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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은도는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손목시계를 힐긋거렸다. 벌써 자정이었다.

습관처럼 팔을 뻗어 봤지만 컵은 비어 있었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넘어왔다.

“본부장님. 차 가지고 왔습니다.”

은도의 얼굴이 천천히 정면으로 올라왔다.

문을 열고 등장한 남자 비서 진우가 가볍게 묵례하며 다가왔다. 집무 책상 위로 머그컵이 조심스레 놓였다. 카모마일의 고소한 향이 뜨끈하게 퍼졌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진우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팔에 끼워 둔 이력서 파일철을 공손히 넘겨주었다.

“이력서입니다. 내일 오후 2시, 기획 1팀 경력직 면접이 잡혀 있습니다. 참고하셔야 할 경력 사항 부분은 따로 표시해 두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공석이 되어 버린 기획 1팀 팀장 자리에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회사에 입지를 굳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만큼, 신중을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기도 했다.

선택 기준은 단순했다. 맡은 업무에 묵묵히 충실할 사람. 말 많고 탈 많은 사내에서 그 어떤 루머나 스캔들에도 휘둘리지 않을 사람.

최종 이력서에 발탁된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둘은 유망한 경력직 팀장이었고, 마지막은 특이하게도 계약직 프리랜서인 프로젝트 매니저였다. 직무는 비슷하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서 실장님 생각은 어때요.”

이력서를 천천히 훑어보던 은도가 시선을 올렸다.

진우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마지막 이력서란 뜻이다. 지금처럼 진우는 자신의 의견을 가장 마지막 선택지에 남겨 두곤 했으니 말이다.



「송 다 정」



스물아홉. 경력직 프로젝트 매니저치곤 많이 어렸다.

은도는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선한 인상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이름의 억양과는 다르게 이목구비가 또렷한 편이었다. 마치, 고양이 같은. 전체적인 인상은 예쁜 편에 속했지만 억지로 입술 끝을 말아 올려 만들어 낸 웃음은 어색하다 못해 심각하리만큼 작위적이다.

이상하게 낯이 익은 얼굴 같은데, 기분 탓인가. 은도는 턱 주변을 문지르며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름 있는 몇몇 중견기업에서 상당한 성과를 이룬 기록이 곳곳에 보였다.

“라인 구축에 있어선 발판부터 확실하게 다져 두셔야 합니다.”

진우의 사무적인 조언에 이력서를 한 장 더 넘기려던 은도의 손이 멈칫했다.

오랜 시간 동안 머물러 있는 흐름을 바꿀 시기가 다가왔다는 뜻이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윤문혁 회장이 고삐를 쥐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임원들 사이에서 쓸데없이 기 싸움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직원들 인정부터 얻어.’



<지성가구>를 설립한 윤문혁 회장은 보기 드문 순수한 CEO였다. 누구보다 자신이 설립한 기업만큼은 깨끗하길 바랐다.

꼴사납게 막무가내로 구는 행동을 곱게 봐 줄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은도는 그의 전폭적인 애정을 받고 있었지만, 자질에 대한 평가만큼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측근 없이 올라서기란 제아무리 출중한 능력이 뒷받침되어 준다 한들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언제 대가리가 댕강 잘려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전쟁터에서 녹슨 칼 한 자루만 쥔 채 멍청히 서 있는 심정이랄까.

애초부터 우위를 쟁취하는 것에 열망을 느끼는 성향이 아니었다. 목표가 분명하지 않아 알게 모르게 조금씩 지쳐 가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다른 차선책이 없으니 그저 묵묵히 견뎌 내고 있을 뿐.



‘네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 알아서 움직이게 될 거야. 그때를 놓치지 마.’



결코 빼앗겨선 안 되는 이유만큼은 분명했으므로.

처음으로 직접 직원을 채용하는 만큼, 분명 서 실장의 마음에 들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려 팀장 채용을 고사하고 프로젝트 매니저를 선별했다면 더욱이 말이다.

묵혀 둔 피로감이 몰려와 은도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그러다 어느 부분에서 시선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특기: 일

취미: 일」



……뭐야 이 여자.

지금 놀리는 건가. 아니면 대놓고 뽑아 달란 어필을 하고 있는 건가.

은도는 작게 실소하며 이력서를 덮었다.



* * *



평소처럼 빡빡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은도는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앞서 두 명의 지원자 면접은 일전에 마친 상태였다. 이력서에 기재되어 있는 경력은 모자란 것 없이 출중했지만, 어쩐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본부장님. 송다정 씨는 이미 도착한 것 같습니다.”

진우의 보고에 은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이번 기획팀 프로젝트 매니저로 입사 지원한 송다정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발딱 일어나 폴더처럼 허리를 굽히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적당히 꾸며 낸 미소, 하얀색 블라우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구두 굽까지. 그동안 스쳐 간 면접자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앉아요.”

은도의 손끝이 접대용 소파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녀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 뜻을 이해한 은도가 결국 먼저 자리에 착석했다. 그제야 여자도 뒤늦게 엉덩이를 붙였다. 은도는 꿰뚫듯 그녀를 직시했다.

1초, 2초, 3초.

