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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참변(2)]


어딘지 귀에 익은 이름이기에 무의식적으로 ‘아문‘이라는 성을 붙여봤는데 진짜로 그 이름이 맞았나보다. 그 이름의 주인이 왔었단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티르를 보다 그는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언제 갔어?”
“바, 방금. 얼마 안됐어. 왜?”
“직접 확인해야겠다. 젠장, 그 사람이 왜…….”
“가, 같이 가!”
둘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이미 한발 늦어 슈라 일행은 말끔하게 사라진 뒤였다. 한마디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고나 할까?
영문도 모르고 막시무스를 따라 나와 괜히 저택 주변을 샅샅이 뒤지다 티르는 철퍽 주저앉는 그의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그자가 카도니아 사람인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워야 하는 일인지는 몰랐다. 대체 정체가 뭐기에?
“아는 사람이야? 유명해?”
“하, 유명? 이 바보야, 정말로 모르겠냐?”
“응.”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아문‘이라고.”
“아문? 아, 설마 황족인가?”
티르는 간신히 카도니아 황족의 성(姓)을 기억해냈다.
카도니아의 황족은 건국의 그날부터 스스로를 주신인 바람-아문의 자식이라고 선언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신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해 티르도 약간의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뭐라더라? 신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조금씩 특이한 외모와 능력을 가졌다고 했었던가?
“그 자식 생긴 거 하나는 멀쩡하던데…… 가짜 아냐?”
“진짜 황족 맞을 거다. 돌지 않고서야 그 이름을 도용할 미친놈은 없을 테니까.”
“누군데?”
“카도니아의 황태자.”
“뭐?”
“슈라 알렉산드로스 아문. 카도니아의 황제가 총애해마지 않는 황태자 나리시란 말이다. 넌 그런 사람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거다, 티르. 축하해줄까?”
“……!”
티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설마하니 황태자였을 줄이야. 아니 황태자가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거지? 퍼뜩 샤나메가 떠올랐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저 우연히 마주친 것에 불과한 사람이니 아직은 그것에 대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돌겠네.”
이거 진짜로 간첩으로 몰리는 거 아냐?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지는 것 같아 한손으로 벅벅 머리를 긁다가 마침 품에 든 선물 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뭔지 확인을 안했네. 묵직하던데…….”
“이리 줘봐.”
품에서 꺼내기가 무섭게 홱 가로채간 막시무스가 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었다. 그러자 툭! 푸른 보석을 박은 장신구 하나가 떨어졌다.
“에, 팔찌?”
“거창하군.”
티르의 코발트빛 눈동자와 너무도 닮은, 라피스 라줄리가 박힌 두툼한 황금 팔뚝찌였다. 막시무스는 그것을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안쪽에 슈라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잠시 들고 빤히 바라보다 그는 곧 체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주었고 티르는 받았다. 이것 또한 티르의 운명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막을 수 없는.
막시무스는 그것을 말없이 티르의 왼쪽 팔뚝에 채워주었다. 잘 어울렸다. 생각보다 더. 못 받을 걸 받은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팔뚝을 노려보는 티르를 보다 그는 피식 웃었다.
“그럴 거 없다, 작은 도련님. 그냥 생일 선물일 뿐이라고 생각해. 조금 특별한 사람한테서 받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쳇, 한바탕 난리를 쳐놓고선? 속도 좋아.”
“하하, 들어가자. 어르신께서 거한 선물을 준비하셨다든데 구경해야지.”
뭐, 별일이야 있으려고.
애써 웃으며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바라가 준비한 ‘생일선물들‘과 조우했다.
금발머리, 빨강머리, 아름다운 흑발. 흰 피부, 갈색피부, 상아색 여린 피부. 어린 소녀, 청순한 처녀, 농염한 요부. 열손가락을 넘어가는 아름다운 여자 노예들이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 바라?”
“킥킥. 이 새끼야, 놀랐지? 자, 이 할아비의 선물이다.”
촤르륵! 금돈을 쌓아놓고 왕처럼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바라가 막 들어서는 티르를 가리키며 선언했다.
“오늘 내 손자 놈의 총각을 차지하는 아이에게 이것을 주겠다!”
“헉!”
오늘의 진짜 복병이 그를 덮치려는 순간이었다.
