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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자하크(1)]

나는 그와 ‘통하는‘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위대한 샤 티르의 수줍은 고백 中-
다각!
그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듯 이번에도 역시 혼자다. 이제 그림자나 다름없는 말(이름이 뭐였는지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이 곁에 있었지만 혼자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그가 차지하는 존재감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미약하고 허무하기만 하다.
-움직이고 있다.
듣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일부러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소리 내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기에 그 짧은 한마디조차도 새삼스러웠다.
-사막.
샤나메가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있는 모래‘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 사실을 느끼기가 무섭게 그는 홀린 듯 바람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를 행동하게 만드는, 샤나메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잊혀진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게 되리라.
-그런데…… 너는 누구지?
황금빛 달, 타후티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 안에 오롯이 맺혀있는 것은…… 모래 위를 걷고 있는 소년. 누구지, 너는?
“으아아아아……. 지겹다, 지겨워. 모래, 모래, 또 모래. 가도 가도 오직 모래. 밤이고 낮이고 온통 모래밖에 안 보이다니 너무한 거 아냐?”
참다 참다 티르는 마침내 폭발해버렸다.
무사히 아덴부르크를 벗어나 남쪽으로 남하한 것까지는 좋았다. 작긴 했지만 아덴부르크 이외의 도시를 보는 재미도 있었고 바다가 아닌 산을 넘는 맛도 괜찮았다. 그런데 막상 하 투란으로 이어지는 사막으로 들어서면서부터는 재미고 뭐고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첫날이야 사막이 나름대로 신기해서 견딜 수 있었다 치자.
고운 금가루 같은 모래와 지평선 위로 뜨고 지는 해. 쏟아질듯 눈부신 별을 보고 감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열흘 내내 똑같은 것만 보게 될 줄을 누가 알았나.
“돌겠어, 진짜. 사막에는 오아시스 같은 것도 있다던데 오아시스는커녕 왜 자꾸 똑같은 모래만 나오는 거냐고.”
“아, 오아시스를 원하시는 겁니까? 으음, 아쉽지만 이 사막에 오아시스는 없습니다.”
“엉? 어, 없어? 왜?”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 왜 여기 있는 거냐? 누구 맘대로!
티르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들듯 다그쳐 물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두 쪽 내놓고도 실실 웃던 사람이 바로 하라였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의 뇌리에 ‘공포‘란 말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만큼 그는 지루했고 더웠으며 또한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것도 자꾸 보면 익숙해져서 어느 날인가는 ‘또 지랄이네‘ 하고 마는 것처럼 그도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말도 안 돼!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라니? 그럼 이건 반쪽짜리 사막이란 말인가?”
“후훗. 반쪽짜리 사막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막이랍니다.”
“장난해? 사막이 어떻게 움직인다는 거야? 설마하니 저 사람들처럼 사막에 발이 달려서 우리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티르의 손가락이 당돌하게 까딱거리며 등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라의 고개가 슬쩍 돌아갔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큰소리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보란 듯이 따라오고 있는 사내들이 있었다.
“어이, 오늘도 날씨가 좋지?”
“그것도 인사라고 하시는 겁니까? 더운데 기운빼지 마시고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에잇! 자일로스, 저놈을 베어버려라!”
“저, 전하아……!”
슈라 일행이었다.
용감무쌍하다 못해 무식할 정도로 끈질긴 의지의 카도니아인들.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출발한 지 딱 이틀째가 되던 날부터 뒤를 따라오기 시작한 그들이 혹처럼 아직도 뒤에 달랑 붙어 있다.
“흐음, 정말 못 말리는 분들이군요.”
“모르긴 해도 쉽게는 포기하지 않을 걸?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봐, 주인. 이제 그만 저들에게 나를 양보하는 게 어떨까?”
“호오, 그러길 바라십니까?”
“매우.”
워낙 고가에 팔린 데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따라나서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졸졸 따라오고 있는 슈라 일행에게 가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서서 그들을 따라가고 싶을 정도다.
“내 사정은 말했잖아. 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이렇게 한가하게 사막이나 건너고 있을 시간이 내겐 없어. 물론 당신이 투자한 돈을 떼먹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돌아만 가면 금방 갚아줄 생각이라고.”
