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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원사 4화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4)


“어어… 터진다, 터진다!”

“우니버스 님, 조심하세요.”

“와!”

우리는 길을 잇는 강 위의 돌다리에 서서 폭죽을 마구 터뜨렸다. 하늘에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의 불꽃이 하트 모양으로 예쁘게 빛났다. 그 불빛에 내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마치 불꽃놀이를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여태 해 본 불꽃놀이 중 가장 아름답고 냄새도 안 나고 무엇보다 감성적이었다.

작은 폭죽이 기력을 다해서 골드찬에게 하나를 더 달라고 손을 내밀었는데, 그는 언제부터인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손을 흔들자 그제야 아차 하고 전보다 더 큰 폭죽을 쥐여 줬다. 이번엔 어떤 무늬가 나오려나.

폭죽을 한 손에 들고 팔을 높이 치켜들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높게 쏘아 올랐다. 목이 꺾일 듯 고개를 들어 동그란 불꽃을 바라보았다. 환한 빛이 공중에서 터지며 커다란 글씨를 만들었다. 나는 감상할 새도 없이 눈을 찌푸렸다. 이건 그냥 폭죽이 아니었다.

“저게 뭐냐… 나랑… 결…혼…해 줄래?”

드문드문 터지는 불꽃이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완벽한 프러포즈 문구를 만들어 냈다. 글씨는 금방 사라지지 않고 공중에 띄워진 채 감미로운 멜로디가 나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건진 모르겠지만 발가벗은 아기 천사들이 트럼펫을 불며 글씨 주위를 빙빙 돌았다. 골드찬도 당황한 듯 내 폭죽을 뺏어 들며 말했다.

“잘, 잘못 샀나 봐요! 랜덤 세트라서 저런 게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근데 진짜 멋있다. 제대로 분위기 잡고 하면 누구 하나 울겠는데.”

“누구요?”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나중에 프러포즈하고 싶은 사람?”

“진짜…… 당돌하시네요.”

“뭐래. 넌 조촐한 게 좋아?”

골드찬은 내 말에 검지를 입으로 가져다 대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가만 보면 의외로 되게 진중한 성격이라니까. 생각보다 일찍 고민이 끝난 모양인지 그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튕긴 손가락에선 미약하게 도깨비불이 일었다.

“전 다 좋아요. 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요.”

“어른스럽네. 손가락 좀 빌려줘.”

“엇…….”

골드찬의 손목을 붙잡고 아직 남아 있는 불에 작은 폭죽을 갖다 대니 금세 심지 끝이 타들어 간다. 잡은 골드찬의 손목에서 두근두근 뛰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작은 거에도 잘 놀라고, 가끔 거만해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볼수록 귀여운 아이 같았다.

이번 폭죽은 멀리 나가지 않고 노란 불꽃이 근처에 파바박 튀었다. 사진 찍기 딱 좋아 보이네. 아까 커플들이 들고 있었던 폭죽과 같은 종류였다. 돌다리 난간에 팔을 걸쳤더니 밝은 빛이 프스스 소리를 내며 강물로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골드찬도 나와 같이 폭죽을 든 채 강물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골드찬.”

“네?”

“사진 찍어 줄게.”

“저를요? 왜요?”

“왜긴. 지금 풍경 예쁘잖아. 불꽃 사그라지기 전에 한 장 찍어 줄게. 여기 앉아 봐. 나 사진 잘 찍어. 예전에 여자 친구들 많이 찍어 줬었거든.”

“……그 발언은 조금.”

“뭐?”

“……아니에요. 찍어 주세요.”

골드찬은 돌다리의 기둥을 잡고 강 쪽으로 다리를 달랑 내리며 앉았다. 옆모습도 예술이네. 오똑 선 콧날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했다. 잠시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 입가를 바라보았다.

어,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발갛던 입가가 새하얘졌다. 아마 버프 시간이 지나면 자국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두고두고 보면서 웃을 수 있었는데 진짜 아깝네. 다음에 또 가자고 해야지. 내가 사진을 안 찍고 가만히 바라보자 고개를 든 골드찬이 방긋대며 불꽃을 동그랗게 흔들었다.

“지금 딱 좋다. 그대로 있어 봐.”

“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 대신 맑은 물방울 소리가 도르륵 굴러가듯 울렸다. 노란 불꽃에 맑은 바다 색깔의 머리끝이 살짝 물든 골드찬의 사진은 화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잘 나왔다. 나중에 보내 줘야지.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엄청 잘 나왔어.”

골드찬은 ‘사진에 애정을 담으면 잘 나온다던데……’ 하고 뒷말을 흐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니버스 님도 찍어 줄게요.”

“괜찮아, 나는 안 찍어도 돼.”