왜 잠이 깨었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저절로 떠진 눈에 티르 자신이 더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한밤중. 잘 자다 말짱한 얼굴로 깨어난 티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타박타박…….
까만 어둠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마치 어둠의 일부처럼 보이는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천으로 온몸을 가린, 심연의 늪처럼 깊디깊은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
아름다운 칼로 대지를 두드리며 온몸으로 바람을 맞던 사내가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티르는 숨이 막혔다. 컥컥! 진땀을 흘리며 버둥거리자 마침내 사내가 입을 열었다.
-샤나메!
“헉!”
번쩍 눈을 떴다. 부산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어슴프레한 어둠 너머로 희미하게 낯익은 천장의 무늬가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쏟아졌다.
“휴우, 꿈이었잖아?”
티르는 식은땀이 잔뜩 맺힌 이마를 닦으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하루 종일 시달렸더니 꿈까지도 엉망이었다. 여자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도망을 쳤던지…….
“근데 그 자식은 왜 꿈에까지 나타나고 지랄이야?”
아무리 인상 깊었다지만 꿈에서 만큼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하마터면 자다가 숨이 넘어갈 뻔했다. 생각할수록 여러모로 건강에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멍하니 생각하다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샤나메를 찾아들었다. 그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샤나메가 떠올랐다. 느낌이 서로 닮았기 때문일까?
“대체 정체가 뭐지?”
아무런 변화 없이 여전히 말끔하게 빛나는 구슬을 손안에서 굴리다 내려놓고 티르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잠을 더 자기는 글러버렸다. 새벽이니 곧 날이 밝을 것이다. 그때까지 산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꺄아아악!
“응? 뭐지?”
막 회랑 밖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찢어지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갑자기 저택을 울렸다. 바라의 처소 쪽이다.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불길한 공기가 그를 확 덮쳐왔다.
“바라?”
섬뜩한 예감에 몸을 떨며 티르는 달리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작은 도련님!”
“뭐지? 무슨 일이야? 비명소리를 들었다. 누가 지른 거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의 처소입니다. 소리가 그쪽에서 들려왔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를 알아본 노예 몇몇이 숨 가쁜 표정으로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역시 바라의 처소 쪽에서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바라!”
비명처럼 부르짖으며 티르는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막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누군가에 의해 제지당해 도로 밀려나오고 말았다.
“멈춰라!”
“누구…… 나칼? 무슨 일이야? 누가 소리를 지른 거지? 바라는?”
“조용히! 조용히 해라, 티르메네스.”
악 다문 입술 사이로 서슬 퍼렇게 흘러나오는 한마디. 나칼이 문 앞을 딱 가로막고 서 있었다. 티르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런 그를 나칼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원망이라도 하듯이. 그러다 곧 말없이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그때까지 가리고 있던 안쪽을 보여주었다.
“헉!”
저절로 숨이 들이켜졌다. 다급한 티르의 시선이 바닥에 길게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로 내리꽂혔다.
“막시무스?”
양손과 품에 잔뜩 피칠을 한 막시무스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막시무스가 왜? 당황한 티르는 막시무스 곁에 선 채 창백하게 굳어있는 키아를 지나 당장 바라가 누워있을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온통 피투성이가 된 이불과 밖으로 삐져나와 힘없이 늘어져있는 누군가의 창백한 손이 보인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보는 대로.”
보는 대로? 보는 대로라니? 그럼 이게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침대 가에 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몸을 펴고 돌아섰다. 덕분에 침대위의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얀 얼굴을 한 바라가 누워 있었다. 그런 그의 몸에 꽂혀있는 것은…….
“부지(bhuj)?”
그의 전투 도끼였다. 그의 서재에 있어야 할.
기병용으로 만들어진 긴 전투도끼는 침대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도끼와 한 세트로 만들어져 손잡이에 숨겨 넣게 되어있는 단검이 바라의 몸을 침대에 단단히 붙들어 놓고 있다.
단검에 찔린 자리에서 새어나온 피가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려 침대를 흠뻑 적셔놓고 있었다. 티르는 덜컥 겁이 났다.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티르.”
“뭐? 무슨 뜻이야?”
“…….”
“무슨 뜻이냐고 묻잖아! 설명해. 설명하란 말이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나칼은 설명 따위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나보다. 그는 달려드는 티르를 발로 걷어차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탄탄, 막시무스 놈을 묶어 감옥에 처넣어라. 그리고 티르메네스를 끌고 가 방에 가둬!”
