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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신은 어찌 됐든 자신을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는 말에 답답함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누구인가.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알아낼 수 있는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게 바로 부모님이셨다.

그런데도 은인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아신은 답답한 마음에 사제한에게 물었다.

“외삼촌, 제가 테러를 당한 게 대낮의 시내 한복판이었어요.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 지금쯤 목격자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내 말이. 저 녀석에게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니, 뒷돈 받아 처먹을 시간도 없을 텐데.”

예스민은 마침 잘됐다는 듯이 아신의 말을 받아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

“누나!”

“이것아, 아신이 하는 말에 부끄럽지도 않니?”

“…….”

“외삼촌, 정말 아무것도 확보를 못했어요?”

“미안하다, 아신아. 첸나이 경찰청장한테 지시를 내려놨으니까, 조금 있으면 보고서가 올라올 거다.”

똑똑똑.

그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노크했다.

아신의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실장이었다.

“회장님, 오늘 아가씨를 직접 치료한 의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서 모시고 들어와.”

잠시 후,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40대 초반의 남자가 병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아쇼크(Ashok)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오늘 아신을 치료해 주셨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때, 사제한이 뜬금없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네는 지금까지 뭐 하다 지금 나타났는가!”

“사제한!”

예스민이 동생의 무례에 크게 질책했다.

그 사나운 기세에 찔끔 놀란 사제한은 얼른 꼬리를 말고 사과를 했다.

“험험, 미안하네.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니까 실례를 했네.”

아쇼크는 이런 일이 다반사인 듯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제 동생이 성격이 조금 급해서요. 이젠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제가 지난밤에 당직을 섰기 때문에 집에서 잠시 눈 좀 붙이고 나왔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듣자하니 우리 아신을 병원에 데려다준 사람이 동아시아인이라고 하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분이 입원 보증금도 내주셨어요.”

“아, 정말인가요?”

“네. 원무과에 가면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때, 사제한을 향한 예스민의 빈정거림이 또 한 번 흘러나왔다.

“사제한, 당연히 원무과는 뒤져 봤겠지?”

“…물어보기는 했는데, 근무자들이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 봅니다.”

예스민 장관이 그 말에 새삼 부아가 치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내가 이참에 아주 인도 경찰을 싹 다 갈아엎을 줄 알고 있어!”

“…누나!”

“내가 널 보면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너는 저기 구석에 가 있어.”

“쳇, 알았어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게요.”

예스민은 사제한에게 눈을 한 번 흘긴 후, 다시 아쇼크에게 물었다.

“혹시… 그분 연락처를 받아놓은 것은 있나요?”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제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아쇼크는 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예스민에게 건네주었다.

예스민은 메모지에 적혀 있는 이름 읽어보았다.

“카~앙 미~인 혀~억? 음, 한국인가요?”

순간, 아신은 민혁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라며 급하게 물었다.

“의사 선생님, 강민역이라는 사람이 맞나요? 검은 머리에 눈이 좀 컸는데요.”

“음, 인도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검은 머리에 눈이 크긴 하지만… 어쨌든 맞는 것 같습니다. 근데 강민역이 아니라 강민혁이에요.”

“그분이 연락처를 남기셨나요?”

“네. 장관님께 건네 드린 메모에 나와 있습니다.”

“엄마, 빨리 전화해 봐요.”

예스민은 아신의 성화에 얼른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전원이 꺼져 있다는 음성 메시지만이 들려왔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어휴, 누나도 참. 밤 12시가 넘었는데 당연히 자고 있겠죠.”

“이것아, 너는 밤에 잘 때 핸드폰 전원을 끄고 자냐?”

“응? 그건 아니죠. 그럼 혹시… 지금 여자와 함께 있는 게 아닐까요?”

“아휴~ 저걸 그냥. 내 동생만 아니라면 당장 잘라 버리는 건데.”

“엄마, 죄송한데 다시 한 번만 더 전화해 봐요.”

