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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강민혁 씨!”

“…네, 부장님.”

“당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 거야?”

“…뭔지 모르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이면 다 해결되는 거야? 지금까지 자네가 죄송하단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알기나 해?”

“…….”

“내가 당신 때문에 박 상무님한테 불려가서 얼마나 깨졌는지 알아?”

“…….”

“이 친구야, 말을 해보란 말이야!”

LK상사 유라시아 무역 1팀의 3년 차 사원인 강민혁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회의실로 불려왔다.

그러고는 팀장인 고인선 부장에게 영문도 모른 채 한마디로 열나게 깨지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 텐데,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었다.

그러니 그저 ‘죄송하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30만 달러를 날려 먹게 생겼는데,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이 될 것 같나? 무려 자네 연봉의 8년치가 넘는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으이구, 이 친구야!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고 부장은 민혁을 사각 링 위의 코너로 몰아넣고 무자비한 폭언을 퍼부어 댔다.

그때 옆에 앉아서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던 성민호 과장이 끼어들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바쁘다 보니까 후배 사원을 제대로 못 챙겼습니다.”

“어허, 자네가 바쁜 것은 우리 회사가 다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고 부장은 민혁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 과장을 대했다.

“제가 어떻게든 뒷수습을 해볼 테니까, 시간을 조금만 주세요.”

“자네가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든 이번 달까지 무조건 해결해야 하는데?”

“네? 이번 달은 이제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요?”

“나도 어제 저녁에 갑자기 박 상무님께 통보받았단 말이야.”

“그럼 시간이 정말 없네요.”

“어휴~ 누가 아니래.”

고 부장은 회의실 한구석에 힘없이 서 있는 민혁을 힐끗 쳐다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성 과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월말까지 해결이 안 되면, 나까지도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게 생겼단 말이야. 저 멍청하고 무능한 강민혁 때문에!”

“네?! 징계 위원회요?”

“아니, 왜 그렇게 놀라나?”

“아, 그게… 당연히 부장님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역시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군.”

“부장님, 일단 저 돌대가리는 밖으로 내보내시죠?”

고 부장은 짜증 섞인 얼굴로 민혁을 쳐다보고는 야멸차게 입을 열었다.

“들었지? 나가보라고, 이 재수 없는 인간아!”

민혁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재수 없는 인간이라니……. 에이,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은 민혁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깨진 것인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도 서슬 시퍼렇게 몰아대는 통에 한마디도 못 물어보고 바로 쫓겨났지만, 그렇다 해서 억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진행한 건 중에 30만 달러짜리 계약이 뭐가 있었지?’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때, 동기이자 친구인 무역 2팀의 상혁이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아침부터 또 무슨 일로 작살난 거냐? 고 부장이 성질내는 소리가 내 자리까지 들리더라.”

“나도 모르겠다. 들어가서 영문도 모르고 마냥 깨지다 나왔어.”

“응? 너같이 꼼꼼한 놈이 영문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러게. 30만 달러라는 말밖에 들은 게 없단 말이야.”

“30만 달러? 그 정도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닌데, 전혀 기억에 없단 말이야?”

“응. 아무래도 업무 수첩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아.”

“그래. 꼭 확인해 보고… 고생해라, 친구야.”



한편, 민혁을 내쫓은 고인선 부장은 성민호 과장과 은밀히 밀담을 주고받았다.

“성 과장, 이거 인도의 신경섭 사장이 오더 내린 거지?”

“네. 그때 부장님이랑 저랑 같이 만났잖아요.”

“그 양반이 실수할 사람이 아닌데, 왜 그랬을까?”

“인도라는 나라가 원래 쉽게 무역할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저 무능한 돌대가리한테 모든 걸 뒤집어씌워도 될까?”

“저 새끼가 계약서부터 모든 걸 작성했잖아요. 결국 저 새끼가 책임지게 될 거예요.”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면, 나도 경고 정도는 먹겠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에잉, 그때 신 사장한테 돈을 받아먹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야.”

“부장님도 참, 우리가 지금까지 신 사장한테 받아먹은 게 얼마인데요.”

“하긴. 우리 가장 큰 돈줄이 신 사장이니…….”

“그냥 내버려 두면 신 사장이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올 거예요.”

“나도 그건 아는데, T/T(현금 송금 방식, Telegraphic Transfer) 계약이라 신경이 쓰이는 거지. 막말로 얘기해서 신 사장이 무역 대금을 결제 못해주겠다고 나자빠지면 어떻게 할 건데?”

성 과장도 그 부분은 약간 걱정이 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요? 신 사장이 우리랑 연간 거래하는 금액이 얼마인데요.”

“그리고 말이야. 부대 비용도 꽤 많이 발생한 모양이야.”

“데머리지 비용(Demmurage Fee, 체화료)하고 스토리지 비용(Storage Fee, 컨테이너 보관료) 말인가요?”

“맞아. 아무래도 찜찜하단 말이야. 신용장을 못 연 것도 그렇고 말이야.”

“제가 그때 확인했는데, 신용장 한도가 꽉 찼더라고요.”

“수출면장[Export Permit]은 무슨 품목으로 끊었어?”

“닭고기로 끊었어요. 인보이스(Invoice)와 패킹 리스트(Packing List)도 마찬가지구요.”

