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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은 회사 근처의 삼겹살집에서 상혁과 조민수를 불러 이별주를 나누었다.

이들은 더럽고 치사한 회사 생활에 그나마 한 줄기 위안을 안겨준 존재였다.

셋은 늘 함께 어울려 다녔고, 그런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민혁아, 잘 갔다 와라.”

“잘 갔다 오기는 뭘 잘 갔다 오냐? 아무 대책 없이 출장 가는 건데.”

“맞아. 상혁이 형, 민혁이 형은 맨땅에 헤딩하러 가는데, 머리만 깨지고 올 가능성이 열나 높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민혁이 인도로 가게 된 내막을 잘 모르는 듯 상혁이 재우쳐 물었다.

“아무래도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 같아.”

“누구한테? 성 과장, 그 새끼한테?”

“빤하지 않겠어.”

민혁은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뒤,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도 인도에 닭고기를 수출한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

“그럼 그때 못한다고 하지 그랬어!”

“야, 그걸 어떻게 못한다고 하냐? 실적이 딸려서 죽을 판이었는데.”

옆에 앉아 있던 민수가 민혁의 말에 첨언했다.

“아무래도 성 과장, 그 새끼가 교묘하게 민혁이 형을 엮은 거 같아.”

“너 아까부터 계속 그러는데, 도대체 뭘 엮었다는 거야?”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닭고기를 수출한 게 아닌 것 같아.”

민혁과 상혁은 순간 깜짝 놀라 입으로 가져가던 소주잔을 급히 내려놓았다.

“그럼 뭘 수출했다는 거야?”

“그건 성 과장하고 고 부장이 잘 알고 있겠지. 순진한 민혁이 형은 멍청하게 이용당한 거고.”

민혁은 민수의 말이 나름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멍청하고 순진했던 게 확실히 맞는 것 같았다.

“아마 성 과장 뒤에는 고 부장이 있을 테고, 그 뒤에는 다시 박 상무가 있을 거다.”

입사해서 3년쯤 되면 적어도 이 세 사람이 어떤 끈으로 엮여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맞아. 그 새끼들이 모두 K대 출신이잖아.”

“아마 다음 차례는 나 아니면 정 대리님일 게 분명해.”

“휴, 너의 팀도 그렇고, 우리 팀도 그렇고… 맨 도둑놈들만 들끓고 있는데도 회사가 굴러가고 있는 게 신기하다.”

“어이~ 정상혁, 너희 팀도 그러냐?”

상혁은 소주를 급하게 입에 털어 넣고는 안주를 우걱우걱 씹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과연 해도 괜찮을지 망설이는 듯했다.

그런 기색을 귀신같이 눈치챈 조민수가 옆에서 바람을 넣었다.

“상혁이 형, 먹지만 말고 말 좀 해봐. 형네 팀에는 뭔 비리가 있는데?”

“이건 정말 비밀인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고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한다?”

“알았어. 절대 말하지 않을게.”

두 사람의 다짐을 받은 상혁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상혁의 2팀은 주로 자원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데, 덩어리가 최소 천만 달러에서 최대 몇 억 달러까지로 매우 컸다.

“그러니까… 러시아에서 기름을 들여오는데, 커미션이 매달 백만 달러라고?”

“그렇다니까. 근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가는지 알아?”

“에이, 우리가 알 리가 없잖아.”

“스위스로 가고 있다.”

“회장님 비자금으로?”

“아니. 장근호 사장 입으로 들어가고 있어. 그게 2년 전부터니까, 벌써 2천만 달러 이상 챙겨 먹었을 거야.”

민혁과 민수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가 지난달에 우리 황 부장하고 박 상무가 하는 말을 우연찮게 들었거든.”

“그래서?”

“그 뒤로 몰래 자료를 뒤져 봤는데, 아무래도 그게 사실인 것 같아.”

“그럼 우리 팀 쥐새끼들은 아무것도 아니네.”

“그건 아니지. 너희 팀 쥐새끼들도 생각보다 꽤 많이 해 처먹었을 거다.”

상혁이 확실하게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설마 감사팀 애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많이 해 먹었을라고.”

“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 몰라? 아마 모르긴 해도 고 부장과 성 과장도 월 천만 원 이상씩은 리베이트를 받아 처먹고 있을 거야.”

민혁은 그동안 비리와 관련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자신의 업무도 바쁜데 그쪽으로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민수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그들의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성 과장과 신 사장 사이에 뭔가 커넥션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인도에 가면 그 커넥션이 드러날 텐데도 자신을 인도에 보내는 것을 보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아무래도 출장 기간 동안에 흔적 지우기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몰릴 것이 틀림없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민혁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자, 상혁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응. 내가 성 과장, 그 새끼한테 뒤통수를 엄청 세게 맞았다는 생각.”

진짜 생각지도 않은 강한 돌주먹 펀치를 맞은 기분이었다.

“민혁아, 그러지 말고 인도에 간 김에 좋은 무역 아이템이 있는지 찾아보고 와라.”

“왜? 너희 팀에서 손대보려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 사업 하나 하려고 그런다.”

“응? 웬 사업?”

난데없는 제안에 민혁이 되물었지만, 상혁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형, 나도 끼워줘.”

그러자 민수도 한 발 걸치려고 시도했다.

