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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샤나메(9)]



“쿨룩쿨룩! 켁켁!”
“괜찮으십니까, 어르신?”
“쿨룩! 아아, 됐다. 계속해봐.”
바라는 모로 누워 한쪽팔로 머리를 받친 채 포도를 따먹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집사장에게 지난 한 달간의 수입에 대해 세세한 보고를 받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포도를 선택하는 게 아니었나보다. 하마터면 포도알이 목구멍이 걸려 이승을 하직할 뻔 했다.
‘안되지, 안 돼.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데 이 젊은(?) 나이에 포도알 하나 때문에 사망할 순 없지. 그럼 포도는 이제 그만 먹어야 하려나? 맛있었는데…….’
“이번 사냥의 손실이 꽤 커서 달리 소득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르신. 손해만 무려 2탈란톤 하고도 12무나가 넘으니까요.”
‘그럼 이제 뭘 먹지? 으음, 정력에 좋은 게 뭐가 있더라?’
손해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바라는 요즘 들어 점점 입맛이 좋아지고 있었다. 역시 회춘하려는 징조인가? 어쩐지 뿌듯한 것이 한 십년쯤은 젊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나칼 님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사냥꾼들에게 지불할 노임은 아직 계산에 넣지 않…….”
“미친놈!”
“예?”
“역시 그 놈은 아니야.”
“무슨 말씀이신지?”
“흥! 눈치 없고 멍청해서 제가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쫓겨날 그릇밖에 안 되는 놈이 욕심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놈은 어지간히도 소견머리가 좁다. 생각도, 눈도 제 작은 손바닥 안 밖에 볼 줄 몰라 번번이 그의 기대를 깨놓고 있었다. 뿐인가? 고작 하는 짓이란 것도 그렇다.
건달 같은 놈들을 돈으로 사 눈 가리고 아웅 하듯 대장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거야 돈 떨어지면 도로 잡아먹히게 되어있는 자리 아닌가. 모르긴 해도, 그놈이 당주라도 되는 날엔 제 입이 아닌 그 하이에나 같은 놈들의 입만 채워주게 되리라. 바라의 걱정은 그것이었다.
“이 많은 재산 물려줘봤자 감당 못하고 등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놈들의 배나 채워주겠지. 답답한 새끼. 티르의 반만 따라가도 생각을 다시 해보겠구먼.”
“어, 어르신?”
“하긴 뭐가 걱정이야. 내게는 고 귀여운 티르 놈이 있는데. 내가 키우긴 했지만 그 새끼는 정말로 통이 커. 내 재산을 다 털어 바쳐도 모자라다고 징징 댈 놈이거든? 그러니 제 성에 찰 때까지 맘껏 긁어모으겠지? 푸하하하.”
“암만요. 티르 도련님이야 보통내기가 아니시지요.”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돌아오는 고놈 생일잔치는 거하게 해주련다. 으음, 이제 열여섯이니 여자를 알 나이가 됐군. 좋아, 솜씨 좋은 여자노예 몇을 추려봐라. 이번 기회에 총각 딱지를 떼어 줄란다. 킥킥, 고놈 놀라자빠지겠지?”
바라는 다시 유쾌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티르가 있으니 나칼 놈이 만들어대는 손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칼이 쓰는 것 정도는 티르가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테니까.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해주리라.
‘고놈이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나칼을 버리지는 않겠지. 성질은 좀 부리겠지만 아마 그렇게 평생을 돌보아 줄 거다. 암, 누가 키웠는데. 푸하하하.’
바라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제길!’
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나칼은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결국 어떤 짓을 해도 티르만큼 바라의 주의를 끌 수 없다는 건가? 무슨 변명을 할까 전전긍긍하며 보낸 하룻밤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한번쯤은 똑바로 봐주길 원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으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입술사이로 희미하게 새어나왔다. 정말로 이럴 수는 없었다. 왜 늘 자신이 아닌 티르가 먼저란 말인가. 왜, 왜! 자신이 밀려나야 하는가. 티르가 장남의 아들, 적장자로 태어난 후계자라는 이유로는 부족했다.
