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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컨테이너는 이미 한 달 전에 인도 첸나이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성 과장과 나눈 대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과장님, 지난주에 컨테이너가 첸나이 항구에 도착했는데요, 이제 신 사장한테 수출 대금 청구하면 되나요?”

“으응~ 수출 대금 청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민혁 씨는 이번 일에서 손 떼라고.”

“정말요? 진짜 그래도 되나요?”

“아니, 민혁 씨는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왜 한 번 말하면 알아듣지를 않지?”

성 과장이 민혁에게 확 짜증을 냈다.

순간, 민혁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물씬 받았지만, 따져 묻기에는 때가 좋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그 이후, 민혁은 닭고기 수출 건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만약에 자신이 바이어 발굴부터 물품 선정, 단가 결정, 물품 선적, 대금 청구 등 모든 제반 업무를 수행했더라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 과장의 심부름처럼 업무를 진행한 탓에 기억에 제대로 남지 않은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방금 전에 고 부장으로부터 된통 깨진 이유가 바로 이 닭고기 수출 건 때문인 듯했다.

‘에이, 시펄! 내가 한 거라고는 서류 작업밖에 없는데, 나한테 뭐라 그러면 어떻게 해. 성 과장한테 뭐라 그래야지.’

그때, 성 과장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 민혁 씨, 휴게실로 와.

― 지금요?

― 그래.

― 알았어요.



민혁은 휴게실로 달려가 성 과장을 찾았다.

그는 구석자리에 앉아서 뭔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과장님, 찾으셨어요?”

“아, 민혁 씨. 아침부터 정신없었지? 커피 한잔하자고 불렀어.”

성 과장은 목소리를 확 낮춰서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과장님.”

“민혁 씨도 어찌 된 영문인지 잘 몰라 황당하지?”

“네. 저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인도의 신경섭 사장이 아직도 컨테이너를 못 찾고 있어서, 데머리지 비용하고 스토리지 비용이 장난이 아니게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

“네? 그 비용을 우리 회사가 부담해야 하는 건가요?”

“화주(수출자)가 우리잖아.”

“백 쉽(Back Ship, 수출한 제품을 다시 회수하는 것)하면 안 되나요?”

“나도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우리가 보낸 컨테이너가 인도 세관에 억류되어 있어서 백 쉽도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하더라고.”

민혁은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무역 실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입사해서 만 2년 동안 틈틈이 무역 실무에 대해 공부를 해왔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선배들로부터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배워서 깊숙이 파고들면 아직도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지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도 세관에 억류됐다고 하면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최악의 경우, 수출품 모두를 몰수당해 폐기 처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새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민혁이 재우쳐 물었다.

“신 사장님은 뭐라고 하는데요?”

“백방으로 노력 중에 있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는 것 같아.”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면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징계를 받게 되겠지.”

“그럼 제가 제일 큰 징계를 받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권고사직이나 해고를 당하지 않을까 싶어.”

“네에?”

민혁은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LK상사에 입사하기까지 해온 고생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원도 인제 현리 출신인 민혁은 그야말로 촌놈이었다.

대학 시절, 나름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취업 원서를 쓸 무렵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교수들로부터 나름 추천서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영어 토익 점수가 딸렸고, 스펙 또한 턱없이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지방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서류 전형에서부터 번번이 탈락했다.

어쩌다 면접을 보게 되도 그 후에는 최종 탈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졸업 후, 거의 1년 동안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을 준비했다.

그러다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재훈 경영대학장의 도움을 받아서 천신만고 끝에 LK상사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해고를 당한다면, 그 꼬리표가 붙어 웬만한 기업에는 더 이상 취업이 불가능할 것이다.

어떻게든 죽자 사자 매달려야 했다.

“과장님, 해고를 당하지 않으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음, 사실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야. 조금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민혁 씨가 직접 인도에 가서 해결을 하면 어떻겠나?”

“네? 인도에서 10년 이상 살고 있는 신 사장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제가 인도에 간다고 해서 방법이 있을까요?”

민혁이 소극적인 자세로 우물쭈물하자 성 과장이 짜증을 확 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그냥 앉아서 해고당할래?”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라도 해봐야 할 것 아냐. 막말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지.”

“그 말씀이 맞긴 한데…….”

“그놈의 소극적인 성격은 언제 고칠 건데? 아주 너만 보면 답답해 죽겠다.”

“…죄송해요.”

“또, 또! 그놈의 죄송하다는 말 좀 안 쓰면 안 되겠나? 무슨 사내자식이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나? 쪽팔리지도 않아?”

“…….”

잠시 후, 겨우 짜증을 가라앉힌 성 과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민혁을 회유했다.

“내가 직접 인도에 가서 일을 해결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전혀 없어. 막말로 천만 달러가 넘는 수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데, 고작 30만 달러짜리에 신경 쓸 수는 없잖아. 그러니 어떻게, 민혁 씨가 다녀오면 안 되겠나?”

“…알았어요. 제가 가겠습니다.”

