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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샤나메(7)]

“여어~ 사촌!”
문득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싶더니 곧 두툼한 손 하나가 나타나 티르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나칼이었다. 문제의 나칼. 빌어먹을 사촌형.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돌아보지 않고도 단박에 정체를 알아챈 티르는 표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는 슬그머니 돌아섰다. 안타깝지만 그의 외모와 심오하게 잘 어울리는, 아방하기 그지없는 미소와 함께.
“오랜만이야, 나칼.”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나칼이 만날 붙어 다니는 수하 두엇을 거느리고 등 바로 뒤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더럽게도 반갑다, 인간아. 왜 사고를 치고 돌아와서 날 찾냐?
하도 싸돌아다닌 탓인지 부옇게 빛이 바랜 금발머리를 대강 틀어 묶고 짧은 튜닉위에 리넨 퀴레스(갑옷)를 입은 나칼은 티르의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여자의 그것처럼 가느다란 눈썹을 산처럼 삐죽 치켜 올리고 있었다. 쭉 찢어져 가뜩이나 사납게 보이는 눈을 착 내리깐 채로. 그래, 뭐가 불만이냐, 청년?
“형님한테 인사하는 법 정도는 진즉에 가르쳐 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잊은 거냐, 우리 이쁜이?”
“물론 잊지 않았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주둥이 쫙 찢어놓기 전에 이 손 치우시지?”
“하! 건방진 자식. 한 번 더 따끔한 맛을 보고 싶은 거냐? 바라가 있다고 해서 못 건드릴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티르. 누가 뭐래도 카비아니 가의 후계자는 내가 될 테니까.”
단단한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소리치는 나칼이 어쩐지 우스워보였다. 이 동부 투란 제국이 장자상속법을 따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똑같은 바라의 손자지만 티르보다 나칼이 다섯 살이나 더 많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티르는 바라의 장남 소생이고 나칼은 둘째 아들의 자식이었다. 어리다고는 해도 따지자면 티르가 더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다. 바로 제 1순위. 바라의 두 아들이 이미 오래전에 죽은 덕분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마도 바라가 직접 명령한 이번 사냥길에 자신감이 고무된 탓인 듯 했다. 어린데다 예쁘장하기만 한 티르보다 듬직한 자신을 더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안타깝게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티르. 내가 당주가 되었을 때 빈손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다면 얌전하게 굴어. 바라에게 괜한 소리는 말란 말이다. 알았냐?”
“충분히. 이제 그만 가도 될까, 형님?”
그래, 더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살짝 들어보이자 놈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졌다. 겁을 먹었다고 여겼는지 픽 웃으며 너그러운 척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기까지 했다.
‘저 바보. 열 살 때 쓰던 방법이 지금도 통한다고 생각한 거야? 내가 아직도 네놈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고 질질 울기나 하는 어린애로 보인다 이거지?’
돌아서면서 티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바라의 두 아들이 노예사냥을 나섰다가 나란히 비명횡사하면서 덜렁 남겨진 나칼과 티르는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인 바라의 곁에서 함께 크게 되었다. 그건 티르가 4살 되던 해의 일이었는데 그때부터 티르는 나칼에게 무던히도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바라가 자신보다 티르를 더 아낀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멍청한 자식. 내 탓이 아니잖아, 그건?”
욕을 하고 이를 박박 갈면서도 티르는 바라에게 조금 더 사랑받았다는 이유로 나칼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외롭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서로의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하나뿐인 할아버지의 시선을 좀 더 오래 붙잡기 위해 그들은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사람의, 친인의 따스한 체온이 너무나 그리웠기 때문에.
“그러게 왜 사고를 치고 지랄이냐고. 말 안한다고 해서 바라가 모를 것 같아? 조금이라도 벌을 덜 받게 해주려는 것도 모르고. 멍청한 자식!”
또 거짓말이나 해대다가 시원하게 몽둥이찜질을 당해도 싼 놈! 에라, 메롱이다.
