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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피부는 흰 우유와 초코우유를 섞어놓은 듯 부드러운 갈색 빛을 띠었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큰 눈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못할 것 같은 미인이었다.

‘어라?’

그런데 그 아름다운 여인이 민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 아가씨도 어지간히 심심하고 따분했으리라.

그러니 이렇듯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붙인 거겠지.

“혹시 일본 사람이세요?”

영어 발음이 거의 원어민에 가까웠다.

목소리 또한 은 쟁반 위로 옥구슬이 굴러가듯 맑고 청량했다.

“아니요. 한국 사람입니다.”

“어머,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외국에 나가면 가끔 그런 질문을 받거든요.”

“그런가요? 사실 저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러세요?”

“특히 한국 가수들을 많이 좋아해요.”

“누구를 좋아하는데요?”

“막방의 G―타이거를 좋아해요.”

“아, G―타이거!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사실 민혁은 G―타이거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

그래도 왠지 그녀와 공통점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인도에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행 왔어요.”

역시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은 술술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미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도 모르게 허세가 발동한 것이었다.

민혁이 어떻게든 좀 더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하는 찰나, 조금씩 정체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검게 칠해진 차창이 다시 올라가며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짧은 대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정말 아쉬웠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는데…….

민혁이 좀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오토릭샤 운전사가 피식피식 웃음을 보내왔다.

같은 남자로서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부끄러워진 민혁은 시선을 멀리 돌렸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민혁을 외면하지 않았다.

1㎞ 정도 나아갔을 때, 또다시 정체가 시작됐다.

마찬가지로 방금 전의 고급 외제 승용차가 이번에도 민혁의 옆에 와서 스르르 멈춰 섰다.

뒷자리의 윈도우가 내려오면서 아름다운 인도 미인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또 만났네요.”

“그러네요.”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아신(Asin)이예요.”

“저는 강민혁입니다.”

“캉민역?”

“…….”

대충 서로의 이름 정도는 아는 사이가 된 것 같다.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우리나라 이상하죠?”

“네? 뭐가요?”

“인도에 오는 사람들은 도로에 누워 있는 소들을 보고 많이 놀란다고 하던데요.”

“하하, 전혀 아닙니다. 소도 좀 쉬어줘야죠.”

“어머, 멋진 말씀이시네요.”

“하하하, 제가 원래 조금 멋지기는 합니다.”

민혁은 평소라면 도저히 부끄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을 술술 늘어놨다.

이 또한 아신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인연을 놓아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민혁은 대담하게 멘트를 날렸다.

“정말 예쁘시네요.”

“어머, 지금 저한테 작업 거는 거예요?”

“작업이라뇨. 아름다운 여성에게 미인이라고 한 것뿐인데요.”

“그런가요? 민혁 씨도 미남이세요.”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건가요?”

“호호호, 그렇답니다.”

낯선 곳에서의 유치한 대화가 참 즐거웠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고민과 걱정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찾아오는 법.

다시금 정체가 풀릴 기미가 보였다.

이미 행운은 차고 넘치도록 찾아왔다.

이제 더 이상 아신이라는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할 것이다.

민혁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아신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신 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저도요. 한국에 잘 돌아가세요.”

어느새 아신이 탄 차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정체가 풀렸다고 해서 고속도로를 달리듯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뿌~앙!

그때, 민혁이 탄 오토릭샤의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검정색 승합차가 달려왔다.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승합차.

워낙 어이없는 장면이라 민혁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뭐지? 무슨 영화 촬영인가?”

그 차는 15m 정도 더 나아가더니,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이익!

덜커덩!

승합차 문이 열리고, 쇠파이프를 든 건장한 청년 여섯이 우르르 승합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아신이 타고 있는 고급 승용차로 돌진하더니, 이내 쇠파이프로 휘둘러 댔다.

쾅! 쾅쾅쾅!

“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민혁의 귀에 들려왔다.

그 순간, 민혁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오토릭샤에서 내려 예의 난동이 벌어진 곳으로 전력 질주했다.

와장창!

그사이, 누군가가 기어이 자동차의 유리를 부순 것 같았다.

민혁은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눈앞의 괴한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컥!”

