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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정원사 1화

1. 휴면 계정 해제


[투데이 게임] 피플 온라인, 전 세계 가상 현실 게임 매출 1위 달성!

“인기 좋네, 다시 해 볼까.”

기사를 훑어보다 눈으로 캡슐을 찾았다. 자취방 구석에 처박아 둔 커다란 캡슐은 이미 위에 먼지가 그득했다. 평소에는 생각도 안 나던 게임이 잘나간다니까 끌리네. 심심할 때마다 만나던 친구들도 이 게임에 빠져서 자주 만나지도 못했다. 이쯤 되면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다.

열심히 작성하던 포트폴리오 파일을 끄고 기지개를 쭉 켰다. 가끔은 쉬는 날도 있어야지. 요새 용돈도 끊겨서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느라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했더니 집중도 되지 않았다.

졸업도 했겠다, 게임 안 한 지도 오래됐는데 한번 해 볼까 싶어 좁은 방 한가운데로 질질 끌고 온 캡슐을 물티슈로 대강 닦고 힘주어 열었다. 언제 봐도 본새 나는 모양새였다.

게임에는 워낙 소질이 없는지라 친구들이랑 피플 온라인을 시작했을 때 수많은 직업 중 반강제적으로 정원사를 선택했더랬다. 아무리 그래도 정원사가 뭐냐고, 정원사가.

직업 바꿀 수 있겠지?

캡슐을 작동시키자 신비로운 알람이 울리더니 홀로그램을 띄웠다. 부모님께 졸업 선물로 받은 캡슐은 아직도 새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임 접속 버튼을 누르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뉘었다. 예전엔 머리에 헬멧 같은 걸 쓰고 게임을 해야 했는데 이젠 특허 기술이 도입되어 무선으로도 가상 현실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뚜껑을 닫는 건 수동이었지만.

눈을 감았다가 뜨자 예전에 만들어 놓은 내 캐릭터가 보였다. 현실에서는 하지도 못할 오묘한 보랏빛의 머리를 가진 나. 급하게 만든 캐릭터라 머리색만 다를 뿐 모든 신체 조건은 실제의 나와 같았다.

[우니버스 님, 오랜만이에요! 복귀 유저에게 드리는 많은 선물을 지금 당장 아이템 창에서 확인해 보세요!]

명랑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눈앞에 뜨는 안내창을 지우고 아이템 창을 확인하니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쓰는 건진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다 받아 놓고 보자.

“뭐야.”

레벨이 낮다고 아이템도 다 못 받게 하네. 쪼잔하게. 고작 레벨 5인 나는 등 뒤에 작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건 또 뭐람.

손에는 작은 낫이 들려 있다. 아니, 호미인가? 정원사라면 가위손처럼 커다란 가위를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가방도 꽉 찼겠다, 마땅히 넣을 곳이 없어 들고 다니기로 했다.

지금 있는 곳은 마지막으로 접속을 해제한 마을이었다. 친구들을 따라온 곳이라 레벨에도 맞지 않는 커다란 마을이었다. 사유지도 없는데…….

예쁘게 깔린 돌길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커다란 단독 주택 앞에서 어느 부부가 목청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근처 유저들은 그들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갔다. 나는 놀란 눈으로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이혼을 하느니 마니,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느니 누가 들으면 현실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대화 수준이었다.

나는 이 게임의 장르를 다시금 떠올렸다. 피플 온라인은 모험 요소가 가미된 소셜 힐링 게임이다. 점차 개인주의를 당연시하는 삭막한 시대에 개발자들이 내놓은 게임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퀘스트를 하고 돕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피플 온라인이다. 물론 자급자족을 하며 게임을 해도 되지만, 아마 90%의 유저들은 이곳에서 패밀리를 맺고 있을 것이다.

전 세계 1위 게임답게 50개의 섬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모험가를 선택해서 여행을 즐겨도 되고, 한곳에 정착하여 자신만의 전문직을 찾을 수도 있다. 직업의 개수는 무궁무진하다. 농사, 건축, 디자인, 요리 등…… 자세한 직업을 말해 보자면 여행 가이드, 보디가드, 선생님. 심지어 배우도 있다.

게임 드라마를 찍는 유명 배우들은 현실에서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쥐고 있을 거다. ‘가상’이라는 말만 붙었을 뿐이지 현실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만큼 자유도가 높은 이곳엔 현생을 포기하고 게임 속에서 직장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 저 부부도 이곳에 정착한 유저 중 일부일 것이다. 그만 보고 일거리나 찾으러 발걸음을 떼는 순간 눈길을 사로잡는 소년이 보였다. 많아 봤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싸우는 부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 부부의 아들인가?

“이게, 진짜!”

“아악!”

찢어지는 비명에 다시 부부를 바라보자, 남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제 아내를 망치로 내리치고 있었다.

