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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영혼까지 탈탈 털렸어



우여곡절 끝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긴 했다.

“치료 시기를 놓쳐서 만성으로 이어진 것 같네요. 만성 방광염은 항생제를 복용해도 잘 낫지 않을 확률이 높아요.”

죽을 맛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어째서 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해 둔 거냐며 혼을 내는 의사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일단, 병원부터 갑시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히…….’



그는 다정의 말을 무시하고 택시를 잡아 세웠다.

떠밀리듯 택시에 탑승한 이후,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다정은 눈치 없는 아랫배가 쉴 새 없이 요동을 쳐 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

거기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병원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접수처 직원이 묻는 질문에 다정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머뭇거렸다. 참으로 뭐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한 복통이었다면 모를까, 동반한 보호자가 무려 본부장님인데 ‘오줌보가 고장 났습니다.’라는 말을 어찌한단 말인가.



‘환자분. 어떻게 오셨냐니까요.’



접수처 직원의 계속된 채근에, 다정은 두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해야 했다.



‘방광염 때문에…….’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어이없어하던 본부장님의 표정을.

태풍처럼 몰아치던 수치스러움을.

병원에 오기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다정은 넋을 놓고 말았다. 완벽한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일단, 약은 평일이기도 하고, 응급실 원칙 때문에 하루 치만 처방해 드릴 거고요. 혹시 모르니까 주사 맞고 가세요.”

“네에…….”

다정은 고개를 푹 떨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황은 이렇게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아, 혹시 보호자님이 환자분 남자 친구 되세요?”

“예?”

잘못 들었나 싶어 경악에 찬 다정은 눈을 치뜨며 되물었다. 의사는 뭘 그렇게 놀라는 거냐며 도리어 이상한 시선으로 훑었다. 즉시 부정해야 했지만, 선생님은 그 짧은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여성 방광염은 주로 스트레스나 피로감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발병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세균성 질염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뭐, 뭐요?”

지, 질염이라니.

다정은 태어나 처음으로 의사에게 원망이란 감정을 느꼈다. 다정에게서 눈을 뗀 의사는 시선을 돌려 은도를 응시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두 분,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맺은 게 언제였어요?”

“컥! 커흡!”

직구로 던져진 의사의 질문에 다정은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고 컥컥거리던 다정은 사정없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곧장 시선을 옮겼다.

본부장님의 얼굴은 싸하게 식어 있었다. 은도는 다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긴 숨을 뱉었다. 그런 관계가 아니란 해명을 대신 해 주고자 드디어 마음을 먹은 모양인지, 천천히 입술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 역시 의사가 더 빨랐다.

“일단, 산부인과에 먼저 가 보세요. 성관계로 갑작스러운 자극을 받게 되면 외음부와 요도에 부종을 초래할 수 있어요. 물론, 단순한 스트레스일 수도 있고요. 확실한 건 검사를 받아 보셔야 알 거예요.”

아무래도 함께 온 보호자가 남성이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을 법도 하지만.

산부인과. 성관계. 외음부. 요도. 소변. 세균 감염.

적나라한 단어가 연이어 귓속을 퍽퍽 강타했다. 다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설상가상 본부장님이 헛기침을 뱉었다.

아, 나 진짜 회사 때려 칠까?

“만약 성관계에 의한 세균 감염이 맞는다면, 남자 친구분도 함께 약 처방받으셔야 할 겁니다.”

정말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분명 방광염은 살인적인 업무량이 원인이었지만, 의사는 이미 하지도 않은 성관계 때문이란 결론을 내린 뒤였다.

“아닙니다. 그 이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여느 때보다 반가웠다.

그제야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의사의 입술도 얌전히 다물렸다. 다정은 소심하게 은도의 눈치를 살폈다.

화났나? 화가 났을 만도 하다.

말만 안 했지, 매번 자신을 기피하던 행동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가장 최근 일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직접 험담에 가담하거나 맞장구를 치진 않았으나 적어도 그가 보기엔 그렇게 느껴졌을 테니까.

그럼에도 기껏 미운 부하 직원의 안타까운 사정을 모르는 척하지 않고 도와줬는데. 이젠 또 남자 친구에, 세균 감염의 원인자 취급까지 받고 있으니 억울할 만도.