인중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은 뒤로 벌렁 나자빠지면서 도로를 뒹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동료가 당하자 한 청년이 민혁의 머리를 노리고 쇠파이프를 크게 휘둘러 왔다.

휘~익!

절체절명의 순간, 고개를 숙여 살짝 피한 민혁은 다시금 주먹을 말아 쥐고는 청년의 복부에 강한 어퍼컷을 선사했다.

“커~억!”

숨이 막힌 듯한 신음과 함께 허리를 숙인 청년에게 민혁은 손날로 뒤통수를 가격했다.

청년은 그대로 의식이 끊겼는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민혁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듯 남은 네 청년은 긴장하며 전열을 정비했다.

민혁도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쇠파이프를 주워 들며 이들에게 맞섰다.

이윽고 한 놈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민혁에게 덤벼들었다.

깡!

민혁은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마주 휘둘러 막아낸 후, 발로 놈의 낭심을 가격했다.

“커억!”

밀려드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는지, 청년은 몸을 달팽이처럼 둥글게 말았다.

그 순간, 민혁은 주저하지 않고 놈의 뒤통수를 쇠파이프로 가격했다.

잘못하면 그대로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민혁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민혁의 잔인한 손속에 너무도 간단하게 당하는 모습을 본 세 청년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민혁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먼저 한 놈의 턱을 후려친 민혁은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옆에 있던 청년의 무릎을 쇠파이프로 찍어버렸다.

순식간에 혼자만 남게 된 청년은 무릎을 꿇으면서 절실한 표정으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외쳐 댔다.

아마도 살려 달라는 의미의 말인 듯했다.

그러나 민혁은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군 시절, 민혁을 가르친 교관은 하나의 교훈을 뼈에 새기라 강조했다.

그건 바로 적과 싸울 때 절대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것이었다.

민혁도 그 말에 100% 동의했다.

상대를 봐주는 순간,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교관의 가르침을 떠올린 민혁은 무릎 꿇은 놈에게 다가가 쇠파이프로 머리를 찍어버렸다.

“컥!”

단말마를 내지른 놈은 힘없이 쓰러져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었다.

민혁이 청년 여섯 명을 쓰러트리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3분에 불과했다.

의식을 잃거나 겨우 신음성을 흘려내는 괴한들은 최소 중상 아니면 사망각이었다.

만약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이처럼 심하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인도, 그것도 치안이 그리 좋지 못한 땅이었다.

찰나의 방심으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니만큼 어설픈 자비는 버려야 했다.

탱그렁!

민혁은 손에 들린 쇠파이프를 내던지고는, 고급 승용차로 급히 다가갔다.

차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 아신이라는 아가씨는 머리에서 피를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운전기사도 신음을 흘리며 좌석에 널브러져 있었으나,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다만, 보조석의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은 칼에 찔린 것인지, 복부에서 많은 피를 흘려 무척이나 위독해 보였다.

민혁은 운전기사를 뒷좌석에 욱여넣고 서둘러 운전석에 올라탔다.

부르릉!

다행히도 시동은 문제없이 잘 걸렸다.

민혁은 무작정 차를 출발시켰다.

이 모든 과정이 생각을 하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머리와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고 할 수 있었다.

지독한 교관을 만나 무지막지한 가르침을 받은 결과였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 탓에 다행히 도로는 여유가 있었다.

대충 시속 3~40㎞ 정도로 달리기는 하는데, 자동차 상태가 영 불안했다.

끄르릉!

금방이라도 시동이 꺼질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민혁은 운전을 하면서도 주위에 병원 마크가 없는지 계속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저 멀리 초록색의 병원 마크가 눈에 띄었다.

“제발… 자동차야, 나 좀 살려주라. 시동이 꺼지면 정말 큰일 난다.”

운명의 여신이 민혁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는 퍼지지 않았다.

민혁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응급실로 달려가며 크게 소리쳤다.

“사람이 죽어가요!”

폐차 직전의 고급 승용차가 털털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에 위기 상황을 직감한 것인지, 응급실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세 사람을 차에서 끌어냈다.