예스민은 딸의 간절한 부탁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좀 전과 마찬가지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똑똑똑.

그때, 경호실장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첸나이 경찰청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고 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50대 중반의 체구가 상당히 비대한 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장관님, 총수님. 저는 이곳의 치안을 맡고 있는 스레얀(Shreyahth)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세요, 스레얀 청장. 오랜만이네요.”

“말씀 놓으십시오, 장관님.”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뭔가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나요?”

“네, 그렇습니다. 어제 낮에 도로에서 아신 아가씨를 구한 사람을 확인했습니다.”

예스민은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자세하게 처음부터 설명해 보세요.”

“어제 아가씨가 테러를 당할 때, 한 남자가 나타나서 괴한들을 물리쳤답니다. 그 장면을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촬영했는데, 그 동영상을 지금 확보했습니다.”

스레얀은 자신의 핸드폰에 동영상을 재생시켜 아신에게 건네주었다.

아신은 한참 동안 동영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강민혁이 확실했다.

“엄마, 맞아. 이 사람이 강민혁이야.”

“뭐라고? 어디 좀 보자.”

아신의 아버지인 락시미(Lakshmi) 회장과 예스민, 그리고 사제한은 옹기종기 모여들어 작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이야, 이 친구 싸움 좀 하네? 아신, 근데 너는 이 사람을 어떻게 아는데?”

“응. 그게 오늘 차가 막혀서 도로에 서 있는데, 옆에서 팔자 좋게 오토릭스를 타고 있더라고.”

아신은 민혁과 만나게 된 일에 대해서 낱낱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제한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다야?”

“네, 외삼촌.”

“아니, 아무것도 아닌 사이인데, 이 사람이 너를 구해주었다고?”

“왜 아무것도 아니야. 두 번이나 마주쳐서 대화를 나눴다니까.”

똑똑똑!

그때,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경호실장이 급히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왔다.

“회장님, 제가 아는 사람이 동영상을 하나 보내왔는데,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가씨를 구해준 사람이 아무래도 보복 테러를 당한 것 같습니다.”

“뭐라고? 당장 가지고 와봐!”

락시미 회장은 핸드폰을 건네받자마자 바로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재생 시간이 30초 정도밖에 안 될 만큼 짧은 내용이었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민혁이 괴한들에 의해 승합차에 실리는 장면이었다.

확실히 앞서 깡패들을 해치운 민혁이 맞았다.

풀썩.

아신은 민혁의 처참한 몰골에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신!”

예스민이 놀라 소리를 지르는 사이, 아쇼크가 급히 달려가서 여기저기 맥을 짚으며 살펴보았다.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 아신 아가씨는 심신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쇼크를 받아 잠시 기절한 것뿐입니다. 당장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니, 모두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알았어요. 옆방에 있을 테니, 아신이 다시 깨어나면 연락을 줘요.”

앞서 아신이 말한 대로 그녀의 부모님은 면면이 무척이나 대단했다.

우선 아신의 아버지는 인도 굴지의 그룹 회장, 어머니는 내무부 장관이었다.

거기에 더해 삼촌인 사제한은 인도 경찰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경찰 총수였다.

이런 대단한 사람들이 아신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쩔쩔매기만 했다.

병실 옆 보호자 대기실로 자리를 옮긴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니, 얘기라기보다는 예스민 장관과 락시미 회장이 일방적으로 경찰 조직의 두 사람을 다그치고 있었다.

“허참, 우리 인도의 치안이 이렇게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 줄 정말 몰랐소.”

“대낮에 테러를 당하질 않나, 생명의 은인이 보복 테러를 당하질 않나… 도대체 경찰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정말… 면목 없습니다, 매형, 누님.”

“진짜로 뇌물 받아 처먹느라고 치안을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지금 강민혁이라는 사람이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잖아?”

“…….”