“후후, 이상하군요. 저는 분명히 하 투란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그분이 티르메네스님 당신의 ‘친 형님‘이라는 사실도요.”
“그게 뭐?”
“티르메네스님, 당신은 어째서 친형님보다 남이나 다름없는 그들을 더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그거야…….”
어쩐지 거짓말 같아서 그러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믿고 싶지 않다.
사막으로 들어서면서 지루한 밤이 이어지자 하라는 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부터 아덴부르크를 찾은 이유 그리고 그를 찾아온 과정과 그가 알지도 못하고 있던 그의 형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가 줄줄이 나오게 된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티르의 질문 하나 때문이었다.
-날 왜 샀지?
나리만은 평소부터 워낙 지랄 맞게 그를 노리고 있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슈라는 그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나섰으려니 짐작하고 있다. 그런 두 사람과 달리 하라의 용건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노예 상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도 아니었고 그러고 나니 그날 들었던 ‘모시러왔습니다.’라는 말이 덜컥 걸렸다. 처음부터, 하라는 그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 점이 의심을 더더욱 부채질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용할 생각으로 샀다고 말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거야. 그런데 형이라니? 난 잠깐 동안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생각내지 못했을 만큼 놀랐어. 내게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있을 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틀림없이 계십니다. 그분은 내내 당신을 기다리고 계셨답니다. 그건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요.”
“……내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쩔 거지?”
티르는 하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 아직은. 그것은 망설임일 수도 있고 혹은 두려움일수도 있었다. 만나서 확인하게 되면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바라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싫어.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나는 바라에게 아직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니까.’
신세내력을 밝히는 것이나 혹시 있을 지 모를 친 가족을 찾는 일은 그 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그의 허락을 받은 그 후의 일. 그런데 갑자기 그는 형이라는 자를 찾아가고 있었다.
“두려우십니까?”
“…….”
“설령 죽을 만큼 두렵더라도 꼭 만나셔야 합니다. 그분을 만나신다면, 잠시나마 하찮은 인간을 가족으로 여기신 당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실 겁니다.”
“부끄럽다? 부끄럽다니. 흥, 그런 일은 없어!”
티르는 버럭 소리쳤다.
누가 뭐래도 그들은 가족이었다. 비록 나칼이 사고를 치고 바라가 그를 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 세월동안 그들은 가족이었고 티르는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노예가 되어버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이 있는데…….”
“……?”
“내 가족들은 절대로 하찮지 않아. 알겠어?”
그래, 처음부터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천한 인간이라는 둥, 우아하지 못한 생물이라는 둥. 나아가서는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까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신분이기에 툭하면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는 건가. 티르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쳇, 왕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혼잣말처럼 궁시렁 거리며 티르는 거칠게 카멜루스(낙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리곤 횅하니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등짝을 하라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싸웠나?”
“제가 보기엔 삐친 것 같습니다만.”
“왜 삐쳤지?”
“보나마나 성질 좀 건드렸다고 팩 토라진 게 틀림없습니다, 전하. 저 꼬마가 원래 성격이 까칠하기는 했잖습니까?”
“아, 그런가?”
자일로스의 말에 슈라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과히 좋다고 말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가 보기엔 제법 귀여운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런 것이 보이라는 법은 없으니까.
“아니, 저 자는 왜 우리 꼬마의 성질을 건드리고 지랄인 거야. 가뜩이나 날도 뜨거워 죽겠는데…….”
“우리? 전 빼주십시오. 전하의 꼬마만으로 충분해 보입니다만.”
“무슨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하고 그러냐, 이라즈? 내 꼬마면 당연히 네 꼬마도 되는 거지. 더구나 여기까지 오는데 너도 한 팔 거들었잖아.”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어쩔 수 없이 도운 것뿐입니다. 전하와 같은 등급으로 매도하지 말아주십시오.”
“이익. 자일로스, 아직도 저 놈을 안 베고 있는 거냐?”
“저, 전하아…….”
덤벼봤자 저 성격 날카롭고 솜씨는 더 날카로운 이라즈에게 칼자국이나 선물 받고 말 일이었기에 자일로스는 차마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애원과 함께 애처로운 눈물만 뿌리고 말았던 것이다.