“흥!”
푸른 튜닉 자락을 휘날리며 사라지는 티르의 모습을 나칼은 한동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함께 사냥길에 나섰던 막시무스가 돌아오자마자 저 영악한 녀석을 찾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부랴부랴 찾아온 길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막시무스는 티르에게 그간의 일을 고자질 하고 있었다.
게다가 외유를 나갔다가 지난밤에야 돌아왔다는 바라가 자신이 아닌 티르를 먼저 불렀다고 한다. 험한 길을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그가 아닌 죄를 짓고 근신중인 티르 놈을!
“어찌 할까요, 도련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아칸이 조용히 속삭이듯 물어왔다. 노예 사냥꾼 출신인 아칸과 지라는 아버지 센이 살아있을 때부터 함께 해온 그의 충실한 수족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늘 곁에 있었기 때문에 나칼은 비밀 따위도 두지 않을 만큼 깊게 그들을 신뢰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시녀를 보내 엿듣게 해.”
“키아가 좋겠군요. 귀가 밝으니 잘 할 겁니다.”
“그런데 막시무스 놈은 그냥 두실 겁니까?”
“흥! 어림없다. 감히 날 무시해? 사람을 보내서 놈을 감시하도록 해. 약점을 잡으면 더 좋고. 이 기회에 잘라내고 말겠어.”
“역시 도련님은 영리하십니다. 흐흐흐…….”
회심의 미소를 짓는 그들을 뒤로 하고 나칼은 섬뜩하게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후계자는 자신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머잖아 바라의 뒤를 이어 카비아니 가의 당주가 될 것이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천덕꾸러기 곁가지가 아닌 당당한 당주가! 그렇게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때는 아무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카비아니 가의 당대 당주이자 나칼과 티르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바라는 말 그대로 환갑을 훌쩍 넘긴 노회한 노인네였다.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며 자란데다 아덴부르크 제일의 지주집안 혈통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일찍부터 그 성격이 말도 못하게 더러워진 노인네. 노회한데다 성격까지 더러운 그런 영감탱이.
“내가 못 살아!”
“어허, 죄 지은 놈이 성질부터 부리기는……. 이 새끼야, 그게 다 널 위한 일이었다고 하잖아. 막말로 그깟 보름을 못 참아서 죽는 놈이 어디 있어?”
“있어! 내가 죽을 뻔 했다잖아. 대체 뭐하느라고 열흘씩이나 걸린 거야? 무슨 대단한 물건을 찾느라고 그렇게 오래 걸렸냐고! 나 죽이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미친 놈, 널 왜 죽여? 금쪽같은 이 바라의 손자를! 자자, 그러지 말고 좀 앉아봐. 좋은 걸 구해왔다니까 그러네.”
도저히 환갑을 넘긴 나이로 안 보이는 단단한 몸에 비단으로 지은 화려한 튜닉을 걸치고 커다란 보석반지를 손가락에 낀 바라가 어서 앉으라며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실실 웃어가면서. 그런 그의 앞 탁자위엔 토가 한 벌이 무슨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다.
티르는 온통 하얗게 반짝이는 바라의 머리칼과 유쾌하게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다 못 이긴 척 슬금슬금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아닌 척 했지만 사실 호기심이 당기긴 했다.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니까.
“뭐, 뭔데 그래? 비싼 거야?”
“비싸냐고? 킥킥, 암만! 돈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이지. 이게 뭐냐 하면 말이다…….”
갖은 잘난 척을 하며 오늘따라 유난히 유세를 떨어대는 태도가 우스워 티르는 저도 모르게 픽 콧방귀를 날렸다. 그리곤 바라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냉큼 토가 뭉치로 손을 가져갔다.
“이리 내봐. 보면 알겠지. 대체 뭐기에…….”
“엇! 이 새끼야, 조심 좀 해. 그거 진짜 귀한 거라니까. 그러다 깨지면 평생 원망할 테다.”
