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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마치 바퀴벌레와 사람을 섞어 두면 저런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물이었다.
가람은 일차적으로 그 혐오스러운 외형에 놀랐고, 다음으론 자신의 팔만 한 길이의 긴 더듬이에 소름이 끼쳤다.
몸은 분명 사람처럼 직립 보행을 하고 있었으나 그 외피는 피부가 아닌 키틴질이었고, 머리는 완전히 곤충의 그것이었다.
“키릭, 키륵.”
그중 하나가 갑자기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숲 곳곳에서 그것들이 마구 나타났다.
어림잡아 스무 마리는 넘어 보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것들은 처음 소리를 낸 놈의 울음소리를 따라 내었다.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질 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죽으면 더 좋고.’
흘려들었던 모르드레드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죽다니?
물론 겉으로 보기에도 별로 평화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것들이 나를 죽인다고? 내가 죽는다고? 죽어? 내가?
가람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산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솟아오른 힘일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가람의 순발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등에 멘 것이 배낭이 아니라 날개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갑자기 등 뒤에서 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안 돼! 마음속의 외침과는 달리, 가람은 이미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것들의 등에 곤충의 것을 몇 백 배 확대한 것 같은 날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가람이 아무리 나는 듯이 달린다고 해도, 실제로 나는 것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다.
결국 놈들은 가람을 앞질러 날아가 그 앞에 섰고, 가람은 포위당했다.
혹시 가방에 있는 음식 때문에 그런 걸까? 가람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가방에서 식량을 꺼내 마구 던졌다.
하지만 곤충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먹이가 먹이를 던지는 꼴이었다.
그것들은 잠시 가람이 던진 음식들에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곧 칼날 같은 앞다리를 앞세워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물이 없는 가람이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경찰도 없고, 행인도 없다.
산에서 바퀴벌레들의 밥이 될 상황인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르드레드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가람은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배낭을 들고 휘둘렀다. 가까이서 보니 더 징그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먹기 위해 이만큼이나 모여들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곤충 배 속이겠지.
“누가, 누가 좀! 누구 없어요?”
가람이 외치는 순간, 곤충 인간들이 달려들었다. 차라리 외치지 말걸! 가람은 후회하며 가방으로 최대한 몸을 방어했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죽으면 꿈에서 깰까? 아니면, 저승으로 갈까?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좋겠건만 튼튼한 정신은 쉽게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곤충에게 먹히다니!
“제발! 누가 좀! 악, 저리 가!”
가람이 외치는 사이 빈틈을 노린 곤충 인간이 재빨리 앞발을 휘둘렀다. 그 위력은 정말로 칼날 같아서 가람의 옷 한쪽이 슥 잘려 나갔다.
칼날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옷을 자르는 걸 본 가람의 다리에서 순간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건 실수였다.
“꺄아악!”
다리에 힘이 풀린 가람을 곤충 인간이 그대로 누르고 올라탔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가람의 위에 올라탄 곤충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가람은 순식간에 곤충 인간 떼에 깔려 버렸다.
진짜 이렇게 죽는구나. 모르드레드 개자식! 자신을 내리누른 무게에 가람은 조금씩 체념하고 있었다.
죽으면 꿈이었구나 하고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와앙!”
곤충들이 카착거리는 소음 틈으로 무언가, 곤충이 아닌 다른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다툼인가. 곤충도 나를 먹고 호랑이도 나를 먹고, 다 처먹어라 그래.
체념 속에서 중얼거리던 가람이 문득 깨달았다. 잠깐, 호랑이?
트리거였다.
“크르르!”
가람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 트리거는 앞발을 휘둘러 가람의 위에 있던 곤충 인간들을 단번에 쓸어버렸다. 순식간에 몸 위의 무게가 사라지자 가람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트리거가 후려친 곤충 인간들은 팔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었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그것들을 트리거는 마치 수수깡을 부수듯 박살 내고 찢어발기고 있었다.
“트리거?”
믿을 수 없는 기분에 가람이 얼떨떨하게 트리거를 불렀다. 트리거는 가람에게 등 돌린 채로 으르렁거리며 그 곤충 인간들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가람에게 더듬이를 세우던 놈마저 모습을 감추자, 그제야 트리거는 가람을 돌아보았다.
“엉망이군.”
