싸움이 있던 터라 약간 서먹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음식을 기다리며 가볍게 술을 한 잔 마시면서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고기 내음이 풍기자 사람들의 표정은 절로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런 와중에 아신이 나서서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럼 민혁 씨는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네. 그때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네요. 아무래도 예쁜 아가씨에게 멋져 보이고 싶었거든요.”

“호호, 칭찬 감사해요. 역시 제가 한 미모 하죠?”

민혁은 너무도 솔직하고 활달한 아신의 매력에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 모습에 싱긋, 미소를 지은 아신이 재우쳐 물었다.

“인도에는 일 때문에 오신 거예요?”

“네.”

“와, 이곳까지 출장을 오실 정도면 대단한 일이겠네요? 이제 보니 민혁 씨, 능력 있는 남자였네요.”

“아니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워낙 창피한 내용이라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얘기해 주세요. 네?”

아름답고 귀여운 아신의 애교에 민혁의 굳게 잠겨 있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조금씩 열려갔다.

그와 함께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해서는 안 될, 못된 짓을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