“흥! 원망하라지?”
바라가 솥뚜껑만한 손으로 등짝을 후려갈기며 생난리를 쳐댔지만 티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꿋꿋하게 토가자락을 뒤적이다 못해 아예 들고 일어서서 먼지 털듯 탈탈 버렸다. 그러자 ‘탁!’ 하는 앙증맞은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무언가가 탁자위로 떨어져 내렸다.
당돌하게도 데굴데굴 굴러가는 것을 티르가 먼저 몸을 날려 냉큼 주워들었다. 미처 손도 뻗지 못한 바라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르는 뿌듯한 미소와 함께 자신이 잡은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활짝 펼쳤다.
“에게, 이게 뭐야? 수정(水晶)?”
호두알보다 조금 더 커 보이는 동글동글한 구슬.
파란 빛이 돌 정도로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구슬 하나가 손바닥위에 덜렁 놓여 있었다. 수정! 고작 수정? 실망감이 몰려오면서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동동거리며 성화를 해대기에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게 뭔가? 겨우 이런 걸 가지고 귀한 것 운운했단 말이지!
“겨우 이걸 구하자고 열흘이나 싸돌아다녔다는 거야?”
“겨우? 이 새끼야, 그게 뭔 줄이나 알아?”
“보면 몰라? 수정이잖아. 영감탱이가 가지고 있는 보석들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아니, 고작 이걸 구하자고 나를 보름씩이나 가두어 두었단 말이야? 바라, 노망났어?”
소리치기가 무섭게 다시 손바닥이 날아와 등짝을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속이 다 찌르르 울릴 정도였다.
“날 죽일 셈이야? 아파 죽겠어. 고만 좀 때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새끼야, 성질만 부리지 말고 잘 좀 보란 말이야. 봐봐, 수정이랑은 뭔가 좀 다른 것 같지 않으냐?”
“수정이면 다 같은 수정이지 다르긴 개뿔이…….”
궁시렁 거리면서도 티르는 수정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라가 이렇게나 난리를 치는 걸 보면 어느 한가지쯤은 특별한 구석이 있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슬쩍 푸른빛이 도는 수정을 눈앞까지 들어 올려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냥 볼 때는 몰랐는데 시선을 집중하고 빤히 들여다보니 안쪽에서부터 희미하게 오색 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네. 햇빛을 받아서 그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저도 모르게 탑의 창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리곤 내팽개쳐놓은 토가자락을 끌어당겨 그늘을 만든 다음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4살 때부터 손수 키워온 어린 손자 녀석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소년으로 예쁘장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물론 얼굴만. 그 곱상한 얼굴을 해가지고도 워낙 싸움질을 좋아해 녀석의 몸은 여느 사내 녀석들처럼 단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만 문제라면 성격이 조금…… 까짓 성격이야 돈으로 커버하는 되는 게지. 암, 그렇고말고.
워낙 튀는 외모다보니 녀석은 이제 이곳 동부 투란 제국인이 아닌 물의 나라이자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엘룬인으로 보일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물의 술사라고 오해받기 딱 좋게 은발에 코발트빛 푸른 눈이기까지 하다.
물론 바라는 ‘혹시‘하는 마음에 어린 녀석을 상대로 시험까지 다 해본 상태였다. 결과는 아무 능력 없음. 엘룬인이었던 큰며느리도 별다른 능력이 없더니 티르도 아마 그런 부류인 듯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에게 ‘샤나메‘를 내민 것은 오래전에 본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그래, 그때 네게선 빛이 나고 있었느니라.’
피바람이 지난 간 황량한 초원 한복판에서 그를 부르듯 희미하게 반짝이던 빛을 바라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초원을 아우르던 황금빛 빛 무리를 따라 마치 홀린 듯 황급히 달려간 곳에서 발견한 아이. 핏 구덩이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방싯 웃고 있던 아이가 바로 티르였다.