가람의 얼굴은 눈물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혀를 찬 트리거는 핥아 주려다가 그랬다간 가람의 얼굴 가죽이 홀랑 벗겨질 거라는 생각에 꼬리 끝을 내밀었다.
“닦아.”
가람은 말없이 트리거의 두툼한 꼬리로 얼굴을 닦았다. 가방에 손수건도 있고 물티슈도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미처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긴장이 풀려 욱욱 우는 가람을, 트리거는 묵묵히 앉아 기다렸다.
“모르드레드라는 자의 능력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아서 들키지 않으려면 좀 멀리서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어. 늦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와 줘서 정말로 고맙……. 흐어엉!”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가람을 트리거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간간이 뺨에 제 얼굴을 부벼 위로해 주자 가람은 아예 트리거의 머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가람의 팔 사이로 삐져나온 트리거의 귀가 난감함을 숨기지 못하고 찡긋찡긋 움직였다.
가람이 진정한 것은 해가 거의 서산으로 넘어가는 차였다.
가람은 울면서도 딸꾹질을 해 가며 모르드레드의 험담과 패스를 찾으러 다니며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성토했다.
반은 딸꾹질, 반은 울음기에 묻힌 흐린 말들을 트리거는 불평 없이 듬직하게 앉아 들어 주었다.
“저, 고마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람이 부끄러워하며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이십 대 중반이 다 되어 가는 이 나이에 아이처럼 펑펑 울어 버렸다는 부끄러움에 그녀의 뺨은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트리거는 실컷 울었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그렇군.’ 하고 대답한 후, 가람이 다른 화제에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럼 오늘은 네 집으로 못 가겠군.”
“네에, 오늘 아침에 갔었으니까요.”
“적어도 이틀은 이쪽에서 묵어야겠군. 음, 갈 방향은 정해졌나?”
그 말에 가람은 손등을 보았다. 원래 단 하나의 지침만 있어야 할 문신에 스무 개가 넘어 보이는 지침들이 빼곡히 솟아 있었다.
마치 뾰족한 톱니바퀴 같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게 패스가 충전되는 상태인가 보다.
자세히 보니 수많은 지침 중 하나가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는데, 아마 이것들이 차츰 흐려지고 마침내 하나만 남게 되면 그때 다시 패스를 찾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충전 상태와 비충전 상태를 분간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모르드레드에게 많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정보를 캐내는 건데. 가람은 후회했지만 결국 이 시점에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한탄이었다.
게다가 바늘이 하루에 하나가 줄어드는지, 두 개가 줄어드는지도 모르는 마당이니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지는 당연히 충전이 끝나 봐야 알 수 있고.
“아뇨. 못 가요.”
가람이 울면서 어느 정도 사정을 이야기한 것도 있고, 그가 따라다니며 바람결에 주워들은 것도 있어서 트리거는 가람의 사정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 모르드레드에게 가람이 이계인임을 들켰을 때는 앞발로 머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쉽게 수긍하면 어떡해, 이 아가씨야! 하고 말이다. 정말, 여러모로 이 여자는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보다시피 나는 동물이라 도시로 못 들어가.”
“네.”
“그러니까, 내가 도시 어귀로 너를 태워다 주면, 거기서 그 가방에 든 물건들을 팔아. 그리고 여관에 묵을 돈을 만들어서 최대한 깨끗하고 안전한 여관에서 이틀을 보내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틀마다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정작 중요할 때는 못 가지 않나? 이틀 동안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을 때가 아니면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 도시에 있을 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는 것도 좋겠지.”
“저기, 그냥 트리거가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노숙을 한다고 해도 그편이 더 좋았다. 가람이 간절히 바라보자 트리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호랑이의 얼굴이었지만 워낙 표정이 풍부해서 알아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트리거도 험한 일을 당해 불안할 게 분명한 가람과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만월이었다. 솔직히 트리거는 지금도 가람이 매우 맛있어 보였다.
“안 돼.”
“왜요? 나 성가시지 않게 잘 있을게요. 네?”
“이참에 도시를 좀 돌아봐. 언젠가는 가야 하잖아? 그리고 나에게도 사정이 있어. 나도 같이 가 주고 싶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 미안해.”
트리거의 미안하다는 말에 가람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졸라 봤자 그를 곤란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다시 볼 수 있죠?”
“음, 아마도.”
짧게 긍정한 트리거는 가람에게 자세한 안내 사항을 전했다.
경비병에게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어떤 여관을 골라야 하는지, 제일 먼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의 조언이었다.