“그러지 말고 앉아 보세요. 보여 줄 거 있어요.”

골드찬이 내 팔을 끌어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앉게 된 나는 돌기둥을 꽉 쥐고 조심스럽게 다리를 밑으로 뻗었다. 이래서 안 한다고 한 건데……. 나는 고소 공포증이 있었다. 아무리 게임이어도 떨어지면 아프겠지…… 내가 고통 감도를 낮춰뒀던가. 앉아서 내려다보는 강물은 어둑하고 깊어 보여서 더욱 걱정되었다. 안전벨트라도 있으면 괜찮을 텐데. 분주하게 움직이던 골드찬이 밝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우니버스 님, 여기 보세요.”

“와…… 뭐야?”

슬쩍 웃은 그가 손바닥을 펼쳐 바람을 후 불었다. 작은 반짝이들이 날아와 미세하게 진동하며 내 주위를 아늑하게 밝혔다. 마치 내가 달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진 효과예요. 우니버스 님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요.”

아까 꼼지락거리던 게 이 효과를 산 건가 보다. 사진 한 장 찍는데 아이템을 사다니. 나 같은 쩌리 초보자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왕 나 찍어 준다고 산 거라니까 굳은 입꼬리를 자연스레 올렸다. 사진 찍는 건 언제나 어색했다.

“우니버스 님, 더 활짝 웃어 보세요.”

“웃은 건데.”

“자, 이것도 들어요.”

웃었는데 웃으라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민망한지 골드찬은 모를 거다. 내 표정을 보고 무언가 고민하던 골드찬이 얇고 긴 폭죽 하나에 불을 붙여 건넸다. 지금 내 주변을 맴도는 효과와 정말 잘 어울리는 폭죽이었다.

이러다 진짜 인생 사진 나오는 거 아니야? 현실에서 친구들과 사진 찍을 때 잘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권우주, 네가 앞으로 가!’, ‘아이씨, 나 권우주 옆에 안 설래’, ‘권우주! 얼굴 몰래 뒤로 빼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으니까. 격한 말이 오가는 곳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나올 리가 없었다. 물론 얼굴을 일부러 뒤로 뺀 적도 없고.

골드찬은 그제야 내 모습을 보고 흡족한지 손가락을 기역과 니은 모양으로 겹쳐 구도를 잡았다. 나는 창을 띄워서 찍었는데, 그는 제스처를 설정해 둔 것 같았다.

“찍을게요.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각하면서 더 웃어 보세요.”

내가 그런 게 어딨어. 여자 친구랑 헤어진 지도 오래됐는데. 잠깐 표정이 퉁명스러워질 뻔했지만, 골드찬을 바라보고 있자니 아까의 붉은 입가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좋아요? 진짜 찍을게요.”

“응.”

“하나, 둘, 셋.”

사진이 찍히면서 골드찬이 만든 사각형 안에서 약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나는 놀라 한쪽 눈을 감았다. 신경 써서 때깔 나게 찍어 주는데 눈 감은 거 아닌지 모르겠다. 돌다리 밑으로 달랑거리는 다리를 접으며 빠르게 일어섰다. 찍은 사진을 빤히 보고 있는 골드찬에게 좀 보여 달라고 하자, 왠지 굳은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손가락으로 사진을 쭉 늘려 보여 주었다.

“생각보다 잘 나왔네. 네가 효과 사 줘서 그런가 보다.”

“우니버스 님이랑 잘 어울려요.”

예상한 대로 한쪽 눈은 감겨 있었지만, 놀라서가 아니라 윙크한 모양새로 감겨 보여서 괜찮았다. 거기에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는 내 모습은 살짝 능글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사진으로 보니까 훨씬 더 그림 같았다. 오묘한 보라색 머리를 한 나는 내가 아닌 그림 속의 주인공 같았다. 감성적인 제목을 지어 보자면…… 외눈박이 보라돌이?

……제목 짓는 센스는 여전히 최악인 것 같다. 입 밖으로 말 안 하길 잘했다. 이상한 제목 대신 아무 이야기나 곁들이자면 마을 축제에서 만난 꼬마 도깨비와 몰래 빠져나온 주인공 같은 느낌. 아무튼 그런 느낌의 사진이었다.

갑자기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친구들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의외로 감성적인 것들을 좋아한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하진 못해도 달달한 사랑의 시를 읽는 것은 좋아하고, SF 영화를 좋아할 것 같지만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매번 친구들과 영화를 보는 무리가 갈리곤 했다.