둥그런 황금빛 달이 높이 뜬 밤이었다.
물을 수호하는 푸른 달 아나히타는 아직 나타날 시기가 아니라 하늘은 온통 타후티가 내뿜는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월의 밤. 쏟아질 듯 눈부시던 별들의 광채도 그날만은 잠시 빛이 죽었다.
그 달빛을 온 몸으로 받으며 하라는 바위에 기대어 누워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모래 움직이는 소리만이 고요히 흐르는 밤.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눈앞의 모래산은 저만치쯤으로 사라지고 없으리라. 그런 일쯤은 이 움직이는 사막에서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늘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모래산이 옮겨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하라는 조용히 눈을 떴다. 근처에 누워 잠을 자던 티르메네스가 또다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움직임은 아니다. 멍청이도 아니고…… 이 사막에서 혼자 어쩌겠다고 도망을 치겠는가.
그의 변화를 눈치 챈 것은 사막으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처음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눈동자다. 평소 티르의 눈동자는 틀림없는 코발트빛 푸른색이었다. 순수한 어둠을 타고난 주인과 달리 어둠의 힘도, 엘룬인들이 가진다는 특별한 능력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맑기만 한 푸른색.
처음, 그 사실을 확인하고 하라는 적잖이 의아해 했었다.
아덴부르크에서 그는 분명히 샤나메의 기운을 느꼈었다. 샤나메를 가졌고 그것을 움직인 자. 샤나메가 움직였다면 무언가 힘이 있다는 뜻인데 당시 티르에게선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의 실망감이란!
‘그래도 나쁘진 않다. 주인의 착한 아우로 남을 수 있을 테니.’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안도하기도 했다. 적어도 왕좌를 다투다 처참하게 희생되지는 않을 테니. 그런데 변화가 생긴 것이다. 숨 가쁘게 인간들의 도시를 지나올 때는 눈치 채지 못했던 변화가 사막에서는 아주 쉽게 드러났다.
시작은, 가끔 푸른 눈동자를 스쳐가던 황금빛 섬광이었다. 푸르던 눈동자가 황금색이 섞인 청금색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사막의 황금빛 모래 탓이려니 여길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변화였다. 그러던 것이 밤이 되자 완연한 황금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동시에 미간에서 드러나는 세 개의 불꽃 무늬.
선명하게 느껴지는 샤나메의 기운과 부화를 앞둔 힘이 멍하니 선 그를 와락 덮쳐오던 순간이었다. 그 소름끼치던 순간을 기억해내고 하라는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시작됐다!’
하라의 시선이 급하게 티르를 찾았다.
유령처럼 소리 없이 일어선 티르가 달을 향해 길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날아갈듯 발끝으로 서서 팔을 쭈욱 뻗고 작게 하품을 한다. 그리고 씨익 그림처럼 그려지는 미소.
눈동자는 어느새 찬란한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미간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세 개의 불꽃무늬도 타오르는 황금색이다.
‘눈이 부시군.’
그가 뿜어내는 순수한 힘의 색깔 앞에서 하라는 희미한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또다시 놓쳐버린 건가?”
하라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힘을 열어 사방 백 큐빗 안을 모조리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그림자의 끝자락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젠장!”
저만치 떨어져 자리를 잡은 일행들도 그를 놓쳤는지 잠시 소란이 일었다. 그들도 티르의 변화를 벌써부터 눈치 채고 밤바다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었던 참이니 꽤나 허탈하긴 할 것이다.
“적어도 나만 허탕을 친 것은 아니로군요.”
“이봐아!”
혼자만 낭패를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위로로 삼고 다시 주저앉으려는데 저쪽 일행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를 소리쳐 불렀다.
“야, 이 멍청아! 코앞에서 놓치냐?”
“머, 멍청…… 당신들도 놓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야 이만큼이나 떨어져 있었으니까 손도 못 뻗은 거고 넌 바로 코앞에 있었잖아!”
“아, 아니 그게…….”
“사람 두 쪽 낼 줄은 알고 5탈란톤이나 하는 꼬맹이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모르다니! 모래에 코 박고 죽어, 이 자식아!”