가람은 몸도 정신도 거의 고갈되어 있었지만 열심히 트리거의 말을 머리에 담았다.
인간들이 사는 도시에 갈 수 없는 트리거가 어떻게 이리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물을 체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서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자, 이제 가자. 타.”
두세 번, 트리거에게 안내 사항을 들은 가람은 오랜만에 트리거의 등에 올라탔다. 가람이 제대로 등에 탄 것을 확인한 트리거는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달리는 대신 걷기로 했다.
그렇게 걸으며 트리거는 자신이 했던 충고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경비병이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동대륙 한국 출신이요.”
“목적지는?”
“아버지가 계신 칼츠버그 영지요.”
“여관은 어떤 여관?”
“1골드 이하, 10실버 이상의 고급 여관에 묵을 것!”
“이유는?”
“너무 비싼 데 묵으면 조사받을 수 있고, 너무 싼 곳에 여자 혼자 묵으면 불량배와 얽힐 수 있으니까요.”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그래, 잘했어. 만약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싸우거나 소란을 일으키면 안 돼. 시선을 받아서도.”
“네.”
“그리고,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앞으로는 응이라고 해. 호랑이한테 존댓말하는 것도 좀 우습지 않아?”
“안 우스워요.”
가람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트리거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은연중에 상대가 존중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맹수의 제왕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가람이 생각하는 동안 트리거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우스워. 그냥, 격식 차리지 않고 말했으면 좋겠어.”
“응.”
“적응이 빠르구나.”
트리거의 털과 따듯한 온기 덕분에 어느 정도 자신의 넉살을 찾은 가람이 헤헤 하고 웃었다. 트리거는 피식 웃고는 길 위에 멈춰 섰다.
“자, 이쪽으로 쭉 걸으면 돼.”
마치 바퀴벌레와 사람을 섞어 두면 저런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물이었다.
가람은 일차적으로 그 혐오스러운 외형에 놀랐고, 다음으론 자신의 팔만 한 길이의 긴 더듬이에 소름이 끼쳤다.
몸은 분명 사람처럼 직립 보행을 하고 있었으나 그 외피는 피부가 아닌 키틴질이었고, 머리는 완전히 곤충의 그것이었다.
“키릭, 키륵.”
그중 하나가 갑자기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숲 곳곳에서 그것들이 마구 나타났다.
어림잡아 스무 마리는 넘어 보였다. 모습을 드러낸 그것들은 처음 소리를 낸 놈의 울음소리를 따라 내었다.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질 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죽으면 더 좋고.’
흘려들었던 모르드레드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죽다니?
물론 겉으로 보기에도 별로 평화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저것들이 나를 죽인다고? 내가 죽는다고? 죽어? 내가?
가람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산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솟아오른 힘일까. 산비탈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가람의 순발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등에 멘 것이 배낭이 아니라 날개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갑자기 등 뒤에서 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안 돼! 마음속의 외침과는 달리, 가람은 이미 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것들의 등에 곤충의 것을 몇 백 배 확대한 것 같은 날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가람이 아무리 나는 듯이 달린다고 해도, 실제로 나는 것보다는 느릴 수밖에 없다.
결국 놈들은 가람을 앞질러 날아가 그 앞에 섰고, 가람은 포위당했다.
혹시 가방에 있는 음식 때문에 그런 걸까? 가람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가방에서 식량을 꺼내 마구 던졌다.
하지만 곤충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먹이가 먹이를 던지는 꼴이었다.
그것들은 잠시 가람이 던진 음식들에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곧 칼날 같은 앞다리를 앞세워 천천히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눈물이 없는 가람이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경찰도 없고, 행인도 없다.
산에서 바퀴벌레들의 밥이 될 상황인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르드레드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지 않았던가.
가람은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둔 채 배낭을 들고 휘둘렀다. 가까이서 보니 더 징그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먹기 위해 이만큼이나 모여들었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다.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곤충 배 속이겠지.
“누가, 누가 좀! 누구 없어요?”
가람이 외치는 순간, 곤충 인간들이 달려들었다. 차라리 외치지 말걸! 가람은 후회하며 가방으로 최대한 몸을 방어했다.
이렇게, 이렇게 죽는 건가? 죽으면 꿈에서 깰까? 아니면, 저승으로 갈까?
차라리 정신을 잃어버렸으면 좋겠건만 튼튼한 정신은 쉽게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곤충에게 먹히다니!