“지금부터 24시간 시간을 줄 거야.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내 앞에 데리고 와. 죽었으면 시체라도 찾아서 오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딸 아신에게 테러를 가한 놈들이 누군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알아내.”

“알겠습니다, 장관님.”

“만약에 강민혁이라는 사람이 시체로 발견되면, 우리는 강민혁의 조국인 대한민국에 큰 죄를 짓는 거야.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자고.”



***



“아, 뜨거워…….”

아침 햇살이 민혁의 얼굴을 강하게 내려쬐었다.

민혁의 눈이 서서히 뜨여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전날 밤의 들판이었다.

“어? 나 아직 죽지 않았나?”

이상하게도 통증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어? 내 몸이…….”

민혁은 누운 상태 그대로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놀랍게도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어젯밤에는 분명 팔다리가 부려지고 배도 찔렸는데… 어떻게 멀쩡해진 거지?”

몸을 일으켜 앉으면서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풀밭과 나무 몇 그루만이 눈에 띄었다.

“천당이 이렇게 황량할 리는 없고… 그럼 내가 다시 살아났나?”

민혁은 햇살에 눈이 부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무 밑 그늘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몸에서 활력이 넘쳐 났다.

그늘에 도착한 민혁은 자신의 몸을 세밀하게 훑어 내려갔다.

팔다리는 멀쩡하고, 찢어지거나 멍든 흔적도 전혀 없었다.

마치 새살이 돋아난 것처럼 피부도 뽀얗게 빛을 발했다.

“이상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닌데…….”

전날 린치를 당한 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서 넝마가 되어 있고, 핏자국도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옷을 보면 내가 폭행당한 것이 맞는데…….”

민혁은 어제 폭행을 당한 이후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가만있어 보자, 어제 폭행을 당한 것은 확실하고… 내가 죽을 줄 알고 놈들이 이곳에 버린 것도 분명한데……. 어째서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거지? 혹시 나 좀비인가?”

순간, 둔기에 얻어맞은 듯 머릿속에 강한 충격이 몰려왔다.

“맞아! 그 과일!! 그것도 꿈이 아니었어! 분명 처음 보는 과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이상해.”

그와 함께 과일이 말을 걸어온 듯한 느낌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분명 말을 걸어왔지. 뭐랬더라? 아, 맞아. 자길 먹어달라고 했어.”

유혹하는 듯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광채, 입에 가져다 대자마자 마치 살아 있는 듯 목구멍을 통과하던 느낌.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음, 그거 과일… 맞겠지? 괜히 외국에서 이상한 거 먹으면 큰일 나는데…….”

과일로 인해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은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민혁은 다시금 자신의 몸을 천천히 살펴보다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어라? 어릴 적 흉터도 없어졌네?”

민혁은 어릴 때 큰 사고를 두 번이나 당했다.

그때 입은 흉터가 다리에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어쨌든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단 말이지? 나를 불쌍히 여긴 신이 도와주신 걸까? 어쨌든 정말 다행이야. 한국에 돌아가면 어머님께 꼭 효도해야지.”

기쁨도 잠시.

민혁은 이내 현실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여긴 도대체 어디지?”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지만, 나무 몇 그루에 끝없이 펼쳐진 풀이 전부였다.

주머니를 뒤져 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큰일 났네. 기껏 살아났는데 이러다간 여기서 말라 죽겠네. 핸드폰도 없고… 어떻게 숙소로 돌아가지?”

민혁은 일단 움직여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어젯밤 자신을 버리고 간 자동차의 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흔적을 따라서 30분 정도 걸어가니, 자동차들이 지나다닐 만한 도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혁은 도로가의 그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후, 자동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저 멀리서 커다란 트럭 한 대가 뿌연 연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민혁은 재빨리 도로 쪽으로 나가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제발… 서라.’

빠~앙!

그러나 야속한 트럭은 경적만 울리고는 민혁을 무시하며 그냥 지나쳐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