골드찬은 내 사진 모서리에 있는 작은 별을 눌렀다. 즐겨찾기 버튼이었다. 나처럼 나중에 주려고 하려나 보다. 사진 받으면 핸드폰 배경으로 해 둬야지. 나는 그가 사진첩을 닫는 것까지 지켜보다 뜬금없이 오늘은 종일 놀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일 아침에 새싹에 줄 많은 양의 물을 미리 떠 놨어야 했는데 연어 스테이크에 푹 빠져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 번에 다 심은 건 너무 오버였나. 레벨이 오르면 천천히 심을걸. 이제 와서 조금 후회가 되었다. 골드찬이 준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고 그 많은 양에 다 뿌리려면 최소 세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졸졸 흐르는 강 앞에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건 물뿌리개를 놓고 왔다는 의미였다.

저녁도 먹고, 하고 싶은 불꽃놀이도 했겠다. 슬슬 작업하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현실에서 저녁도 챙겨 먹어야 하는데 지금은 이 기분 좋은 포만감을 더 느끼고 싶었다. 나는 꽉 찬 HP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네. 우니버스 님, 피온 언제까지 할 거예요?”

“가서 새싹만 잠깐 보고 끄려고. 물 주는 건 내일 할래.”

“벌써요? 아직 10시도 안 됐는데…….”

아, 맞다. 골드찬은 청소년이라 10시까지밖에 못 하겠구나.

성인이 된 지 오래라 그런 건 기억에도 안 남아 있었다. 시간을 힐끗 보니 이제 막 8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의자도 없는 정원에 앉아서 두 시간 동안 뭘 하느냔 말이다. 레벨이 낮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할 것도 없잖아.”

내 말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골드찬이 밝은 목소리를 냈다. 머리 위에 커다란 별이 뜰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야참 드실래요? 현실에선 이 시간에 먹기 좀 그렇잖아요. 제가 만들어서 정원으로 가져갈게요.”

난 이 시간에도 잘만 먹는데…….

아무래도 골드찬은 어머니가 늦은 저녁은 못 먹게 하는 것 같았다. 한창 클 때 같은데 조금 안타깝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이렇게나마 금수저의 생활을 엿보는 느낌이 났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는 돈 쓰는 거 하나도 없으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싱글벙글한 골드찬은 텔레포트를 써 집으로 이동했고, 나는 강가를 따라서 천천히 정원으로 돌아왔다. 밭이 멀쩡한 걸 보아하니 다행히 천재영재는 발도 들이지 않은 듯했다.

아이템 창에서 꼬질꼬질한 토시를 다시 꺼내서 끼고 흙 사이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잡았다. 많진 않지만 가끔 생기는 해충을 정리해 줘야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HP가 모자랄 땐 이 벌레를 구워 먹을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입에 넣을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서 잠과 소중한 열매로 때운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손안에서 바둥거리는 벌레를 먹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해충 잡기 스킬이 +1 올랐습니다!]

살다 살다 해충을 다 잡아 보네. 잡은 벌레는 경험치 창으로 던지면 저절로 소멸했다.

거의 2주째 열심히 스킬을 올리고 일을 했지만 수확은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 계속 골드찬에게 빌붙어 지내는 건 아닌지 걱정도 좀 되고. 열매가 맺히고 꽃이 피면 작은 가판대라도 세워서 장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낮에 지나온 상인들을 보고 배우면 금세 따라 할 수 있겠지.

소문나서 유명해지면 물량 부족할 텐데…….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구석에 놓인 납작해진 잡초 더미에 몸을 뉘었다. 이제 침대에 누우면 이 잡초 더미가 그리워질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이 귀농을 하는 걸까? 파릇한 잡초 냄새와 눅눅한 흙냄새는 언제나 마음에 평화를 깔아 주었다.



* * *



언제 또 잠이 든 거지.

눈을 뜨니 작은 파랑새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이 주먹만 한 파랑새는 내 커다란 눈을 보고 놀랐는지 뾰족한 부리로 이마를 빠르게 쪼아 댔다.

“아!”

쪼그만 게 진짜 따갑게 쪼네. 파랑새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고선 뒤늦게 고통 감도를 켜서 확인했다. 고통이란 고통은 다 느낄 수 있도록 기본 설정인 70%로 설정되어 있었다. 따끔한 이마를 문지르며 20%로 줄여 버렸다. 아예 느끼지 못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뻐근한 몸을 뒤틀며 주변을 확인했다.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어제 분명히 골드찬이 야참을 가지고 온다고 했었는데. 나 지금 바람맞은 건가? 먼저 놀자고 한 건 자기였으면서. 귓속말을 보내려고 손을 모으자 눈앞에 알람이 떴다.

[부재중 귓속말이 있습니다.]

수면 상태에선 귓속말을 들을 수 없어서 부재중으로 전환된 것 같았다. 모은 손을 귀에 가져다 대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니버스 님,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해요. 야참은 다음에 꼭 해 드릴게요. 내일 봬요!