“미친.”

놀란 마음에 입에서 욕설이 새어 나왔다. 폭력적인 장면을 소년에게 보여 줄 수 없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소년의 눈을 가렸다. 소년은 시야가 차단됐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자 그녀는 분노에 찬 눈을 하며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저 맞은 아내가 고통 감도를 최하로 설정해 놨길 바랄 뿐이었다.

5분도 되지 않아 게임 내 폴리스가 출동했다. 다른 직업은 유저들이 다 할 수 있어도 경찰만큼은 NPC들이 맡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의 모습이 아닌 동물이나 요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람의 형체를 가진 건 오직 유저들뿐이었다.

폴리스는 남자를 꽁꽁 묶었다. 날개 달린 요정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게임 내 신고 사항을 읊은 후, 남자의 발이 들릴 정도로 고정하고선 하늘을 날았다. 그는 아마 하늘에 있는 구름 감옥에 갈 예정인 것 같았다. 거기에 들어가면 몇 달간은 게임도 못 한다던데. 자업자득이다.

소년이 내 손을 잡아 내리며 눈을 맞췄다. 너무 오지랖이었나.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보아하니 이 아이가 아들은 아닌 것 같다. 충격받은 표정은 사라지고 멍한 얼굴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괜히 머쓱해져 선물이나 줄까 싶어서 작은 스킬을 실행했다. 손안에서 밝은 노란색의 튤립이 피어났다. 정원사의 기본 스킬이었다.

“가질래?”

“…….”

랜덤으로 피어나는 건데 예쁜 꽃이 나와서 다행이다. 예전에 친구한테 자랑할 땐 토끼풀이나 세잎 클로버 같은 것만 나와서 놀림만 당했는데. 소년은 말없이 내가 내민 꽃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별것도 아닌 스킬인데 신기한 듯 쳐다보는 눈을 보자 내심 기뻤다.

“예쁘지? 너 주려고 피웠어.”

“…….”

또 대답 안 하네.

아무튼, 꽃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꼭 쥐고 놓지 않는 손이 참 야무져 보였다. 볼이 붉어진 것도 같았다. 바람이 살랑 불자 맑은 바다 빛을 가진 소년의 머리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커스텀 되게 잘했네. 예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칼을 만지려다 손에 쥐고 있는 호미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일이나 하러 가야지. 뒤에서 소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돌길을 걸었다.



마을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여긴 아까 지나갔던 곳 같은데.

몇 번이나 똑같은 팻말을 보며 지친 숨을 내쉬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도 옆에 파란 간판이 있다고 말하는 나는 심각한 길치였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집이나 더 구경하지 뭐.

“와…….”

무슨 집이 저렇게 커?

내 발길이 멈춘 곳은 거의 성과 같은 모습의 집이었다. 아무래도 이 집주인은 게임을 엄청나게 오래 한 모양이다. 저 정도 집을 지으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할 텐데. 어쩌면 직업이 다섯 개일 수도 있고. 직업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지만 저 정도 사유지를 가진 유저라면 꽤 높은 레벨일 거다.

차마 사유지 안에 들어가서 구경을 할 수는 없기에 울타리가 없는 집 주변을 따라 멀리 돌았다. 드디어 정리되지 않은 풀숲을 발견했다. 잡초가 여기저기 솟아 있고 이름 모를 여러 가지의 꽃들이 순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피어 있었다.

나는 일단 호미로 발목을 간지럽히는 잡초를 힘주어 캐냈다. 별 스킬 없이 캐내서 그런가 푸릇한 잔디가 푹 파여서 땅이 드러났다.

“큼…….”

대충 호미로 다시 잔디를 덮어 두고선 한 발자국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번 하다 보니 호미질이 익숙해졌다. 잠깐 흰빛이 내 몸을 감싸며 번쩍이더니 레벨 업이라는 글씨가 지나갔다.

……잡초밖에 안 캤는데.

시간을 힐끗 보자 나는 벌써 한 시간째 잡초 뽑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게임이지만 온몸이 쑤시는 기분이다. 지겹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피플 온라인(19세 서버)을 종료하시겠습니까?]

호미로 콕콕 찍으며 종료 버튼을 선택했다.

[다음 접속 해제부터 단축 모션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수락을 누르고 캡슐에서 빠져나왔다. 낮잠이나 자야지. 땡볕 아래에서 잡초나 캐고 있으려니 피곤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2. 잡초 더미는 나의 집 (1)


아오, 지겨워.

오늘도 여전히 자소서 쓰기에 매진하다 힘이 빠져 책상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본가였어 봐. 벌써 잔소리를 한 보따리 듣고도 남았을 거다. 부모님 몰래 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가끔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은 하지만, 언제까지 이 적은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는 없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스트레스 좀 풀어 볼까.