대체 놈에 비해 자신의 무엇이 모자라 이런 대접을 받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바라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왜 그것이 번번이 외면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다 같은 핏줄이고 손자인데!
‘바라, 후회하시게 될 겁니다.’
나칼의 눈에 핏발이 섰다.
“도련님!”
“조용히. 사냥꾼들을 모아라, 탄탄.”
돌아서는 그의 입술에서 진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젠장!”
티르는 완전히 코가 빠진 몰골로 늘어져 있었다.
로무네스 일당은 져버렸다. 그는 돈을 날렸고 얄미운 나리만 놈은 오늘 딴 돈으로 탑을 쌓고 놀지도 모른다. 돈을 날렸다는 사실보다 기뻐 날뛸 나리만 놈 때문에 배가 아팠다.
“아아,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거야. 젠장, 젠장! 다 이겼는데 로무네스 놈이 막판에 고꾸라져 버리다니. 멍청한 놈들!”
“어쩔 수 없었어, 작은 도련님. 상대가 워낙 능숙했잖아. 그 자식들 사냥은 않고 만날 판크라티온만 해댔나봐.”
“후후, 나리만이 무언가 수를 쓴 게 틀림없어. 그 교활한 놈이 그냥 있을 리 없잖아?”
“아아, 그러거나 말거나 어쨌든 판은 끝나버렸어. 우린 졌다고, 티르. 고통스럽지만 인정할 건 그만 인정하자.”
“아악! 짜증나.”
치미는 성질을 못 이기고 미친 듯이 버둥대다가 갑자기 발딱 일어섰다.
“쳇, 하는 수 없지. 이미 끝난 판에 목을 매는 건 우스운 짓이니까. 하지만 다음번엔 기필코 눌러버리고 말겠어! 돌아가자, 다니무스.”
“하하, 역시 시원시원하다니까!”
“웃기지 마. 아직도 속이 다 안 풀렸어.”
“거짓말.”
“진짜라니까. 오늘 밤에 잠자기는 다…… 응? 왜 그래, 막시?”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앞장서서 길을 뚫던 막시무스가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곤 ‘끄응‘ 못마땅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구겨진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어쩌냐, 티르? 나리만이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에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경기 내내 보이지 않던 나리만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티르는 당장 이맛살을 구겼다. 일부러 매고 나온 전투도끼 쪽으로 슬금슬금 손이 올라갈 것만 같았다.
“참아, 티르. 먼저 흥분하면 지는 거라고.”
언제나 침착한 다니무스가 지그시 그의 손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끓어올랐던 분노가 차가운 이성에 눌려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됐어. 이제 괜찮아.”
“좋아. 저런 인간은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최선이란 걸 항상 잊지 마.”
“흥! 놈이 내 성질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씹어뱉듯 대답해주고 티르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조금은 더 오만하고 건방져 보일 수 있도록.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만 나리. 막시무스입니다. 지난번에 뵀을 때 보다 더 건강해 보이…….”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우리 귀여운 티르메네스 카비아니 군이 아니신가?”
‘이 새끼가……!’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부터가 목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투실투실 살찐 중년의 나리만이 그래도 아는 얼굴이랍시고 인사를 건네는 막시무스를 재치고 대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미처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보석 반지를 잔뜩 낀 손으로 티르의 어깨를 덥석 잡아챘다.
“오오, 우리 티르군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군.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자로서 기쁘기 그지없네. 그래, 듣자하니 열여섯 번째 생일이 머지않았다지?”
“아아…….”
“하하, 열여섯이면 이제 사내로서의 재미를 알아갈 나이이기도 하지. 안 그런가?”
“아, 아마도.”
“어허, 수줍어하는 게로군. 하하, 처음엔 다 그런 거지. 하지만 곧 익숙해지게 될 거라네.”
화를 참기 위해 꾹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나리만은 큰소리로 껄껄 웃어젖히기 바빴다. 그러더니 또 야릇한 시선으로 그의 머리꼭대기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어 내리는 것이다.
‘이 새끼가 진짜!’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만님.”
“응? 자네는…….”
“다니무스입니다. 데메네스의 아들이지요.”