그날,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티르는 틀림없이 ‘샤나메‘를 읽을 수 있으리라.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어라?”
“왜? 뭐, 뭐가 보이냐?”
멍하니 있다 흠칫 긴장하는 바라를 못 본 척 하고 티르는 다시 시선을 집중했다. 방금, 구슬 안쪽으로 뭔가가 얼핏 스쳐지나 간 것 같았다. 순식간에 스쳐간 것이라 장담을 할 순 없었지만 분명히 무슨 글자처럼 보였었다.
티르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수정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들여다본 그것은 말 그대로 티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허탈하게스리.
“이상하네. 분명히 봤는데……. 바라, 이게 대체 뭐지?”
“큭큭큭, 왜 그냥 수정이라며?”
“쳇, 그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지. 아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재지 말고 말해봐. 이거 정체가 뭐야?”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쓰고 바라보자 바라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더니 곧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아무도 없는 방안을 한번 스윽 살피고는 그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너만 알고 있거라. 이건 ‘샤나메‘라는 거다.”
“샤나메?”
“쉿! 어허, 이 새끼야 누가 들으면 큰일 나. 목소리 좀 낮춰. 이게 우리한테 있다는 소문이 나면 당장 반역죄라도 뒤집어쓰게 되고 말걸?”
“헉! 미, 미친 거 아냐? 그런 걸 왜 주워가지고 왔어?”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며 묻는 티르에게 바라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샤나메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야?”
“물론, 있고말고. 들어봐. 샤나메는 ‘왕들의 책‘이란 말이다.”
“왕들의 책?”
“그래. 위대한 왕들의 일대기가 적혀있다고들 하지. 하지만 사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럼?”
“이건 은밀히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샤나메에는 왕이 될 수 있는 힘도 함께 숨겨져 있다는 거다. 이제까지 대륙을 제패했던 위대한 왕들은 여지없이 이 샤나메의 소유자였거든. 그 말을 뒤집어보면 샤나메의 소유자가 위대한 왕이 된다는 뜻 아니냐? 그러니 무언가 비밀이 있긴 있을 거라는 거지.”
“……!”
왕이 될 수 있는 힘이 숨겨져 있다고? 이 조그만 구슬에?
위대한 왕이 샤나메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샤나메를 가진 자가 왕이 된 거라는 말에 조금 현기증이 났다. 이야기를 한 사람이 바라만 아니었어도 티르는 볼 것도 없이 당장에 헛소리로 단정 지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상대는 바라였고 티르가 아는 한 그는 절대로 이런 종류의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늘도 속여먹을 아주 대단한 사기꾼에게 속았던가 아니면 진실이던가. 둘 중 하나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티르는 또 물었다.
“바라, 이거 어디에서 구했어?”
“그게…… 조금 의아하긴 하다만 사막을 건너왔더구나.”
“사막? 그럼 하 투란에서?”
하 투란의 정확한 명칭은 서부 투란 왕국이었다. 과거, 이곳 동부 투란 제국의 한 영지였으나 중간에 있는 사막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립 왕국이 되어버린 바로 그곳.
어느 때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해째 가뭄이 계속 되고 있다는 소문을 티르도 슬쩍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 투란에 엘룬의 왕자가 오래전부터 피접을 나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혹시 그쪽에서?”
“아니, 아닐 거다. 왜냐하면 샤나메는 신이 아니라 마왕의 물건이라는 말이 있거든.”
“뭐? 마왕?”
의외의 말에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샤나메를 떨어뜨릴 뻔 했다. 마왕이라니, 마왕이라니? 어느 시대였는지는 모르지만 한때 붉은 피와 파괴의 어쩌고 하던 마왕이 강림해 대륙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은 티르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땐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이더니 왜 지금은 그 이야기가 갑자기 공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걸까나?
“바라, 이거 당장 내다버리자.”
“뭐? 이 새끼야, 미쳤어? 이 귀한 걸 왜 내다버려? 오호, 마왕이라니까 덜컥 겁이 나든? 킥킥, 걱정마라. 설마 또 마왕이 강림하기야 할까.”