펄펄 날뛰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말에 하라는 대꾸할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이 새끼, 우리 꼬마 안 돌아오기만 해봐. 그땐 너도 모래 속으로 사라지게 해줄 테다!”
“고만 떠들고 잠 좀 잡시다, 전하.”
“이라즈!”
“아침엔 돌아오잖습니까. 전하께서도 밤 마실 열심히 다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불나방처럼 싸돌아다니며 순진한 레이디들을 여럿 울리셨지요.”
“아니, 지금 이 상황은 다르잖아!”
“같은지 다른지 어떻게 아십니까?”
“……!”
“그냥 주무십시오. 거기, 당신도 그만 주무십시오. 숙면은 정신건강을 아름답게 지켜줍니다.”
바락바락 소리치고 있는 자는 둘째 치고 자다 말고 빼꼼 일어나 다다다다 제 할 말만 빠르게 내뱉어놓고 다시 털썩 드러눕는 사내 때문에 하라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뭐, 저런 인간들이 다 있는 거지? 안 그래도 귀찮았는데 죽여 버릴까?
“달밤에 힘쓰게 하지 말고 그냥 자, 이 자식아.”
“……!”
바락바락 소리치던 자가 어쩔 수 없이 다시 주저앉으며 툭 던진 말에 하라는 흠칫 몸을 굳혔다. 짧은 순간, 발끝까지 서늘하게 다가왔다 사라진 기운이 그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천한 인간 따위가 가질 수 없는 힘.
‘너희들, 정체가 뭐지?’
갑자기 색다른 궁금증에 사로잡히는 하라였다.
“왜 따라와?”
개구쟁이 요정처럼 황금빛 모래 위를 사뿐사뿐 걷던 소년이 물었다. 그래서 사내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말했다.
-필요하다.
“내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 소년이 아닌 샤나메다. 어둠을 밝히는 횃불처럼 굳이 따라다니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빛. 오직 하나뿐인 빛. 그 빛을 잡으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여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코앞으로 다가선 지금은…… 확신할 수 없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사내를 소년은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또 갑자기 묻는다.
“심심해?”
-…….
“그럼 나랑 놀자.”
논다? 순간 ‘논다는 게 뭘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년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것은 놀랍도록 맑은 웃음소리여서 그는 조금 놀랐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지?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나 당신 이름도 모르네. 뭐라고 불러야 해? 난, 티르메네스야. 티르라고 부르는 걸 허락해 줄게. 당신은?”
-……자하크.
“자하크! 멋진 이름이다.”
멋진…… 이름이었던가? 달 아래서 환하게 웃음 짓는 소년을 보며 자하크는 새삼 자신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오랜 시간동안, 다른 이는 물론이고 스스로도 불러본 적이 없었던 이름. 흐릿하게 남은 유일한 기억.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린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낯설면서도 두근거린다. 갑자기 특별해진 느낌. 자하크는 그 생소한 느낌 앞에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거 알아?”
까마득하게 이어진 사막을 눈으로 훑던 소년이 갑자기 그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막엔 오아시스가 없대. 반쪽짜리 사막이야.”
-반쪽짜리?
“응. 사막엔 오아시스가 있어야 하는 거거든. 바라가 그랬어. 사막은 물을 품고 있어서 아름다운 거라고. 물이 있으면 오아시스도 있어. 근데 여긴 없잖아. 물도 없고 오아시스도 없어. 반쪽이야.”
-있다.
“뭐가?”
-물.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일이라며 시큰둥하게 투덜거리는 소년을 향해 자하크는 마치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듯 가만히 진실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하면 혹시나 다시 웃어줄까 싶어서.
“물이 있다고? 어디에? 보이는 건 온통 모래뿐인데…….”
-모래 밑에 있다.
“이 넓은 곳이 온통 모래잖아. 그런데 어디쯤의 모래 밑에 있다는 거지?”
-너는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소년은 단지 무심한 것뿐이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살피면 금방 알 수 있다. 아직 부화하지 못한 힘이지만 그 정도를 알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었다.
자하크는 천진하게 올려다보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어 모래언덕이 꿈틀거리는 사막의 지평선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