고 부장은 순간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성 과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네, 나 몰래 신 사장하고 장난친 거 없지?”

“장, 장난이라니요? 부장님도 참. 저를 못 믿으십니까?”

순간, 성 과장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니면 그만이지, 지금 왜 큰 소리 치며 오버하는데?”

성 과장은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야 회사가 걱정돼서 그렇죠. 그리고 부장님도 그렇고요.”

하지만 말과 달리 성 과장의 왼손이 살짝 떨리는 게 고 부장의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지나쳐 버릴 만큼 미세한 동작이지만, 노련한 고 부장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수전증 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손은 왜 그렇게 떠는데?”

“아아~ 이거요? 그냥 버릇이에요.”

“버릇이라… 뭐, 그렇다 치지. 그나저나 성 과장, 강민혁 저놈이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면 모든 걸 불어버리지 않을까?”

성민호 과장도 사실 그 점을 제일 우려하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듯이 강민혁이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문제는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면 절대 안 된다는 점.

만약에 이번 일로 전면 감사를 받게 된다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전개될 것이 명약관화였다.

어떻게 해서든 이번 일은 조용히 묻어버려야만 했다.

“사실 저 같아도 불어버릴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성 과장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부장님,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그래, 좋은 생각이 있나?”

“우리가 늘 쓰던 방식을 조금 변경해서 말입니다. 먼저 강민혁, 저놈에게…….”

성민호 과장은 고인선 부장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단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란 말이지?”

“네. 그러면 부장님은 어찌 피해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제가 봤을 때,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알았어. 내가 박 상무님께 건의 한 번 해볼게.”



한편, 민혁은 업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30만 달러에 대한 근거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월 15일에 작성한 업무 노트에서 30만 달러에 대한 단서가 적혀 있는 것을 겨우 발견해 낼 수 있었다.

민혁은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



“강민혁 씨, 이리 좀 와봐.”

“네, 과장님.”

“민혁 씨도 인도에서 사업하고 있는 신경섭 사장 잘 알지?”

“그럼요. 저희 사무실에도 가끔 들르시잖아요.”

“이번에 신 사장님이 인도 첸나이에 있는 H 자동차 공장 식당에 닭고기 납품권을 획득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는데, 잘됐네요.”

“그런데 말이야… 그 양반이 우리나라에서 닭고기를 수입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네? 우리나라에서요?”

“왜? 우리나라에서 수입하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죠. 가격 경쟁력이 안 되잖아요. 인도라는 나라가 식품 수입에 대해 얼마나 까다롭게 구는데요. 더구나 닭은 그 나라에서 흔하지 않습니까?”

민혁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 과장의 태도는 더없이 강경했다.

“이 친구야, 우리의 신조 몰라? 바이어가 원하면 무조건 팔아야지, 뭘 이것저것 따지고 있어?”

“그 말씀은 맞지만, 굳이 우리나라에서 수입하려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H 자동차 공장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산 닭을 먹고 싶어 한다고 하더라고. 인도 닭은 작고 살이 퍽퍽해서 맛이 없다면서.”

“아하~ 우리나라 사람이 먹을 거라면 얘기가 되겠네요.”

성 과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책상 서랍에서 닭고기 수출 계약서를 꺼내서 민혁에게 건네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민혁 씨가 신 사장님을 만나서 계약서 사인 좀 받아와.”

“금액이 얼마인데요?”

“자그마치 30만 달러야.”

“네?! 정말요? 그럼 사인만 받으면 되나요?”

“아니지. 품의서도 써야 하고, 수출 관련 제반 업무는 다 맡아서 해야 해.”

“그럼… 제 실적이 되는 겁니까?”

“그래. 이번에는 내가 특별히 인심 썼다. 민혁 씨한테 넘겨줄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만약 민혁 씨가 싫다고 하면 정 대리나 조민수한테 넘겨줘야겠지. 시간 없으니까 빨리 결정하라고.”

민혁은 성 과장이 수출 실적을 넘겨준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었다.

이 인간은 평소에도 자신에게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따로 자신을 챙겨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웬일이지? 이 욕심 많은 놈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실적을 넘겨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목표 달성에 힘들어하던 민혁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덥석 물어버렸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고맙긴 뭘. 같은 팀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닭고기 업체를 잘 아는 데가 있으니까, 선적까지는 내가 책임질게. 민혁 씨는 서류 작업만 하면 돼.”

이건 그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꼴이었다.

진짜로 일이 쉽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그럼 저는 완전히 날로 먹는 건데요?”

“내가 민혁 씨를 예쁘게 봐서 그런 거니까,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라고.”

“알겠습니다. 당연히 사야지요.”



민혁은 바로 신경섭 사장을 만나 수출 계약서에 사인을 받았다.

그런데 품의서를 쓰다 보니 기존과는 다른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그 즉시, 성민호 과장에게 물었다.

“과장님, 거래 조건이 이게 맞나요?”

“왜? 문제 있어?”

“CIF 조건인 건 이해가 되는데, 신용장(L/C, Letter of Credit) 조건이 아니라 T/T(현금 송금 방식) 조건인데요?”

“으응~ 신용장 한도가 꽉 찼다고 하더라고. 부장님께서 구두 승인하셨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리고 고작 30만 달러밖에 안 하는데, 누가 L/C를 여나?”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성 과장의 속내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민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