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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오해의 성지, 엘리베이터



강남역에 도착한 뒤 1분 1초가 급했다.

다시 시작된 야근 지옥에 고작 세 시간 눈 붙이다 겨우 일어났는데 제정신일 리가 있나. 회사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다정은 손에 쥐고 있던 ID카드를 던지다시피 찍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어어! 잠시만요!”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 앞에 도달한 순간, 문이 스르륵 닫혔다.

“하.”

한솥밥 먹는 사람들끼리 이렇게 매정하기 있어?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다. 다정은 구부정한 자세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홀수 층 버튼에 손을 올렸다.

헌데 왠지 모를 이 부드러운 감촉은 무어란 말인가. 다정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말고 서서히 상체를 세웠다.

“아…….”

누군가의 커다란 손등 위로 다정의 손이 겹쳐져 있었다.

엄마야.

다정은 벌레라도 만진 사람처럼 황급히 손을 치워 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늦게나마 형식적으로 건넨 인사였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처참하게 무시당했다.

“안 탑니까.”

짧은 정적을 뚫고 낮은 음성이 무심하게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탑승해 있었다.

심각하리만큼 근사한 낮은 목소리도 다정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다정은 움찔, 어깨를 떨며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아, 네. 본부장님 먼저 올라가십쇼. 저는 볼일이 있어서.”

다정은 능청스럽게 입술을 늘였다.

그는 무신경한 얼굴로 다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망설임 없이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래요. 그럼.”

너무나 쉬운 포기였다. 순간 다정은 고민에 빠졌다.

불편한 티 너무 냈나?

“자, 잠시만!”

다정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재빨리 몸을 구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볼일은 사무실에 있더라구요.”

일단 이 회사에 다니는 동안만큼은 살고 봐야지.

다정은 정면을 보고 섰다. 기획팀 직원들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을 보고서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다들 왜 안 타요? 얼른 타!’

‘먼저 가세요.’

‘제발 타 줘! 같이 가자! 응?’

‘시, 싫어요. 송 피엠님이 희생해요.’

직원들은 간절한 얼굴로 금붕어처럼 입술만 벙긋대는 다정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렇다. 우리 본부장님은 좋게 말해 직원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저 고고한 외모는 고작 명함에 불과했다. 빙하는 매년 10m씩 녹고 있다는데, 저 차가우신 분은 도통 녹을 생각이 없으시다.

회사에서 친목과는 진작 담쌓은 남자였다. 일, 일, 일. 오로지 일 생각뿐.

애석하게도 엘리베이터 문은 참을성 없이 굳게 닫히고 말았다.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 진짜. 불편해 죽겠다.

“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하…….”

잔뜩 겁먹은 미소를 걸치며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밖에 비 옵니다.”

아. 그러네. 비가 오네.

다정은 쭈뼛거리며 벽면에 몸을 밀착시켰다.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작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1초가 1년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따갑게 와 닿자 당황한 다정은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치게 됐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또!

원망 섞인 호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다정은 가까스로 층수 판에 눈을 고정했다. 금세 흥미를 잃을 줄 알았건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전보다 더 집요해졌다.

‘오늘 너 꼬락서니가 왜 그 모양이냐.’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눈이었다.

때마침 띵, 소리와 함께 1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줄곧 다정에게 머물러 있던 서늘한 눈길이 드디어 떨어졌다.

뭐야, 기분 나쁘게…….

다정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점차 멀어지는 널찍한 은도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많은 인파를 뚫고 헐레벌떡 회사로 달려온 탓에 미친 여자처럼 산발이 되어 버린 머리와 흐트러진 차림새를 알아차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분 뒤였다.



* * *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바빴다. 몇 시간째 싸울 기세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집중하다 보니 눈앞이 팽 돌았다. 다정은 대뜸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아, 깜짝이야. 송 피엠님, 놀랐잖아요!”

“안 되겠어. 카페인. 카페인이 너무 당긴다.”

“어어,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 가실 거죠? 저도 같이 가요.”

“그래. 같이 가자. 우리 이 주임 고생 많았으니까 내가 쏠게.”

이 주임은 ‘오예!’를 외치며 발딱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다정보다 한 살 어린 정연은 조금 가벼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부서별 소식통인 데다가 애교가 많았다. 그녀는 유독 다정을 잘 따랐다. 다정도 그런 정연이 싫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나란히 걷다 보니 대화는 자연스럽게 일적인 내용으로 흘러갔다.

“정연 씨. 고객 연령별 서베이 리서치는 다 끝냈어?”

“네. 어떻게 겨우 끝내긴 했어요.”

나란히 걷던 이 주임이 울상을 지었다.

“괜히 미안하네. 대신, 오늘은 박 대리님이랑 먼저 퇴근하게 해 줄게.”

“진짜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피엠님 혼자 일주일 내내 야근하시는 거잖아요.”

“적응 기간 동안 여태 내 몫까지 고생해 줬잖아. 나 입사하고 3개월 동안 같이 야근도 해 줬고. 그걸로 충분하지, 암.”

“크으, 역시 우리 생각해 주는 건 피엠님밖에 없어요. 사랑해요, 흑.”

정연은 엄지를 추켜올리며 진심으로 감동에 젖었다.

“그나저나 송 피엠님.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저번에 약 드시던데.”

아, 그거…….

상세히 말해 주기엔 영 민망한 병명인지라, 다정은 슬쩍 웃어넘겼다.

“알 것 같아요. 방광염 진짜 골치 아프죠.”