아신을 비롯해 세 사람은 황급히 구급 침대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제야 비로소 민혁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약 10여 분이 지난 후, 의사 가운을 걸친 사람이 민혁에게 다가왔다.

“여자분은 머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남성분 한 분은 골절상을 입었지만, 역시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분은 장기가 손상돼서 응급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보호자분께서 수술비와 치료비 일부를 먼저 부담해 주셔야 합니다.”

“네?! 저는 보호자가 아닙니다.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구해온 겁니다.”

“어찌 됐든지 간에요, 응급수술을 안 하면 귀중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사람은 살려놓고 봐야죠?”

“그렇긴 하지만…….”

“여자 환자분을 보니까 평범한 집안의 따님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식을 찾으면 병원비 정도는 금방 해결해 줄 겁니다.”

“그러니까, 저더러 먼저 선결제를 하라는 말인가요?”

“물론 우리가 여자 환자분의 핸드백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를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절도죄에 해당돼서요.”

“끄응…….”

“자, 보호자분.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서둘러 주세요.”

“아니, 보호자 아니라니까… 에휴, 알았어요. 원무과가 어디죠?”

“일단 보증금만 내시면 되니까, 그리 부담되지는 않으실 겁니다.”

싱긋 웃어 보이는 의사가 마치 악마처럼 느껴지는 민혁이었다.

그러자 남자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도 왠지 의심이 들었다.

막말로 그렇게 위독하다면 이렇게 거래하듯 이야기를 주고받을 여유도 없을 것 아닌가.

왠지 자신이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민혁은 원무과에서 병원비를 결제했다.

무려 5만 루피,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 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으이구, 피 같은 내 돈.”

결제 영수증을 응급실에 있는 의사에게 보여주자, 복부에서 피를 흘리던 남자가 바로 수술실로 옮겨졌다.

슬쩍 살펴보니 안색이 한결 나아진 것이, 역시나 의사의 술수에 당한 듯싶었다.

그제야 민혁은 다른 두 사람을 살펴볼 정신이 들었다.

운전기사는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고, 아신의 머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제 민혁이 할 일은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민혁은 자신이 왜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낯선 나라에 첫발을 디딘 지 이제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어휴~ 괜히 끼어들어 가지고 이게 뭐람.”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이대로 있기도 난감하네. 숙소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와볼까? 돈도 받아야 되니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서 어느덧 오후 5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한 사람은 없었다.

상태가 위중해서는 아니고, 놀란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깨우지 않는 듯했다.

민혁은 할 수 없이 응급실을 지키고 있는 의사에게 다시 찾아갔다.

“저…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서 그러는데, 전 이만 가봐도 되겠죠?”

“음, 어쩌죠? 환자분들 중 한 분만이라도 깨어났으면 사정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아, 경찰에게도 진술을 해주셔야 하는데요.”

“그냥 내일 다시 들를게요. 그래도 되죠?”

“그럼 연락처라도 남겨주세요. 혹시 환자분이 의식을 회복하면 바로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그게 낫겠네요.”

민혁은 의사에게 자신의 전화번호와 게스트 하우스의 연락처를 알려준 후, 병원을 나섰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자. 어휴, 배고파 죽겠네.”

그러고 보니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침을 먹은 후, 지금까지 먹는 걸 잊고 있었다.

그사이 입에 댄 거라고는 물 몇 모금밖에 없었다.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리자 허기가 몰려왔다.

민혁은 병원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오토릭샤 기사와 요금을 흥정한 후, 뿌나말리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로 출발했다.

대로를 지나 약간 인적이 드문 도로로 들어서자, 승합차 세 대가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다.

승합차들은 오토릭샤를 앞지르자마자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이이익!

잠시 후, 세 대의 승합차에서 나름 한 덩치 하는 이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전부 20명쯤 되어 보였는데, 저마다 손에 흉측한 도구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민혁은 이들이 자신에게 복수하러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낮의 그 깡패들과 한패임이 분명해 보였다.

‘아~ 좆 됐네.’

오토릭샤 운전수는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민혁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이미 사방이 포위된 뒤였다.

게다가 이 낯선 곳에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민혁에게 도망이라 선택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휴, 이게 뭐야. 이 먼 인도까지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