“예, 도련님!”
“나칼!”
“입 닥쳐라, 티르메네스. 막시무스는 현장에서 잡혔다. 시의 심문관이 그를 심문할 것이다. 네 죄는 그때 밝혀지겠지.”
“뭐, 뭐라고? 죄라니? 무슨 죄?”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
단호하게 떨어진 냉랭한 말에 티르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단단히 딛고 서있던 발밑의 땅이 아스라이 꺼져 들어가는 느낌. 충격으로 하얗게 굳어있는 몸을 탄탄이 잡아채 방에서 질질 끌어내고 있었지만 티르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뭘 안다는 거지?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이건 아니야. 막시무스가…… 그럴 리가 없어. 바라! 막시무스! 나칼! 나카아아알!!”
“당장 치료사를 불러라! 할아버지께서 암습을 받으셨다!”
절규하며 끌려가는 티르를 외면하고 나칼은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와 함께 카비아니 가에서 시작된 왁자한 소란이 빠르게 도시 전체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으음…….”
막시무스는 머리가 아팠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듯 하다. 과음할 생각은 없었는데 잔뜩 흥에 겨운 바라의 기분을 맞추느라 한잔, 두잔 마시던 것이 그만 한도를 넘어버렸나 보다.
“하여튼 노인네가 기운도 좋아. 끄응.”
보통 때보다 너무 빨리 취해버렸다는 것까지 기억해내고 막시무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자신이 자빠지던 순간까지도 바라는 말짱하게만 보였었다. 무슨 노인네가 술이 그렇게 센지 어지간한 사람은 상대도 안 될 정도다.
간밤의 기억을 더듬다가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보나마나 바라의 방 한쪽에 구겨져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젠장! ……응?”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려다 막시무스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일인지 몸이 뜻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황급히 눈을 뜨고 몸을 살폈다. 그러자 꽁꽁 묶이고 피칠이 된 손과 족쇄가 채워진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는 갇혀 있었다. 잡아온 노예들을 임시로 가두어두곤 하던 저택의 감옥이었다.
‘내가 왜 이런 몰골로 이곳에 갇혀있는 거지?’
깨질듯 아픈 머리를 벽에 갖다 박으며 막시무스는 숨 가쁘게 자문했다. 설마…….
“바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충격으로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붉게 물든 손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곧 새카만 충격이 다가와 와락 그를 덮쳐눌러 버렸다.
하라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조금쯤은 기대를 했었는데 결국은 일이 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엊그제 카비아니 가에 입성해서 그 작은 왕자를 만났어야 했다. 그리고 주인의 선물을 전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오늘까지도 카비아니 가 근처에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암습이라…….”
그런 마당에 어제 아침에 전해진 소식이란 것 좀 보라지.
그가 만나 보았던 막시무스란 자가 카비아니 가의 늙은 당주를 암습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그 일의 배후가 문제의 작은 왕자란다. 곧 심문이 있을 거라나?
그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하라는 그만 소리 내어 크게 웃어버렸다. 살다보니 이런 재미난 일도 겪는다.
“인간들이란…….”
지독히도 탐욕스럽고 어리석다. 목적을 위해 혈육을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할 만큼 잔인하기도 하다. 뭐,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방법이 너무 치졸하다. 생긴 것만큼이나 우아하지 못한 생물들 같으니라고.
뜬금없이 발생해버린 일이긴 했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에겐 그랬다. 그의 목적은 작은 왕자를 하 투란의 주인에게로 데려가는 것. 이제 왕자가 버려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음?”
문득, 예민한 그의 감각 안쪽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건? 설마…….”
하라는 벌떡 일어나 감각을 더 예리하게 곤두세웠다. 방금, 낯익은 기운을 가진 자가 근처를 지나갔다. 빠르고도 무심하게. 그다! 틀림없는 그였다! 익숙한 기운의 끝을 느낀 하라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흡사 기쁨 같은.
“아아, 당신…… 이십니까?”
그가 근처에 있었다. 바로 거기. 작은 왕자 가까이.
히이이잉!
멀리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은 틀림없이 시커먼 그림자처럼 보이는 흑마일 터였다. 그리고 말위에 앉은 자는 언제나처럼 무심히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고 있을 것이다.
-찾았다!
하라는 기쁘게 소리쳤다. 뜻밖의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