“크흠. 자세한 건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가셔서 확인하시고요. 환자분은 따라오세요. 주사 맞게.”

의사는 짐작한 것이 보란 듯이 어긋나자 민망했는지, 서둘러 몸을 돌렸다. 다정 역시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군말 않고 베드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의사는 주사실로 걸어가며 다정에게 물었다.

“약 처방 때문에 그러는데, 환자분 혹시 월경 중이세요?”

“……아뇨. 아직 멀었습니다만.”

왜 꼭 그런 말을 지금 하시는 건가요.

“임신은 아니시고요?”

의사의 마지막 직격탄에 다정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약 처방값과 주사까지 해서 총 육만 육천 원입니다.”

“어, 얼마요?”

다정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금액에 입을 떡 벌렸다.

“육만 육천 원이요.”

접수처 직원은 이것이 현실이라고 또박또박 다시 일깨워 주었다.

다정은 어렸을 때를 제외하면 응급실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애먼 데서 돈을 뜯기는 기분이 드는 건 뭘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최소한 점심시간만 보장해 주었더라면 이 사태까진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그나저나, 월급날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죄송한데요. 혹시 이거, 실비 처리 될까요?”

물어보고도 황당한 질문이었다. 최대한 소곤소곤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영수증 첨부해서 보험사에 한번 제출해 보세요.”

그때였다. 접수대 위로 신용카드 한 장이 툭, 놓였다.

“그걸로 계산해 주세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은도가 무심히 말했다. 당황한 다정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본부장님의 카드를 냉큼 채 갔다.

“아니요, 아니요. 이거 말고 제 걸로 해 주세요.”

저도 돈 있거든욧!

다정은 신용카드를 은도에게 돌려준 뒤, 부랴부랴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자신의 체크카드를 꺼내어 당당히 내밀었다. 은도가 지금 뭐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다정은 어색하게 웃었다.

“보험 처리 하면 됩니다. 하핫.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본부장님.”

그는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다정은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렇게 해요. 그럼.”

두 번을 모르는 남자였다. 예의상 한 번 더 내가 결제하겠다 다시 말해 줬더라면, 야근으로 고생한 지난날을 보답받기 위해서라도 감사히 얻어먹으려고 했건만.

아쉬워 입맛을 다시고 있는 다정에게 다시 한번 뜻하지 못한 위기가 닥쳤다.

“환자분 카드 잔액 부족 뜨는데요. 다른 카드 없으세요?”

“그,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봐 주시겠어요?”

“세 번째인데 안 돼요.”

……빌어먹을. 직원의 말에 다정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리 월급일까지 이틀 남았다고는 하나, 큰돈을 쓴 적도 없는데 왜!

다정은 재빨리 카드를 확인했다. 저녁만 먹는다고 급히 들고 나온 카드가 하필이면 자주 쓰지 않았던 카드였다.

“계산해 주세요.”

그가 다시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다정은 벙찐 얼굴로 은도를 바라보았다.

“저는 진짜 괜찮은데…….”

네가 괜찮으면 지금 상황에서 뭐 어쩔 건데.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안 괜찮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은도는 무뚝뚝하게 선을 그었다.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저 양반도 감정이라는 건 있는가 보다. 다정은 새삼 때아닌 감동에 젖었다.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다정은 그가 주는 떡을 두 번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알고 보면 본부장도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한 동물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계산은 신속하게 끝났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병원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아프게 스쳤다.

하. 영혼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다. 이제 어쩐다.

주변은 고요했다. 소음이라곤 자비 없이 도로 위를 쌩쌩 내달리고 있는 자동차뿐이었다.

“저…….”

정적을 끊고 말문을 튼 사람은 다정이었다. 어쨌거나 도움을 받았으니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지만, 입술이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다정의 눈빛이 불쾌했는지, 은도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겁니까.”

그 말속엔 ‘불쾌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기분 탓이겠지, 생각하며 다정은 억지로 입술 끝을 당겼다.

“……죄송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다정은 순순히 사죄했다. 호의를 받고 모르쇠로 일관할 만큼 다정은 뻔뻔하지 못했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술을 떼어 냈다.

“몸은, 좀 어때요.”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제발 택시가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 다정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때였다.

“다행이네.”

은도가 혼잣말하듯 중얼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