친구들을 만나서 술 마실 돈이라도 아껴야 하니 며칠간 들어가지도 않았던 피플 온라인에 접속했다. 눈을 뜨자 저번에 종료했던 볼품없는 정원이었다.

분명히 며칠 전에 잡초 다 뽑았는데!

날 농락이라도 하듯 푸른 잡초가 다시 무성히 자라 내 복숭아뼈를 간질였다. 호미 내구도도 다 떨어져 가는데. 가방에 금전이 있나 뒤져 봤지만, 동전 몇 개만 떨어질 뿐이었다. 복귀 유저한테 돈이라도 주든가. 하지만 피플 온라인에서의 금전은 현실에서 쓸 수 있는 화폐와 같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쉽게 이벤트로 내어 주지 않았다. 줘 봤자 몇백 원 정도였다.

게임을 하자고 현질 하는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미를 들고 저번처럼 잡초를 캤다. 이 게임에서 정원사란 직업은 흔하지 않았다. 물론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다른 직업을 찾기도 귀찮고, 희귀 직업으로 성공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감이 들어서 쉽게 포기하기는 싫었다.

꼭 정원사로 성공하리라.

막상 해 보니 시간도 잘 가고 잡생각 없애기엔 딱이었다. 날씨도 햇볕이 강하긴 하지만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서 덥지도 않고 아주 좋았다.

어쩌면 취직 안 하고 남의 집 정원이나 가꾸면서 독자적인 정원사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 블루 오션을 노려 보자.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시간 날 때마다 잡초를 뽑으러 들어오고 땅을 다지기를 연속 이틀째, 중고로 산 호미가 파삭 하고 조각이 났다.

“아, 진짜.”

이제 중고로 살 돈도 없다. 그래서 결국 손을 썼다. 어차피 현실도 아닌데 뭐. 두 손으로 힘주어 손끝이 퍼렇게 물이 들 때까지 남은 잡초를 뽑았다. 졸업 후 간만에 무언가에 열심히 집중하는 것 같아 책임감이 느껴졌다.

텅 빈 공터의 정원이 3분의 2쯤 탈모 겪는 아저씨의 정수리처럼 듬성듬성하게 비었다.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구부정하게 굽힌 허리를 펴고 스트레칭을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또 왔네요.”

“……?”

게임에서 많은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기에 누군지 곧장 떠올랐다. 그때 그 소년이다. 소년은 영화 레옹에 나오는 마틸다처럼 화분을 들고 나를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꽃이라도 심으러 온 건가?

그가 들고 있는 화분을 보자 내가 준 노란 튤립이 심겨 있었다. 단 한 송이인데도 여태 시들지 않고 노란빛을 뽐냈다.

내가 준 꽃을 저렇게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니. 조금 감동이다. 그런데 저걸 왜 들고 다니는 거야. 내 표정은 순식간에 의아해졌다. 물론 아이템 창에 넣어 두고 다닐 순 있지만, 초라한 꽃 하나 넣자고 좁은 가방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안녕.”

손을 들어 작게 인사했다. 그러자 소년이 눈썹을 들썩이며 반응했다. 참 예의 없게도 말이다.

“저 이거 잘 키우고 있어요.”

“어… 그래. 고마워.”

대화는 1분도 안 돼서 종료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눈을 돌려 다시 잡초를 뽑았다.

“우니버스 님, 친구 맺을래요?”

소년이 내 닉네임을 부르며 다가왔다. 나는 쭈그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못할 것도 없지. 그제야 소년의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골드찬]

얼굴 앞에 친구 신청 메시지가 떴다.

[골드찬 님이 친구 신청을 보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 버튼을 누르고 골드찬을 바라보자 무언가 심각한 눈빛으로 이것저것을 클릭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 화면을 볼 수 없었다.

햇볕 아래에서 너무 오래 일했나. 내 캐릭터가 전보다 많이 그을렸다. 좀 섹시한 느낌도 나는 것 같고. 그을린 팔과 다리를 둘러보는데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골드찬 님이 아이템을 선물하셨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뭐지? 선물 보냈어?”

골드찬이 끄덕였다. 얼른 열어 보라는 눈빛으로 내게 거만하게 턱짓했다. 아까부터 저게. 나보다 한참 어린 것 같은데……. 아무리 내가 거지처럼 보여도 그렇지. 현피 뜨면 아무 말도 못 할 거면서.

그래도 선물은 받아야겠다.

수락하기가 무섭게 정원사에게 필요한 아이템이 가방 속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안 그래도 좁은 가방이라 몇 개밖에 쏟아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많은 양의 아이템이었다.

호미 다섯 개, 물뿌리개 두 개, 꽃 씨앗, 열매 씨앗, 밀짚모자, 토시 등등…….

