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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나의 신께서는

넘실대는 황금 잔을 받쳐 든 채

가장 빛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계신다

대지 위에 방울방울 흘러 뿌린 적포도주

그 무수한 피들이여



— Julius Averade, ‘붉은 축제’中



1. 교황을 죽일 것이다


내게도, 에시엣이 모든 것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퍽 독실한 신자였다. 인생에 딱히 감사할 것이 많지 않음에도 그랬다. 미사를 지루해하는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매주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것도, 늘 가난해서 내일 빵을 먹을 수 있을까 걱정해야 하는 것도 괜찮았다. 나는 내게 아직 어머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께서 축복을 내려 주셨다고 생각했다.

두 눈으로 보는 세상 모든 것이 신의 사랑이었다. 내게는 바람 하나, 구름 한 점 모두 에시엣이 만든 위대한 세상의 일부로 보였다.

그가 내 어머니를 앗아 가기 전까지는.

그날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참 화창한 날이었다는 인상이 먼저 찾아왔다. 벚꽃 잎이 바람에 하느작대고, 통통한 꿀벌들이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꿀을 따는 것을 예사로 볼 수 있었다. 하늘빛은 파랗고 맑았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날을 일컬어 에시엣의 은혜를 입었다고 표현했다. 봄은 신의 입맞춤을 받아 만물이 꿈틀거리며 소생하는 때였다.

그날. 그 생명력이 넘치는 봄날.

내 어미의 목숨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꺼졌다.

눈을 감으면 매번 선명했다. 반듯하게 쌓인 장작더미에 올려진 내 어미의 앙상하고 흰 발. 횃불을 들고 다가오는 집행인이 보이자 그 발은 불안하게 떨며 춤을 추었다.

내 어미는 연약한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어느 날 닥쳐온 불행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용기조차 없었다. 가여운 내 어미는 나무에 불이 붙는 그 순간까지 겁에 차 벌벌 떨었다.

그 적나라한 두려움은 마치 환상과도 같은 죽음의 순간을 생생한 현실에 꽉 매어 두었다. 어르듯 장작더미를 쓰다듬다 순식간에 솟아올라 어미를 사방에서 삼켜 버린 불꽃을 보면서, 나는 단 한 순간도 저것이 가짜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화염에 닿은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입을 벌렸으나 비명마저 불덩이 안에 파묻힌 내 어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녀가 통째로 타오른다!”

“정의는 죽지 않아!”

“신께서 죄를 단죄하신다!”

군중의 외침이 송곳처럼 귓구멍을 쑤셨다. 말로도 몸이 뒤틀릴 만큼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러다가 귀가 망가지지는 않을까. 계속 이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는, 양 귀에서 피가 고여 흘러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손톱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내 어미가 죽어 가는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았다. 기억하는 것은 눈으로 본 것에 그치지 않는다. 코에 닿는 장작불의 매캐한 내음과 그 안에 섞인 인체가 타는 냄새, 내 귀를 내내 괴롭히던 타닥거리는 소리와 날것 그대로 토해 내는 군중의 광기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들의 마녀 처단은 끝이 났다. 불이 꺼지자, 갈색이었던 장작들이 재로 화한 채 형체도 식별할 수 없는 내 어미의 시신과 섞여 덩어리 같은 것이 보였다.

사형 집행인들이 부산스럽게 처형대를 내리고, 나는 멍하니 주저앉은 채 어느새 구름이 죄 사라진 지평선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의 유일한 가족이던 어미가 죽어, 나는 갈 곳도 할 것도 없어진 처지였다.

“…….”

이제는 날 둘러싼 군중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한창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그들은 내 어미가 완전히 죽자, 흥미가 떨어졌는지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직 나만이 폐허 안에 주저앉은 채 풀로 붙인 듯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 달 전에 정확히 이 자리에서 죽은 내 이웃 세드릭의 누이 엘리제를 떠올렸다. 엘리제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고 난 후, 세드릭이 이와 같이 광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당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다가오지 마.’

‘세드릭?’

‘나는 마녀의 가족이야. 괜히 가까이 와서 대화하고 어울리다가는 같이 오해받을 거야.’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는 내 말을 단번에 끊었다.



‘난 내일 여기를 떠날 거야. 언젠가 살아서 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그때는 알은척할게.’



단호하게 말한 세드릭은 고개를 돌려 날 외면했고, 더 이상은 내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다음 날 정말로 영영 사라졌다.

이제야 나는 당시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나와 그가 다른 점은, 이미 성년이어서 자신의 몸을 홀로 건사할 수 있는 그와 달리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돌려 문득 동쪽을 바라본 나는, 이 장소에 나 혼자만이 남아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을 하러 왔는지는 몰라도,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이들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 두 명의 젊은 남자 사제가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기이해 보여 힐끔거리며 관찰하던 나는, 우발적으로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제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혹시 그들이 나까지 잡아 죽이려나 싶어,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 전부였던 어미가 죽었음에도, 우습게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달아나 봤자 독 안에 든 쥐.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내 앞에 도달할 때까지 그저 몸을 떨며 그들의 처분을 기다렸다.