“호오, 그렇군. 데메네스는 평안하겠군. 이렇게 든든한 아들을 둔 덕분에 말이야.”
티르의 얼굴이 점점 더 벌개 지고 있는 것을 눈치 챈 다니무스가 재빨리 끼어들어 나리만의 시선을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언제 돌려졌었냐는 듯 나리만의 시선은 금방 티르에게로 돌아오고 말았으니까.
“이번 생일에 선물을 보내주고 싶은데 말이야. 뭐가 좋겠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해보게. 내 기꺼이 선물함세.”
“뭐, 별로…….”
네놈의 모가지!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꿀꺽 삼키기 위해 티르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덴부르크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나리만은 그 넘치는 금으로 화려한 저택을 짓고 그 안에 각국에서 구해온 미녀와 미동들을 모으고 있는 인간이었다.
주지육림 속에서 왕처럼 환락을 즐기기도 하고 그들을 이용해 높은 이들과의 줄을 만들어 소소한 권력을 얻기도 한다는 건 이미 누구나가 다 아는 일로 새삼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이제껏 모아들인 놈들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명망 높은 대 카비아니 가의 후계자인 티르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감히 네깟 놈이…….’
“아름다운 무희들을 보내줄까? 아니면 금으로 만든 동상이라도? 자네를 위해서라면 뭐든 아까울까? 크하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딴 것들은 이미 너무 봐서 질린 데다 아시다시피 저도 아쉬운 게 없는 몸이라서요. 피곤해서 이만 물러가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더 듣고 있다가는 순간 돌아버릴 것 같아 티르는 틈틈이 주워들은 말을 읊어놓고 재빨리 돌아섰다. 그러나 나리만은 생각만큼 순순히 그를 보내주지 않았다.
“벌써 간단 말인가? 이렇게 아쉬울 수가! 으음, 그래도 피곤하다니 하는 수 없군. 그럼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네. 그럼…….”
“아! 혹시, 순수한 넓적다리의 봉헌과 경건한 결합에 대한 지도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기별을 주시게. 경험 많고 명망 높은 인생의 선배로서 내 기쁜 마음으로 의무를 이행할 의향이…….”
뚝!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이 뒤집혔다. 티르는 망설임 없이 등 뒤로 손을 가져갔다. 전투도끼가 기다렸다는 듯 냅다 손에 잡혀왔다.
“넓적다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이 미친 새끼야! 오냐, 너 죽고 나 죽자!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죽여 버리겠다!”
“악! 티르!”
“작은 도련님!”
우당탕탕! 한바탕 요란한 소동이 일기 시작했다.
눈이 뒤집혀서 도끼를 꺼내들고 덤비는 티르와 그런 그를 말리기 위해 순간적으로 몸을 날리는 다니무스 그리고 그 둘을 덮쳐누르는 막시무스가 한데 엉켜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놀란 나리만이 몸을 움츠리면서 수십에 이르는 무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한꺼번에 몸을 날렸고 그 분주한 움직임에 퇴장하던 시민들이 뒤엉키면서 도미노처럼 줄줄이 자빠지고 있었다.
“으악! 사람 살려!”
“어어, 넘어간다아!”
“끄윽. 이 자식이, 너 얼른 안 비켜! 죽인다!”
“풉! 푸하하하하!”
경기장은 이제 난장판을 넘어 커다란 싸움판으로 변해가려하고 있었다. 그 요란한 소동의 한복판에서 시원하게 웃고 있는 건 역시 슈라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축제 아니 싸움판은 끝났고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티르 일행도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너덜너덜 해진 패잔병 몰골이긴 했지만.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참았다고!”
“아아, 그러셔?”
“그렇다니까. 막시도 들었잖아. 그 개 같은 놈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이봐, 다니무스 너도 들었지? 넓적다리가 어쩌고 하던 그 소리.”
“하아,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던 네 목소리는 틀림없이 기억이 난다, 티르.”
맥 빠진 대답에 티르의 기도 팍 죽어버렸다. 조금 더 참지 못하긴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돌았었다. 다니무스가 붙잡고 막시무스가 덮쳐누르지 않았다면 살인을 내도 냈으리라.