“제발! 누가 좀! 악, 저리 가!”
가람이 외치는 사이 빈틈을 노린 곤충 인간이 재빨리 앞발을 휘둘렀다. 그 위력은 정말로 칼날 같아서 가람의 옷 한쪽이 슥 잘려 나갔다.
칼날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짜로 옷을 자르는 걸 본 가람의 다리에서 순간 힘이 풀렸다. 그리고 그건 실수였다.
“꺄아악!”
다리에 힘이 풀린 가람을 곤충 인간이 그대로 누르고 올라탔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가람의 위에 올라탄 곤충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가람은 순식간에 곤충 인간 떼에 깔려 버렸다.
진짜 이렇게 죽는구나. 모르드레드 개자식! 자신을 내리누른 무게에 가람은 조금씩 체념하고 있었다.
죽으면 꿈이었구나 하고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크와앙!”
곤충들이 카착거리는 소음 틈으로 무언가, 곤충이 아닌 다른 동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다툼인가. 곤충도 나를 먹고 호랑이도 나를 먹고, 다 처먹어라 그래.
체념 속에서 중얼거리던 가람이 문득 깨달았다. 잠깐, 호랑이?
트리거였다.
“크르르!”
가람이 그를 알아보는 순간, 트리거는 앞발을 휘둘러 가람의 위에 있던 곤충 인간들을 단번에 쓸어버렸다. 순식간에 몸 위의 무게가 사라지자 가람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트리거가 후려친 곤충 인간들은 팔이 떨어져 나간 것도 있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었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그것들을 트리거는 마치 수수깡을 부수듯 박살 내고 찢어발기고 있었다.
“트리거?”
믿을 수 없는 기분에 가람이 얼떨떨하게 트리거를 불렀다. 트리거는 가람에게 등 돌린 채로 으르렁거리며 그 곤충 인간들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마지막까지 가람에게 더듬이를 세우던 놈마저 모습을 감추자, 그제야 트리거는 가람을 돌아보았다.
“엉망이군.”
가람의 얼굴은 눈물과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혀를 찬 트리거는 핥아 주려다가 그랬다간 가람의 얼굴 가죽이 홀랑 벗겨질 거라는 생각에 꼬리 끝을 내밀었다.
“닦아.”
가람은 말없이 트리거의 두툼한 꼬리로 얼굴을 닦았다. 가방에 손수건도 있고 물티슈도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미처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긴장이 풀려 욱욱 우는 가람을, 트리거는 묵묵히 앉아 기다렸다.
“모르드레드라는 자의 능력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아서 들키지 않으려면 좀 멀리서 따라오는 수밖에 없었어. 늦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와 줘서 정말로 고맙……. 흐어엉!”
다시 울음을 터뜨리는 가람을 트리거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간간이 뺨에 제 얼굴을 부벼 위로해 주자 가람은 아예 트리거의 머리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가람의 팔 사이로 삐져나온 트리거의 귀가 난감함을 숨기지 못하고 찡긋찡긋 움직였다.
가람이 진정한 것은 해가 거의 서산으로 넘어가는 차였다.
가람은 울면서도 딸꾹질을 해 가며 모르드레드의 험담과 패스를 찾으러 다니며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그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성토했다.
반은 딸꾹질, 반은 울음기에 묻힌 흐린 말들을 트리거는 불평 없이 듬직하게 앉아 들어 주었다.
“저, 고마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람이 부끄러워하며 감사 인사를 건네었다.
이십 대 중반이 다 되어 가는 이 나이에 아이처럼 펑펑 울어 버렸다는 부끄러움에 그녀의 뺨은 미미하게 붉어져 있었다.
트리거는 실컷 울었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그렇군.’ 하고 대답한 후, 가람이 다른 화제에 집중하도록 도왔다.
“그럼 오늘은 네 집으로 못 가겠군.”
“네에, 오늘 아침에 갔었으니까요.”
“적어도 이틀은 이쪽에서 묵어야겠군. 음, 갈 방향은 정해졌나?”
그 말에 가람은 손등을 보았다. 원래 단 하나의 지침만 있어야 할 문신에 스무 개가 넘어 보이는 지침들이 빼곡히 솟아 있었다.
마치 뾰족한 톱니바퀴 같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게 패스가 충전되는 상태인가 보다.