성 과장은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쾌재를 불렀다.

“그래, 잘 생각했어. 죽을 때 죽더라도, 남자라면 ‘찍’ 소리는 내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그럼… 언제 출발해야 하는데요?”

“부장님이 상무님한테 보고하러 갔으니까, 승인 떨어지면 바로 출발하라고.”

“출장 처리로 해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그럼 사비 들여서 다녀오려고 했어?”

다시 생각해 보니, 민혁은 성 과장의 제안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만약에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은 해고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인도에 간다손 치더라도, 일을 해결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자신의 앞날은 온통 불투명할 뿐이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미지의 땅 인도에 가서 부딪쳐 보기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갈 때 가더라도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약 30여 분이 지난 후, 민혁은 고 부장의 호출을 받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이야기가 된 것인지, 성 과장도 고 부장과 함께 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님, 찾으셨습니까?”

“그래, 성 과장한테 얘기 들었네. 자청해서 인도로 가겠다고?”

민혁은 성 과장이 이미 수작을 부려놓고 난 후, 자신을 설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아니라고 부정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도로 가는 것밖에 길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성 과장 의도에 순순히 따라주기로 마음먹었다.

“네, 부장님.”

“잘 생각했어.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인도로 출발하라고.”

“그렇게 빨리요?”

“이 친구야, 이번 달 말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 못 들었어?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냐고!”

“…알겠습니다.”

“나가서 바로 출장 품의서 올리도록 하고.”

“부장님, 그럼 귀국 날짜는 언제쯤으로 할까요?”

“가급적이면 8월 초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민혁이 회의실 밖으로 나가자, 고 부장과 성 과장은 마치 음모를 꾸미듯 얼굴을 맞대고 속닥거렸다.

“성 과장, 저놈이 인도로 출장 가면, 그 후엔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그럼요.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나저나 말이야, 우리는 언제까지 푼돈이나 얻어먹고 있을 거야?”

“왜요? 작품 하나 만들어볼까요?”

“그러자고. 미국에 유학 가 있는 딸년이 돈 좀 보내달라고 하는데 말이야.”

“얼마 정도 만들면 되나요?”

“한 5천만 원 정도만 만들어봐.”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월초에 중국에서 오퍼가 하나 들어온 게 있는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래? 도대체 뭔데?”

“사실은 월초에 중국에 아는 지인한테…….”

성 과장은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럼… 공급 업체를 변경하자는 말이야?”

“대만에서 공급받는 것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문제가 없는데, 변경 못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아마 LK전자에서도 싫다고 하지는 않을걸요?”

“지금 어디까지 진행됐는데?”

“샘플하고 각종 자료들은 LK전자 연구소로 보내놨어요.”

“그래? 그럼 결과는?”

“넉넉잡고 2주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LK전자가 그 부품을 연간 몇 개 정도 수입하고 있지?”

“작년에 백만 개 정도 수입했어요.”

“그러면 우리 몫이 얼마라고?”

“개당 0.2달러씩 준대요.”

“그래봐야 2십만 달러라는 말인데… 상무님한테 반 떼어주면 우리 몫은 십만 달러인가?”

“그렇다고 봐야지요.”

고 부장은 생각보다 리베이트가 작다는 생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수입 단가는 얼마인데?”

“기존 부품은 10달러인데, 이 부품은 9달러까지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9.2달러까지 올려서 우리 몫을 개당 0.4달러로 해봐.”

“리베이트 0.2달러에 제품 값 0.2달러 합쳐서 0.4달러에 맞추면 되겠죠?”

“그렇게 하라고.”

“알았어요. 그럼 상무님 몫을 2억으로 늘릴까요?”

“아니, 상무님 몫은 그냥 1억으로 해.”

평소 고 부장은 박 상무에게 상납하는 금액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 왔다.

따라서 이번에는 박 상무 몫을 줄이고 자신들 몫을 더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흐흐흐흐, 알았어요.”

“리베이트는 미국이나 홍콩에 있는 계좌로 받는 것으로 처리하고.”

“늘 그래왔잖아요.”

“알았으면 빨리 진행하라고.”

“그런데 조금 찜찜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가격이 지나치게 쌉니다. 우리 리베이트까지 포함하면 가격 차이가 1.2달러나 납니다.”

“중국 업체는 뭐라고 하는데?”

“인건비 차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너무 찜찜합니다.”

“그럼 만약을 대비해서 희생양을 한 놈 만들면 되잖아.”

“그래서 정 대리나 조민수, 둘 중에 하나를 택해보려고요.”

“정 대리, 그놈은 머리가 약아서 안 되니까… 조민수가 좋겠어.”

“입사 2년 차밖에 안 되는데, 괜찮을까요?”

“우리가 언제 다른 사람 신경 쓰고 살았나?”

“알겠습니다, 선배님.”

“8월 안에 끝낼 수 있겠지?”

“넵, 염려 마십시오. 어떻게든 선배님 손에 돈을 쥐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난 자네만 믿고 있겠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또다시 음모를 꾸미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