이게 다 그 썰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나리만 놈 때문이다. 욱 하는 성질을 알면서도 때마다 작정을 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건 바로 그놈이니까.
“다친 사람들 치료비에 무너진 경기장 수리비 그리고 놀란 나리만 나리에게 위로금까지. 아주 날려도 큰돈을 날렸으니 이 일을 어르신께 어떻게 고할 거냔 말이야.”
“쳇! 그러니까 위로금을 왜 줘야 하냐고. 희롱당하고 충격 받은 건 난데 왜 지가 위로금을 받아? 돼지 같은 놈!”
“성질 좀 작작 부려, 작은 도련님.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난 지금 사람들한테 하도 밟혀서 삭신이 쑤셔 죽겠어.”
“나도.”
“어이, 맨 밑에 깔렸던 건 바로 나야. 내가 더 아파.”
“넌 아파도 싸!”
“작은 도련님은 아파도 싸!”
잠깐 기가 살아나려다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는 두 사람 때문에 티르는 도로 패배자가 되고 말았다. 대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건가. 이게 다 문제의 나리만 놈 때문이다. 곧 죽어도 죄다 그 몹쓸 놈 때문이라고 티르는 꿋꿋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때였다.
가뜩이나 느릿느릿 움직이던 말이 문득 제자리에 멈추어 선다 싶어 고개를 들자 막시무스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앞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같은 말을 탄 탓에 그의 등 뒤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티르는 옆구리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물끄러미 앞쪽을 바라보았다.
“뭔데 그래?”
카비아니 가의 사유지와 이어지는 대로의 끝.
그곳에 말을 탄 웬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우뚝 서 있었다. 길 한복판을 딱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굳이 잡지도 않는 탓에 대체 누구에게 용건이 있는 지 알 길이 없는 존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천을 둘둘 휘감은 채 달랑 눈만 내놓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득달같이 티르의 신경이 곤두섰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사람,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꿀꺽. 마른 침까지 삼키며 티르는 허겁지겁 그를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사내는 흑단 같은 털을 가진, 보통 말보다 덩치가 월등히 큰 새카만 말을 타고 있다. 긴 천을 덮어쓴 탓에 눈만 드러난 커다란 덩치에 한쪽 손엔 바닥까지 닿는, 날이 대단히 살벌하게 번뜩이고 있는 이상한 칼을 쥐고 있었는데 그게 또 무척이나 특이했다.
창처럼 긴 손잡이에 폭이 넓고 긴, 한쪽에만 날이 있는 칼은 마치 활처럼 완만하게 휘어져 있었다. 다소 넓어 보이는 칼 면엔 검은색으로 이상한 문자를 그려 넣었고 날이 없는 등 쪽에는 구멍을 뚫고 화려한 장식을 달았다.
살벌하면서도 이국적인, 대단히 아름다운 칼이었다. 저절로 욕심이 생길만큼.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로 올라가며 살피다 어느 한부분에서 티르의 시선이 딱 멈췄다. 밖으로 드러난 유일한 신체의 일부분. 당연한 순서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티르는 그렇게 순수한 황금색을 본 적이 없었다. 태초에 신이 빚어 놓은 듯한,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무결한 황금빛을 품은 눈동자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순간 숨이 탁 막혔다.
시리고 따뜻하고 격렬하고 잔잔하고 잔혹함과 동시에 사랑스러운…… 이상한 감정의 파도가 한꺼번에 그를 덮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왜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거지?’
자신의 몸이 어느새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티르는 그렇게 낯선 감정의 파편들과 조우했다. 따각따각. 다시 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시무스는 그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기로 결정했나보다. 그에게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시…….”
“조용히. 그냥 간다.”
티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발견한 직후부터 이상하리만치 격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아프다고 제멋대로 말해 버릴까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처박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누구지? 누구야? 당신, 누구야?’
사내는 대답이 없었다. 다른 여타의 행인들처럼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붙잡지 않았다. 다만, 막 스쳐가는 티르를 따라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소리 없이 스윽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흘러나오는 희미한 한마디.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