민혁은 앞에서 넉살 좋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상혁과 민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 모두 유명한 명문대를 나오고, 훌륭한 스펙들로 무장한데다 집안 또한 빵빵해서 먹고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은수저 정도 되는 집안의 자식들인 것이다.

언제든지 LK상사를 때려치워도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 있을 테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자신만의 사업을 할 수도 있다.

민혁의 처지와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두 사람이 민혁과 어울리는 게 의아할 만도 했다.

민혁은 회사에서 잘리거나 그만두게 되면, 하층민 신세로 전락하게 될 것이 거의 100%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LK상사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야, 인간들아. 내가 거기 놀러 가는 줄 알아?”

“어이~ 강민혁. 너는 어차피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으니, 편하게 마음먹고 푹 놀다 와.”

“그래. 돈은 우리가 댈 테니까, 형은 좋은 아이템이나 찾아보라고.”

두 사람의 진심 섞인 농담에 민혁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방금 전까지는 스트레스가 만땅이었는데, 그래도 먹고살 길은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았다. 대신 사장은 나다?”

“아이구, 강 사장님, 맘대로 하세요.”

“좋아, 기분이다! 오늘 술값은 사장인 내가 낼게.”

“헛소리하지 마시고요, 출장이나 잘 다녀오세요. 강 사장님.”



***



서울에서 인도 첸나이로 가기 위해서는 홍콩이나 태국, 싱가포르를 경유해야만 한다.

그중 한국인들이 제일 많이 이용하는 항공사는 타이 항공인데,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한국의 항공사랑 제휴가 맺어져 있어 마일리지가 적립되기 때문이다.

민혁도 역시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서 타이 항공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태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오전 9시 35분과 10시 20분에 있었다.

민혁은 9시 35분 비행기를 선택했다.

10시 20분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하는 탓에 비행기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야 하는 점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약 30분 정도 지나자 기내식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민혁은 기내식으로 나온 해산물 요리를 한입 삼키고는 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강한 향신료의 풍미 탓에 속에서 받지 않는 느낌이었다.

대신 민혁은 위스키를 주문해 연거푸 두 잔을 들이켰다.

비행기에서 술을 마시면 훨씬 더 빨리 취한다는 말에 일부러 과음을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심사가 복잡하고 불안한데, 차라리 뻗어버리는 게 마음 편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취기가 훅 올라왔다.

겨우 눈을 좀 붙이겠다 생각했지만, 일은 민혁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았다.

거의 페르마의 난제 급 문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뇌가 휴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결국 민혁은 잠들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에이, 빌어먹을……. 여러 가지로 도움이 안 되네. 그래, 하자 해. 생각을 해보자.’

민혁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온통 덤터기를 쓰고 회사를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입사 동기인 상혁의 말처럼 인도에 가서 괜찮은 무역 아이템을 찾는 게 오히려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참에 확 회사 때려치우고 아이템이나 찾아봐?’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지독한 면을 볼 때, 돈이 되는 무역 아이템들은 이미 선점하고 있을 것이 빤했다.

비행기는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인도 첸나이로 들어가는 비행기는 밤 10시 20분경에 있기 때문에 공항에서 적어도 아홉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민혁은 짬을 내서 방콕 시내를 둘러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복잡한 마음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올 것 같지가 않았다.

공항 안에서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신의 처지가 새삼 처량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만 보이는 여행자들이 마냥 부러울 뿐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할 날이 오겠지.’

물론 그때가 언제일지는 전혀 상상조차 하기 힘들지만.

영영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아홉 시간이 지나고, 민혁은 다시 인도 첸나이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지루한 비행을 끝내고, 마침내 인도 첸나이 국제공항[Chennai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 민혁은 짐을 찾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민혁은 한국에서 출발할 때 신경섭 사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신은 뉴델리에 출장 갈 일이 생겨서, 직원을 대신 공항에 내보내겠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강민혁’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인도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인도 남부 사람인 듯 거의 흑인에 가까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민혁은 그에게 다가서서 아는 척을 했다.

순간,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결국 만국 공통어인 영어를 사용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온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아, 강민혁 씨. 저는 케네디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왔는데, 꽤나 능숙한 말투였다.

“어? 한국말을 할 줄 아세요?”

“네. 한국에서 3년 동안 살다왔습니다.”

“그래요? 잘됐네요. 영어를 사용해 본 지가 오래돼서 좀 긴장했거든요.”

“하하, 일단 저를 잘 따라오세요.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조심하시고요.”

역시 세계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소매치기가 들끓는다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민혁과 케네디는 차를 타고 바로 게스트 하우스로 이동했다.

“케네디 씨,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시죠?”

“내일 저녁때 돌아오실 겁니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장님이 안 계시기 때문에 회사에 나오셔도 소용이 없어요. 그냥 게스트 하우스에 계시거나, 심심하면 시내 관광이라도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민혁은 이번 컨테이너 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케네디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무래도 신 사장한테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컨테이너 관련 질문은 이쯤에서 접어야겠다는 생각에 민혁은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주로 간단한 신변잡기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는데, 의외로 케네디가 상당히 똑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중 민혁은 문득 사업 아이템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첸나이에 가볼 만한 관광지가 있나요?”

“저도 이곳 첸나이에 20년 넘게 살고 있지만, 딱히 구경할 곳이 없어요.”

“그럼 밤 문화는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