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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인도 역시도 별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케네디는 정반대의 대답을 꺼냈다.

“이곳, 타밀나두(TamilNadu) 주는 인도에서 사회주의 성향이 높은 곳 중 하나입니다. 아울러 강력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지요.”

“그러면… 술집이 없는 건가요?”

“호텔이나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가진 업소에서만 술을 판매할 수 있어요. 그리고 술값도 무진장 비쌉니다.”

“그럼 저도 여기서 술을 마시기는 어렵겠네요?”

“아니요. 민혁 씨가 머물 게스트 하우스 안에 식당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마실 수 있습니다.”

“아, 게스트 하우스는 술 판매 자격증을 가지고 있나 보군요?”

“아니요. 당연히 없습니다. 불법으로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술을 마실 수 있다고요?”

케네디는 잠시 깊은 고민을 하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민혁도 굳이 방해하지 않으려 입을 열지 않았다.

이윽고 케네디가 생각을 정리했는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가 바로 인도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돈이나 권력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요.”

“아~ 그렇습니까?”

“네.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게스트 하우스의 뒤를 봐주고 뒷돈을 받아먹는 비리 경찰들이 많아요.”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거나, 단속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식인가요?”

“정확합니다.”

“하하, 그건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단속 대상이 술이 아니라 다른 것이지만요.”

그러나 케네디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단언했다.

“저도 한국에서 살아봤지만, 그 정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런가요? 그럼 게스트 하우스에서 마시는 술들은 어디서 가지고 오는데요?”

“소주는 거의 한국에서 가져오고, 맥주는 인도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많이 마십니다.”

민혁은 친숙한 소주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문득 유통 경로가 궁금해졌다.

“케네디 씨,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소주가 정식 수입되고 있나요?”

“하하, 어림도 없습니다. 신경섭 사장님도 10년 동안 별의별 짓을 다 해봤는데, 아직도 수입 허가를 못 받았습니다.”

“네? 아니, 소주가 팔리고 있다면서요?”

“한국 사람들이 몰래몰래 가지고 들어와서 팔고 있는 거죠.”

“그럼 아주 비싸겠네요?”

“물론이죠. 소주 한 병에 팔백 루피인데, 미화로는 15달러 정도 돼요.”

“그럼 15,000원이 넘는다는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이야, 누군가가 제대로 수입해서 팔면 대박 나겠네요.”

“그렇죠. 아무리 못해도 열 배 이상은 남겨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민혁이 소주를 수입해서 팔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는 찰나, 케네디가 그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지난달에도 누군가가 한국에서 소주를 수입하다 걸렸는데, 이곳 신문과 TV에도 나오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수입업자는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야반도주했습니다. 혹시라도 민혁 씨도 소주를 수입해서 판매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얼른 접으세요.”

“그래도 누군가는 가지고 온다면서요?”

“첸나이로 이사 오는 사람들이 컨테이너에 몇 십 박스씩 가지고 오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통관할 때 세관에 뒷돈을 꽤 많이 찔러줘야 하고요.”

“만약에 정식으로 가지고 만 온다면, 판로 걱정은 없겠네요?”

“그렇죠. 아마 줄을 서서 기다릴 겁니다.”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혁이 도착한 게스트 하우스는 H 자동차 첸나이 공장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조용하고 시설이 아주 깔끔했다.

“오늘과 내일은 알아서 자유 시간을 보내세요.”

“그럼 신 사장님은 모레 만나는 겁니까?”

“네. 모레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민혁은 케네디를 보낸 후, 게스트 하우스 주인의 안내를 받아서 301호에 여장을 풀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약간 넘어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5시 30분이 넘은 터라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민혁은 서둘러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모기떼들의 공습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모기약을 한 통 가까이 뿌려가며, 모기를 박멸하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민혁은 느지막이 일어나서 게스트 하우스 안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서 여기저기 몸이 찌뿌듯했다.

식당에는 다소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민혁을 보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어서 오세요. 어젯밤에 오신 손님이죠?”

“그렇습니다. 주인아주머니 되세요?”

“아니요. 내 아들 내외가 주인이고, 나는 얹혀살고 있어요.”

“아침은 몇 시까지 주나요?”

“아무 때고 오시면 돼요. 지금 아침 차려 드릴까요?”

“네. 부탁드릴게요.”

아주머니는 즉시 아침을 준비해 주었다.

반찬은 거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맛보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지쳐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입에 맞아 만족스러웠다.

서둘러 밥을 먹고 있으려니, 아주머니가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무래도 말 상대가 필요하신 듯했다.

“아주머니, 식사 안 하셨으면 저랑 같이 식사나 하시죠?”

“그래도 되겠어요?”

아주머니가 반색하며 다가오셨다.

“뭐, 어때서요. 우리 어머니라고 생각하면 되죠.”

“그럽시다.”

아주머니는 밥공기에 밥을 떠 와서 민혁의 맞은편에 앉았다.

“젊은 총각은 어디서 오셨어요?”

“저요? 직장은 서울에 있고요. 고향은 강원도예요.”

그러자 깜짝 놀란 듯 아주머니가 되물었다.

“강원도 어디인데요?”

“아주머니도 고향이 강원도세요? 저는 인제예요.”

“어머, 진짜예요? 나도 인제인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머나먼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반가운 마음에 민혁은 재차 물었다.

“인제 어디신데요?”

“하남이라는 곳이에요. 혹시 어딘지 아세요?”

“그럼요. 현리 옆이잖아요.”