정확히 3초였다.

이 여자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선 시간.

사진으로만 봤을 땐 긴가민가했으나 직접 대면해 보니 확실해졌다. 자주 찾았던 카페에서 몇 번 스쳤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적나라한 시선이 불편했는지 그녀는 눈꺼풀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은도는 그녀를 향한 눈길을 거둬 내고 이력서를 펼쳐 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직속 비서 진우와 같은 대학을 나왔다.

아는 사이인 걸까.

고집스럽게 다물린 은도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좋은 대학 졸업했네요.”

서울에서 1, 2위를 다투는 대학교는 아니어도 6위권 안에는 꼽히는 곳이었다.

돌아온 대답은 없었지만, 분명 그녀는 어깨를 떨며 동요했다.

딱히 학벌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수한 학력에 비해 중소기업 경력이 대부분이라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별 뜻 없이 물었던 거였다.

어느새 방긋방긋 웃던 그녀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여자는 여린 입술을 잘근 깨물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옆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중퇴했습니다.”

“어디?”

“그, 자세히 보셔야…….”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과 다르게 현저히 작았다. 자신 없다, 이건가.

은도는 다시 이력서를 살피려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말처럼 학력란 옆에 정말 조그맣게 쓰여 있었다. 대학교 이름이 10pt였다면, 그 옆 ‘중퇴’는 7pt 정도.

“그, 글씨가 조금 작습니다.”

그러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작네.

글자 크기 줄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어느 기업이든 그 이유를 걸고넘어질 테니, 염려가 될 만도.

‘중퇴’ 옆에는 없던 메모가 붙어 있었다. 진우가 인사팀 직원들 모르게 추가한 모양이다. 은도는 메모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눈으로만 읽었다.



「경영학과 이순호 교수의 비리(성추행, 학생회비 횡령, 특정 학생 대기업 취업과 관련된 편애)를 인지. 대자보를 붙이고 언론에 보도를 요청한 이력이 있음.」



아아, 그 이유.

……용감했네.

오지랖도 넓고.

은도는 메모지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다정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진우가 가장 마지막 선택지에 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향을, 너무 잘 파악했잖아.

왠지 달라 보인다.

“왜 중퇴했어요?”

대충 이유는 예상됐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별다른 뜻 없이 물어본 겁니다. 궁금해서.”

안심시키려는 의도였으나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망설이는 눈치였다.

“면접 결과에 지장은 없을 테지만, 껄끄럽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고요.”

“저와 맞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지체 않고 바로 대답했다. 은도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빙글 돌리며 물었다.

“단지 그 이유?”

“……예.”

마지못해 꺼낸 대답이었다. 그녀가 작은 손을 작게 말아 쥐었다.

긴장했구나.

은도의 무미건조한 눈빛에 미약하게나마 흥미로움이 스쳤다.

일반적인 기업들은 융통성 없는 직원을 골칫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감쳐물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됐다.

은도는 덤덤하게 감상평을 말했다.

“좋네요.”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뭐가 됐든 나쁘지 않았다. 마침 융통성 없는 사람이 필요하던 차였으니까.

평소 같았다면 개인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고 바로 실무와 관련된 질문으로 넘어갔겠지만, 가만 보고 있자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성과면 중퇴를 감수하더라도 더 높은 기업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원한 동기. 물어봐도 됩니까?”

“잠시 머물더라도 계약 기간 동안만큼은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았다는 듯, 면접 직전까지 달달 외운 티가 확연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 복지 때문이란 뜻이다. 불안정한 프리랜서의 최대 약점을 모르고 선택하진 않았을 테지만, 여자는 지쳐 보였다.

“아, 이거 어쩌죠. 적어도 나는 송다정 씨 편하게 일 시킬 생각 없는데.”

뭔가 한참 착각했네. 은도의 턱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복지 좋은 이유가 괜히 있다고 생각합니까?”

중견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성가구>에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은 굉장히 많았다. 이유는 그녀의 말처럼 ‘복지’ 덕분이었다. 물론, 그 속사정을 알고 나면 말이 달라진다. 현실은 복지를 누릴 시간보다 업무량을 감당 못 해서 때려 칠 확률이 더 높았다.

은도는 대답 없는 그녀를 가만히 건너보다가 예정에 없던 질문을 불쑥 던졌다.

“계약 기간이 끝난 다음엔, 다른 계획이라도 있습니까.”

“아직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대책 없네.

“보니까, 특기와 취미에 ‘일’이라고 적었던데.”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다만.

은도는 이력서를 다음 장으로 넘기려다 말고 날렵하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력서에 장난치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고.”

날아든 매서운 눈빛은 마치 진실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서 다정은 흠칫했다.

“하나만 묻죠.”

“두 가지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재치 있는 다정의 답변에 무의식적으로 한쪽 입술 끝이 슬쩍 올라섰다.

“송다정 씨 일하는 방식과 인성이 마음에 들었다 치고.”

그가 다정을 꿰뚫듯 직시했다.

“내가 만약 계약이 끝난 후에도 계속 내 곁에 남아 달라 하면.”

안목. 내게도 그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렇게 해 줄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승부수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