당황한 다정은 헛기침을 토해 내며 정연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어떻게 알았어?”

“저번에 봤죠. 약봉지에 떡하니 적혀 있던데요?”

아…….

“그래 봤자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앓는 흔한 병인걸요. 요즘 바빠서 매번 점심도 건너뛰고 일하시던데. 약은 잘 챙겨 먹고 계세요?”

뜨끔. 다정은 괜히 찔려서 입술을 감쳐물었다.

방광염 진단을 받은 게 벌써 2주 전인데 3일 치 약을 어제가 되어서야 겨우 처리한 것만 봐도 말 다 했다. 왠지 아랫배가 시큰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몸 관리 잘하셔야 해요. 바쁘고 귀찮다고 그냥 넘겼다간 일 나요. 물 자주 드시고요. 아, 저 요즘 주기적으로 산부인과 다니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럴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하긴……. 송 피엠님이랑 같이 점심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네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숨을 터트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주임은 숨겨 둔 속내를 은밀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저희는 본부장님이 피엠님 엄청 마음에 들어 하신 줄 알았거든요. 면접도 본부장님께서 직접 보셨고 해서.”

그 반대가 아닐까 싶네만.

면접에서 없는 말이라도 달게 꾸며 냈어야 했는데, 그때의 일로 완전 눈 밖에 나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자본이 낳은 괴물이 바로 나, 송다정 아니던가.

무조건 버텨야 한다.

“조금만 더 상냥하면 좀 좋아요. 본부장님이요.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려서……. 저번에도 인사 한번 했다가 단박에 무시당했다니까요. 아시죠? 본부장님 그 특유의 싸한 분위기. 꼼짝할 수가 없어서 저 무슨 지박령 걸린 줄 알았다니까요. 어휴.”

살가운 정연의 치명적인 단점은 입이 깃털보다 가볍다는 것이다.

“저희는 그렇다 치지만 매번 결재받으러 가야 하는 팀장님들이나 송 피엠님은 오죽하시겠어요, 극한 직업이 따로 없지. 어때요? 들리는 말로는 진짜 성격 장난 없다는데.”

“음, 그랬던가?”

“에이, 저한텐 솔직하셔도 괜찮아요. 저번에 3팀 김 팀장님도 결재받으러 가셨다가 울면서 나왔다는 소문도 있어요. 그 자존심 세고 여우 같은 김 팀장님이 우셨다는 게 믿겨져요? 혹시 모르죠. 본부장님 성격이라면 결재 파일을 김 팀장님 면전에 냅다 빡! 던졌을지도.”

“허어. 진짜?”

그래서 요즘 김 팀장이 계속 일을 떠미는 건가? 자존심 센 김미래 팀장이 울었다는 건 믿어지지 않지만, 기획팀 직원들 사이에서 본부장과 관련된 소문이 심각하게 와전되었음은 확실하다.

적어도 차은도 본부장은 직원들 면전에 파일철을 내던지거나, 얼굴을 붉히며 면박을 줄 정도로 막나가는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싸가지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무례한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임원들에 비해 정중한 편이라면 모를까.

다만, 지나치게 무뚝뚝한 성향이라든가, 시도 때도 없이 결재 리필을 요구하며 야근 지옥을 선사해 준다거나, 맞는 말만 골라 해서 사람 무안해지게 만든다는 것만 제외하면.

“알고 계시죠? 상무이사 선임 기간 다가오는 거. 보통 다른 분들은 평소엔 온갖 갑질에 훈수 두다가도 막상 닥치면 직원들한테 잘하려는 척은 하시던데. 우리 본부장님은 다른 의미로 참 한결같다니까요.”

“으음…….”

애매한데.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 주임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다정은 어쩐지 적극적으로 맞장구치지 못했다. 괴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입사 초반엔, 아니 지금까지도 그의 일하는 방식만큼은 크게 사는 부분이라서.

그러는 사이에도 이 주임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회사 행사는 고사하고 회식 때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다죠, 아마? 정말 이러다…….”

“그만, 그만. 이러다 누가 듣겠다.”

당해 본 사람만 안다는 동질감 같은 감정일 뿐, 본부장을 위해 주려는 뜻은 결코 없었다. 플러스로 이 주임의 신변이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임이 말을 잇기 직전,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헛기침을 뱉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두 여자는 동시에 뒤를 돌았다. 본부장과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비서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뜨악할 정신도 없이 공허한 탄식만 흘려보냈다.

“아…….”

언제 온 거지. 어디서부터 들었을까.

이 주임의 말을 끊어 낸 사람은 진우일 것이다. 주먹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으니, 아마도.

다정은 진우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대학 시절, 동경의 대상인 선배였던 만큼, 충격은 배가되어 돌아왔다.

회사에서만큼은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하니, 알은척하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곧장 해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면, 은도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만 직시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들었다. 분명, 다 들었다.

“어떡해. 저 어떡해요, 송 피엠님?”

이 주임은 어쩔 줄 몰라 다정에게 속삭이며 은도의 눈치를 살폈다.

하아……. 이건 분명 엘리베이터의 저주가 틀림없다.

“죄송합니다.”

울상을 짓고 있는 정연을 대신해서 다정은 허리를 굽혀 진심으로 사죄했다. 변명조차 없었다. 일찍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잘못도 있었으니까.

다정은 확신했다.

‘나 진짜 제대로 찍혔구나.’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하게 다정을 스쳐 지나갔다.

확신하건대 닫혀 가는 문틈 사이로 마주친 그의 눈빛은.

“…….”

경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