어머님이라도 방에 들이닥치신 건가. 하긴 방학이라고 게임만 하다간 잔소리를 듣기 딱 좋을 거다.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골드찬을 이해하며 피플 온라인을 종료했다. 계속 누워 있어서 그런지 몸이 여간 뻐근한 게 아니었다.



오늘은 즐거운 토요일이다. 아르바이트도 끝났고, 자취하는 취준생도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날이다. 건욱이나 불러서 놀까. 자소서 쓴다는 핑계로 술 안 마신 지도 꽤 됐는데, 이젠 목표가 생겼으니 오늘만큼은 마음 놓고 마셔도 될 것 같았다.

친구들은 마치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양 빠르게 약속을 잡았다. 오래간만에 나가는 번화가는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다. 번쩍이는 간판 조명과 추워서 꽁꽁 싸맨 사람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모습은 며칠 내내 게임만 하며 살았던 나에게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졸업 후 오랜만에 오는 단골 술집은 여전히 북적거렸다. 손을 들고 나를 부르는 건욱에게 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권우주! 백수 주제에 얼굴 보기 왜 이렇게 힘드냐?”

“취준생이 더 바쁜 거 모르냐. 같은 처지면서.”

“몰라, 몰라. 난 거의 반 포기했다. 술이나 먹자!”

내가 앉은 테이블엔 건욱이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셋이나 더 있었다. 다들 활발하고 착한 놈들이라 술자리의 분위기는 점점 기분 좋게 무르익었다. 한 명씩 근황을 말하며 농담을 따먹고 있을 때 즈음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졌다.

“나 피플 온라인 다시 시작했다.”

“오, 권우주가 게임을? 웬일이냐. 너 접속 안 하길래 친삭 했는데.”

게임에 죽고 못 사는 애들이라 내가 게임만 한다고 하면 기분 나쁘게 생초보 취급을 하곤 했지만 오늘따라 반응이 좋았다. 피플 온라인이 워낙에 재밌고 유명하고 돈을 벌 수 있기까지 하니까 그런 듯했다. 친구 중 한 놈은 중대 발표라도 하듯 그곳에서 사진관을 차리고 쏠쏠하게 버는 중이라고 했다. 졸업식 시즌 때는 몇 백을 벌 정도로 박이 터졌다고 자랑하며 이 말 하려고 나온 사람처럼 신이 나 보였다. 한 친구가 사진사 친구에게 부러운 듯 말했다.

“사진 효과 은근 비싸서 한 번 쓰기엔 아깝던데. 직업 잘 잡았네. 아오, 나도 피온에서 직업이나 구할까.”

“그렇게 비싸?”

내 물음에 친구는 이것저것 물어보는 초보자에게 시달린 고수의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겜알못은 빠지시지. 근데 권우주 넌 직업 정했냐?”

“아직…… 취미로 하는 거야.”

“그래, 넌 취미로만 해. 게임에 진짜 소질 없으니까.”

저게……!

내 소중한 정원사의 꿈을 짓밟는 듯한 말투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충분했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자 친구는 농담이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도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직업을 정원사로 잡았다고 말 안 하길 잘했다. 말했으면 날 놀리느라 술자리 분위기가 한층 더 띄워졌을 거다. 몇 백이 뭐야. 재벌 유저 하나 잡아서 저놈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줘야겠다.

요즘은 어디를 가든 피플 온라인 이야기뿐이라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어서 지루했었는데, 한번 시작하니까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어들 수준은 됐다.

그들은 이미 다른 섬에 정착한 상태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나도 골드찬이 사는 마을에 정착할 것 같은데 일단 돈부터 벌고 떠날지 말지 궁리해 보기로 했다. 건욱이 자신이 사는 마을 바다 경치가 그렇게 끝내준다는데……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야지. 지금은 레벨 업이 우선이다.

술자리는 늦은 시간에 끝났고 오랜만에 만나서 당연히 2차를 가자는 소리가 나왔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먹고 죽을 작정으로 나왔는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화 내내 친구들이 내 의욕을 자극했다. 얼른 집에 가서 새싹을 돌보고 싶었다. 어제 못 뜬 물도 떠 와야 하고 벌레도 잡아야 하고 잡초도 뽑아야 했다. 별거 없지만 은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서 미루면 나만 손해였다.

제일 친한 친구인 건욱이 그런 나에게 술집을 나올 때까지 같이 가자고 설득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라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라도 따라가려면 한참 분발해야 했다. 취한 친구 놈이 권우주는 버리라며 건욱을 데리고 갔다.

친구들과 방향이 같은 곳까지만 가려고 걷는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친구들도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주정을 부리던 입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