자세히 보니 수많은 지침 중 하나가 천천히 흐려지고 있었는데, 아마 이것들이 차츰 흐려지고 마침내 하나만 남게 되면 그때 다시 패스를 찾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충전 상태와 비충전 상태를 분간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모르드레드에게 많은 설명을 듣긴 했지만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정보를 캐내는 건데. 가람은 후회했지만 결국 이 시점에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한탄이었다.
게다가 바늘이 하루에 하나가 줄어드는지, 두 개가 줄어드는지도 모르는 마당이니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지는 당연히 충전이 끝나 봐야 알 수 있고.
“아뇨. 못 가요.”
가람이 울면서 어느 정도 사정을 이야기한 것도 있고, 그가 따라다니며 바람결에 주워들은 것도 있어서 트리거는 가람의 사정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 모르드레드에게 가람이 이계인임을 들켰을 때는 앞발로 머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쉽게 수긍하면 어떡해, 이 아가씨야! 하고 말이다. 정말, 여러모로 이 여자는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요?”
“보다시피 나는 동물이라 도시로 못 들어가.”
“네.”
“그러니까, 내가 도시 어귀로 너를 태워다 주면, 거기서 그 가방에 든 물건들을 팔아. 그리고 여관에 묵을 돈을 만들어서 최대한 깨끗하고 안전한 여관에서 이틀을 보내는 거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틀마다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정작 중요할 때는 못 가지 않나? 이틀 동안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을 때가 아니면 말이다. 그러니 이번에 도시에 있을 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두는 것도 좋겠지.”
“저기, 그냥 트리거가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노숙을 한다고 해도 그편이 더 좋았다. 가람이 간절히 바라보자 트리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호랑이의 얼굴이었지만 워낙 표정이 풍부해서 알아보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트리거도 험한 일을 당해 불안할 게 분명한 가람과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만월이었다. 솔직히 트리거는 지금도 가람이 매우 맛있어 보였다.
“안 돼.”
“왜요? 나 성가시지 않게 잘 있을게요. 네?”
“이참에 도시를 좀 돌아봐. 언젠가는 가야 하잖아? 그리고 나에게도 사정이 있어. 나도 같이 가 주고 싶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 미안해.”
트리거의 미안하다는 말에 가람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졸라 봤자 그를 곤란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다시 볼 수 있죠?”
“음, 아마도.”
짧게 긍정한 트리거는 가람에게 자세한 안내 사항을 전했다.
경비병에게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어떤 여관을 골라야 하는지, 제일 먼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등의 조언이었다.
가람은 몸도 정신도 거의 고갈되어 있었지만 열심히 트리거의 말을 머리에 담았다.
인간들이 사는 도시에 갈 수 없는 트리거가 어떻게 이리 상세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 궁금증이 일었으나 물을 체력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아서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자, 이제 가자. 타.”
두세 번, 트리거에게 안내 사항을 들은 가람은 오랜만에 트리거의 등에 올라탔다. 가람이 제대로 등에 탄 것을 확인한 트리거는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에, 달리는 대신 걷기로 했다.
그렇게 걸으며 트리거는 자신이 했던 충고들을 다시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경비병이 어디 출신이냐고 물으면?”
“동대륙 한국 출신이요.”
“목적지는?”
“아버지가 계신 칼츠버그 영지요.”
“여관은 어떤 여관?”
“1골드 이하, 10실버 이상의 고급 여관에 묵을 것!”
“이유는?”
“너무 비싼 데 묵으면 조사받을 수 있고, 너무 싼 곳에 여자 혼자 묵으면 불량배와 얽힐 수 있으니까요.”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그래, 잘했어. 만약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싸우거나 소란을 일으키면 안 돼. 시선을 받아서도.”
“네.”
“그리고, 그냥 편하게 말해도 돼. 앞으로는 응이라고 해. 호랑이한테 존댓말하는 것도 좀 우습지 않아?”
“안 우스워요.”
가람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트리거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은연중에 상대가 존중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맹수의 제왕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가람이 생각하는 동안 트리거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우스워. 그냥, 격식 차리지 않고 말했으면 좋겠어.”
“응.”
“적응이 빠르구나.”
트리거의 털과 따듯한 온기 덕분에 어느 정도 자신의 넉살을 찾은 가람이 헤헤 하고 웃었다. 트리거는 피식 웃고는 길 위에 멈춰 섰다.
“자, 이쪽으로 쭉 걸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