오! 커다란 가위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쓰기엔 레벨이 맞지 않으니 가방 속에 넣어 두었다.

나는 신이 나서 무성하게 뽑아 놓은 잡초 위에 아이템들을 올려 두고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 정도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레벨 업도 거뜬히 하고 정원도 예쁘게 가꿀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잊고 있던 골드찬을 바라보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골드찬은 그 말에 미소 지으며 안고 있던 화분을 쓰다듬으며 공터를 빠져나갔다.

꽃 하나 줬다고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그것도 스킬로 얻은 공짜 꽃이었는데.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돈 굳었다 속으로 외치며 선물 받은 씨앗을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두었다.

이제 3분의 1 남았다. 더는 잡초 캐기 같은 거로 경험치는 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마저 끝내 놓고 경험치를 쌓는 게 우선일 것 같아 선물 받은 밀짚모자와 토시를 끼고 더욱 열심히 호미질을 했다. 내가 지저분한 공터를 깨끗이 청소해 놨는데도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발길 한번을 안 들였다.

예쁜 정원을 만들어야지. 언젠가 본 해외에 있는 공원처럼 아름답게 정원을 가꿔서 돈 좀 벌어 볼 생각이다. 물론 입장료를 받고. 아니면 꽃을 피워서 꽃집을 차려 볼까. 월급 받으며 남의 정원을 가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벌써 내 상상에선 ‘피플 온라인으로 백만 부자가 된 취준생 권우주’라는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떠 있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이 될 때까지 잡초를 뽑고 뽑고 또 뽑았다. 골드찬이 선물한 호미는 꽤 비싼 물품인지 내구성이 엄청 천천히 떨어졌다.

어린애한테 몇만 어치를 받은 거야……. 이제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라도 해 줘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 그가 소중히 안고 있던 튤립이 떠올랐다. 골드찬은 꽃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보답으로 꽃다발이라도 안겨 줘야겠다.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하…… 드디어 다 했다.”

수북하게 쌓아 놓은 잡초 더미에 늘어지게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미세 먼지 가득한 현실과는 다르게 맑은 하늘에서 수억만 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꼭 날씨가 좋을 때만 있는 건 아니지만 햇빛이 쨍쨍했던 것만큼 오늘 날씨는 아주 최상이었다.

아, 배고파.

종일 쭈그려 앉아 일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HP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코로 폴폴 풍겼다. 고개를 살짝 들어 냄새의 근원지를 찾자 멀리 떨어진 성같이 큰 집에서 저녁을 만들고 있는 듯했다. 부자인 만큼 음식도 최상으로 먹겠지…….

서리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농사 스킬이라도 찍어 볼까. 정원사와 비슷한 분야의 전문직이라 동시에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쩌리니까 이 공터부터 어떻게 해 놓고 봐야지. 피곤한 눈을 감자 콧속으로 파릇한 잡초 향이 시원하게 스며들었다.



* * *



이마를 살랑 간지럽히는 바람에 눈을 뜨자 낯선 하늘이 나를 반겼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찌뿌둥한 몸을 쭉 늘리며 눈동자를 굴렸다.

나 지금 여기서 잔 건가?

나는 아직도 게임 속이었다. 아마 자동으로 수면 모드가 설정된 듯하다. 게임으로 밤을 새워 본 적도 없는데 위험하게 여기서 잠들다니. 그것도 노숙으로!

물론 범죄를 당하면 폴리스가 곧장 처리해 주긴 하지만 집도 없이 길바닥에서 자는 건 현실이나 게임에서나 위험하기 마찬가지다. 아직 해가 뜨겁지 않은 것을 보아 점심 전인가 보다.

잡초 더미가 은근 편하네. 몇 시간 동안 눌린 더미는 한껏 가라앉아 있긴 했지만, 여전히 푹신함을 뽐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등에 퍼런 잡초들이 더덕더덕 붙었다.

대충 손으로 옷을 털어 내고 주위를 살펴보자 어제와 그대로였다. 공터가 깨끗해지긴 했어도 아직 마을 주민의 이목을 사로잡진 못한 듯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어?”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내려다보자 아기자기하고 커다란 쟁반 안에 먹음직스럽게 구운 고깃덩이와 뚜껑이 덮인 그릇들이 여러 개 있었다. 자면서 버튼이라도 잘못 눌려 배달을 시킨 건 아닐 테고. 몸을 쪼그려 앉아 조심스럽게 뚜껑을 하나둘씩 열어 보았다.

뚜껑을 열자마자 굉장히 맛있고 고소하고 달큼한 냄새가 위장을 자극했다.

꿀꺽.

본능적으로 침이 넘어갔다. 그릇 안에는 아직도 뜨거워 보이는 양송이 수프와 장어덮밥, 갈비찜, 반찬들이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