“그런 게 아니야.”
“아니면?”
“쓸모가 없으니까 버리자는 거야. 자고로 못 먹을 거 먹으면 체하는 법이고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은 화를 불러온다잖아. 샤나메라며? 왕으로 만든다며? 이런 게 우리한테 왜 필요해?”
정신없이 다다다다 떠들다가 마치 섬광처럼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어 티르는 고개를 발딱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바라에게서 슬그머니 한걸음 물러섰다.
“설마…… 바라, 부잣집 노인네로도 모자라서 이젠 왕 노릇까지 하고 싶어진 거야?”
“글쎄다. 크흠, 이 나이에 왕 노릇하기는 쉽지 않겠지?”
“당연하지.”
“하기는. 이렇게 곱게 늙은 게 아까워서라도 말년을 중노동으로 보낼 수야 없지. 좋다. 아쉽지만 양보하마. 네가 가지련? 이번 생일 선물로 치자.”
“헉! 싫어. 절대로 싫어. 난 야망이란 게 없는 놈이야. 부자 할아버지씩이나 가진 내가 왜 고생길을 택해야 해? 더구나 난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따로 있었다고! 바라, 그러지 말고 그냥 내다버리자. 응? 응?”
티르는 진심으로 샤나메인지 뭔지 하는 그 구슬을 원하지 않았다. 가지고 있어야봐야 쓸모는 없으면서 이런저런 일들의 화근이나 될듯해서다. 게다가 아무래도 바라의 눈치가 이상했다. 저 노회한 늙은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 없이 물건을 사들이는 법이 없었다. 물론 쓸모없는 것을 선택한 적도 없다.
그런 그가 턱하니 샤나메랍시고 구해와 티르에게 안겼다는 것은 곧 그것을 사용하게 만들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바라는 다른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나칼에게 주지.”
“흥! 어림없는 소리. 나칼은 그것을 알아볼 눈조차도 없는 놈이다. 이 새끼야, 이 늙은 할아비가 고생한 걸 생각해서라도 밖으로 내돌릴 생각 말고 잘 품고 다녀.”
“필요 없다니까! 왜 이딴 걸 구해 와서 사람을 피곤하게 해?”
“제 맘대로 코앞으로 굴러 들어오는데 그럼 걷어차랴?”
바라도 딱히 샤나메를 구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소문으로나 들어본 물건이었다. 그래서 흔한 수정으로 거래되어 그의 손에 들어왔을 때도 긴가민가했다.
확인하고 갈등하고 또 확인하고 갈등하고…….
진짜 샤나메임을 확인하고 그것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해 보낸 지난 열흘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에게 티르가 없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 오직 느낌 하나만으로 벌인 짓. 처음 티르를 발견하고 품에 안았을 때와 너무도 흡사한 두근거림이 그로 하여금 결국 일을 치게 만든 것이다.
“잔말 말고 절대로 몸에서 떼어놓지 마라. 다른 놈들에게 보여줘서도 안 된다. 이 새끼야, 알아들었어?”
“알았어! 대체 이걸 누구한테 보여줄 수 있다는 거야? 젠장! 하루 날 잡아 멀리 내다버리고 말테다!”
“흥, 심심하면 해보던지. 운명이라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아니면 말겠지. 자자, 할아비한테 할 말 없냐? 그렇게 굉장한 생일 선물도 구해다줬는데 말이야.”
“내가 지금 고맙다고 인사하게 생겼어? 이런 짓 하고 다닐 거면 차라리 나칼하고 붙어 다니는 놈들이나 손 봐. 안 그래도 아까 전에 막시무스가 찾아와 한바탕 하고 갔단 말이야.”
이제야 용건이 생각난 티르는 바가지를 긁는 마누라처럼 그렇게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바라는 그저 귀엽기만 하다는 듯 계속해서 실실 웃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한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