“그럼 총각은 현리가 고향인가요?”

“네. 현리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어요.”

“우리 아들도 기린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요.”

아주머니는 몹시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급하게 나가셨다.

아무래도 아들을 찾으러 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아주머니는 편안한 인상의 한 남자를 데리고 왔다.

어젯밤에 자신을 방으로 안내해 준 사람이었다.

“어머니 말씀을 들었는데, 기린고등학교 출신이라고요?”

“네. 2000년도에 졸업했습니다.”

“반가워요. 나는 1990년에 졸업했으니까, 내가 딱 10년 선배네요.”

“반갑습니다, 선배님. 저는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나는 장원섭이라고 해요.”

둘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선배님, 말씀 편하게 놓으세요.”

게스트 하우스 주인에서 선배님이 되는 순간이었다.

“10년 선배면… 혹시 강지숙이라고 아세요? 우리 누나인데.”

“지숙, 지숙… 아, 네가 지숙이 동생이니?”

“네. 저희 큰누나예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지숙이네 집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혹시 그때 본 꼬마가 너냐?”

“저희 집에 아들은 저밖에 없으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야, 정말 신기하다. 이 먼 나라에서 고향 후배를 만나다니.”

“저도 완전 신기해요.”

정말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낯선 이곳에서 고향 선배를 만나다니…….

서울에서도 고향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인도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원섭은 풍기는 이미지대로 솔직하고 인간성이 좋은 듯했다.

어느 정도 어색한 분위기가 가시자 원섭이 편하게 물어왔다.

“민혁이, 너는 이곳에 어쩐 일로 오게 됐냐?”

“출장 왔어요.”

“H 자동차?”

“아니에요. 전 LK에 다니고 있어요.”

“그렇구나. 귀국 예정일은 언젠데?”

“8월 초에 들어갈 예정인데, 정확한 날짜는 아직 미정이에요.”

“어쨌든 여기 있는 동안은 여기가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도 돼.”

“네,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편하게 지낼게요.”

“일단 밥부터 먼저 먹어라. 나하고는 한가할 때 얘기 좀 하자.”

“그러세요.”

장원섭은 민혁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게끔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러자 원섭의 모친이 다시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아들 후배면 내 아들이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말 놔도 될까?”

“그러세요, 어머님.”

“고마워. 사실 난 이곳 생활이 심심해 죽겠어. 그래서 이렇게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낙이야.”

“어머님은 여기 언제 오셨는데요?”

“남편 죽고 나서 바로 왔으니까, 이제 6개월 조금 넘었어.”

“한국에는 일가친척분이 없으세요?”

“있긴 한데, 그리 가깝지는 않아. 내가 박복해서 그런지, 자식도 원섭이 하나밖에 못 낳았어.”

“한국이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어휴, 말도 마. 밤마다 동쪽을 바라보며 울다 잠든 게 한두 번이 아니야. 아, 이 이야기는 내 아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줘. 괜히 마음 아파 하니까.”

말씀하시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진한 슬픔이 배어 나왔다.

왜 아니 그러겠는가.

낯선 타향에서 아는 이 하나도 없이 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민혁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힘드시면 한국으로 돌아가셔도 되지 않나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아들 내외가 나 때문에 괜히 신경 쓰는 것도 못할 짓인 것 같아서. 천상 여기서 정 붙이고 살아보려고 해.”

“손주는 있으세요?”

“손자 하나, 손녀 하나씩 있어. 내가 그 녀석들 보는 낙으로 그나마 여기서 견디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런데 게스트 하우스는 잘되나요?”

“나는 잘 모르겠어. 겨우 적자는 면하고 사는 것 같은데…….”

민혁은 아주머니의 눈에서 수구초심을 느낄 수 있었다.

민혁이 이럴진대, 원섭 선배도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전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두 사람 모두 정이 깊고 마음이 따뜻했다.

사실 민혁은 인도에 도착한 후에도 마음이 괴로웠다.

쫓기듯 날아오기는 했지만, 딱히 명확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신경섭 사장을 만나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자신을 따스하게 반겨주었다.

그건 마치 적막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았다.

게스트 하우스가 어느덧 편안한 집처럼 느껴졌다.



민혁이 숙소로 잡은 이곳은 첸나이 외곽인 뿌나말리라는 지역으로, 첸나이 시내와는 차로 30분 이상 떨어져 있었다.

신 사장과는 모레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이틀간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이참에 시내 구경이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원섭 선배에게 물어봤더니, 특별히 추천해 줄 만한 곳이 없다면서 라마크리슈나 사원이나 가보라고 했다.

선배의 조언에 따라 인도의 대표적인 교통 수단인 오토릭샤를 타고 시내로 출발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도로에 차량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시내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혼잡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긴 정체가 빚어졌다.

한자리에서 10분 이상 머물러 있는 경우가 왕왕 발생했다.

우습게도 대부분의 이유는 소가 도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시 인도는 듣던 것처럼 소의 천국이 맞았다.

하지만 오토릭샤 운전수들은 늘 있는 일이라 그런지, 짜증 한 번 안 내고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민혁이 지루해하며 눈을 붙이려던 찰나, 눈에 띄는 광경을 들어왔다.

오토릭샤 옆으로 고급스러운 차가 다가와 선 것이다.

까맣게 선팅이 되어 있어서 차 안에 누가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 민혁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뒷좌석의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민혁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봤다.

‘와우!’

순간, 민혁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인도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불리는 카트리나 카이프(Katrina Kaif)만큼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가씨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