“어린아이가 하나 남았군.”

“가여운 존재지. 하필이면 마녀의 자식이었다니.”

키가 큰 젊은 사제가 덧붙였다.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힌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텅 비었던 하늘이 그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괜찮으냐?”

그에게서 몹시 측은해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마주한 눈동자는 놀랍게도 매우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거짓 없는 동정이었다.

“…….”

나는 이자가 품은 얄팍한 호의가, 현재로서는 내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올라야 할 동아줄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내면 돌아오는 것은 내 어미가 맞은 죽음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자명했다. 나는 마녀에게 당한 가련한 희생양이면서도, 정작 마녀의 잔재는 남지 않은 순수한 영혼이어야 했다.

“…….”

나는 속 깊은 곳에서 역류하는 역겨움과 증오심을 침과 함께 꼴깍 삼켰다. 눈을 미움 대신 눈물로 가득 채우고, 아래에서 위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목소리는 겁과 두려움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것처럼 들리게 했다.

“살려 주세요…….”

이 순간 이들의 눈에 비친 나는 한낱 에시엣의 어린 양. 무지하고, 한없이 순진하여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길로 이끌고 싶게 만드는 존재.

“저 마녀에게 사로잡혀 있던 나를 구원해 주세요…….”

나는 사제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며 애원했다. 어떻게 해서든 이들의 눈에 불쌍해 보여야 했다. 다행히 새파랗게 젊은 사제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는, 내가 고작 일곱 살짜리의 작은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저런, 가여워라.”

“제발……. 저는 이제 갈 곳이 없어요.”

“그러니? 그럼 우리를 따라 신전으로 갈래?”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내가 바라 마지않던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마치 사막에서 물을 찾은 방랑자처럼 정신없이 그를 반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데살 경전에는 에시엣을 목동, 신도들을 양에 비유한 내용이 있었다. 목동이 양 떼를 목장으로 인도하듯, 에시엣이 어리석은 신도들을 구원하고 자신의 세계로 데려가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그들에겐 나를 구원하는 것과 같았다.

“감사합니다! 흑……. 감사합니다! 에시엣 만세!”

나는 애쓴 끝에 겨우 눈가에 눈물을 매다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는지 나를 ‘구원’한 키가 큰 사제와, 그 옆에 있던 사제의 얼굴에 동시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나로서는, 내 어미가 아스러진 곳에서 내 입술로 에시엣을 찬양한 건 몹시 속이 뒤틀리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보아도 과연 내 어미도 그리 여겨 줄지 자신이 없었다.

나는 불씨를 머금고 풀풀 날리는 잿더미와, 그 안에 부스러져 파묻힌 어미의 참혹한 시신을 차라리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이런, 눈을 감아 버리네. 떨고 있는 걸 보니, 그동안 마녀가 많이 무서웠나 보구나.”

남자의 부드러운 손이 군중의 칼날 같은 적의와 정반대로,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두려워하지 마. 눈을 뜨고 나를 보렴. 나는…….”

비록 뭐 하나 잘 알지도 못하고 지껄이는 말이긴 하지만, 이자를 따르기로 한 이상 우선은 말을 잘 들어야겠지. 나는 마치 홀린 듯 속삭이는 남자의 말에 천천히 눈을 떴다.

“…….”

아. 내 눈앞에 비친 것은 한창 사제 서품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강당의 정경이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나를 비롯해 오늘 사제의 이름을 받는 이들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묵상을 하며 서품되기 전에 신께 신앙 고백을 하는 시간이지만, 눈을 감은 이들이 각자 무슨 생각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나조차도 부질없는 옛 기억에 지금 서 있는 장소를 잊을 정도로 몸을 흠뻑 담갔다 빠져나왔으니.

“이제 눈을 뜨십시오.”

옆에 있던 이들이 한두 명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치렁치렁한 예복을 걸친 대주교가 팔을 옆으로 넓게 벌렸다.

“그럼 이제부터, 서품식을 거행하겠습니다.”

대주교의 짧은 축복 기도가 끝난 후, 마침내 서품이 시작되었다. 녹색의 성의를 걸쳐 입은 예비 사제들이 일렬로 서서 맹세를 하고, 사제로 축성을 받았다. 예비 사제들의 자질을 간단히 검사한 대주교가 공식적으로 임명을 의미하는 말을 하면 그때부터 그들은 사제였다.

한 발 한 발 규율에 정해진 대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며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허공에 두 손을 모은 채 대주교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섰다.

“카야 맥노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