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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3화)
3. 시바 (5)/

“휴, 제발 걱정 좀 하게 하지 말아라.”
“제발 지나친 걱정 좀 하지 말아요. 어딜 가든 난 말짱해. 그리고 쓸데없이 인질 잡고 그러지 마요. 창피해 죽겠어요.”
마차를 타고 상단으로 향하면서 킬군은 고민 많은 아버지처럼 내게 잔소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반항하는 아들내미인양 역시 반항기 넘치는 대답을 들려주었고. 그런 것은 상단에 도착한 후 한 단계 발전된 형태로 이어졌다. 그곳엔 스칼라의 아버지라고 하는 예의 노인이 삼층짜리 거대한 건물의 입구에서부터 도끼눈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노인은 킬군과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더니 곧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또 나를 통째로 잡아먹을 듯이 한동안 노려보았다. 대체 뭐하자는 짓인지…
“보면 볼수록 기가 막히는구먼.”
등짐을 멘 무수한 사람들이 오고가는 문 앞에 서서 그렇게 나를 노려보다가 그는 스산하게 입을 열었다.
“내 어쩌다 고명딸을 빼앗겨 저런 어이없는 놈을 사위라고 부르면서 살게 되었을까?”
“흐응, 나야말로 고약해빠진 영감을 장인으로 두어 오늘날까지 고생이 막심하오.”
“흥, 밥버러지를 능가하는 칼잡이 놈 주제에…”
“그 칼잡이 놈에게 칼을 맞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 안 해보셨소?”
어허라, 그랬구먼. 킬과 노인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쩌다 그리 됐는지, 쯧쯧쯧. 잠시 칼날이 오고가는 설전을 벌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등을 돌리는 것을 보고 나는 스칼라에게 물었다.
“왜들 저러는 거예요?”
“오호호, 이를테면 사위 사랑은 장인이라는 거란다.”
“무슨 뜻이에요?”
“무시해버리라는 뜻이야. 자아, 우리는 선물이나 가지러 가자꾸나. 내버려두면 하루 종일 저러고 있을 거야. 오호호호호…”
스칼라는 유쾌한 말과 함께 나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
건물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맞은 편의 창까지 확 트인 회랑을 중심으로 양쪽에 복도가 이어져 있었는데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맞물려 있는데다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도 많아서 웬만한 시장의 복잡함을 능가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작은 왕국처럼.
스칼라는 그 복잡한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 건물의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마호가니 나무로 된 거대한 문이 떡 버티고 있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아주 조용한데다 안으로 들어서자 유리 진열대 위에서 번쩍이는 각종 보석들을 배경으로 노인과 함께 다니던 중년인이 다소곳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누님.”
“오냐, 딜런. 내가 부탁한 것은 준비가 되었니?”
“물론입니다, 누님. 이런, 오늘은 조카님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인사하거라, 네 외숙부인 딜런이란다.”
“파비안이에요.”
“하하, 나도 이링카를 찾기 전까지는 인정하지 않을 겁니까, 조카님?”
“…하는 거 봐서요.”
나는 빙긋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더 크게 소리 내어 웃었고 웃음을 그친 뒤에는 내게 사탕을 내밀었다. 으음, 내가 좋아하는 뇌물을 준비하다니 의외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서 자리에 앉자 그는 푸른 색 벨벳 천으로 싸인 손바닥만한 크기의 네모반듯한 상자를 가져와 우리 앞으로 내밀었다. 스칼라가 부탁했던 황제폐하의 생신 선물인 모양이었다.
“호오, 어디 보자.”
스칼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엔 엷은 핑크빛이 도는, 흡사 내가 먹고 있는 눈깔 사탕만한 진주 하나가 오도카니 놓여있는 것이었다.
“크다. 이렇게 큰 진주는 처음 봐요.”
“호호, 당연하지. 이건 세상에 몇 개 없는 크로비엔산 큰 바다조개에서 채취한 진주거든. 정말 어렵게 구했어.”
“정말 황제폐하께 드릴 수 있을 만큼 대단해 보여요.”
나는 정말 감탄해서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무슨 소리니? 이 좋은 걸 왜 그분께 선물해?”
“에? 하지만 선물을 가지러 온 것 아니었어요?”
“물론 그랬지. 그러나 그건 이게 아니라 바로 저거야.”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휑한 유리창 근처에 세워져있는 내 팔뚝만한 크기의 화려한 유리조각이었다. 그것은 커다란 진주조개 위에 서있는 여신의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한 것으로 군데군데 백금과 다이아몬드를 박아넣은 것이 보통 화려한 조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 몇 개 안된다는 진주보다는 조금 덜 귀해보이긴 했다.
“그런데요, 누님. 방금전에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요?”
“응? 이상한 소리라니?”
반짝이는 조각상에 넋을 빼고 있는 사이 딜런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별 얘기 아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순간 그의 착한 입에서 내 뒷통수를 날리고도 남는 어마어마한 말이 나올 줄이야.
“얼마 전에 누님께 보내드린 ‘누벨의 목걸이’있죠? 그걸 오늘 아침 우리 상단의 누군가가 싼 값에 샀다고 하던데요?”
“뭐라?”
오 마이 갓! 서, 설마 그거 시바가 팔아버린 내 목걸이?! 우째 이런 일이! 나는 가슴을 콩닥거리며 모르는 척 뒤돌아서서 잠시 동안 숨을 숙이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들통이 나게 될 줄이야. 아아, 시바군. 들키고 말았으니까 어서 재주껏 튀어! 나는 진심으로 그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스칼라의 입에서 나온 말.
“당장 그걸 판 놈을 찾아내! 흥, 감히 내 아들내미 물건을 훔치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보지?”
“어라? 도둑 맞은 거였어요? 어쩌다?”
“흐윽, 내 얘기를 들어보렴. 웬 간뎅이 부은 놈이 시장에서 우리 아들내미를 납치했었단다.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내가 이런 꼴을 다 겪고 살아. 이게 다 아버지랑 오라버니들이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은 탓이야.”
스칼라는 눈물까지 찍어내며 애처로운 여인의 그것같은 가증스러운 연기를 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잡히기만 하면 놈을 가차없이 찢어 죽이겠노라고 소리쳤다. 아아, 현명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스칼라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약간의 허탈함을 안은 채 소리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차라리 킬과 노인네의 혈전을 지켜보는 것이 더 정신건강에 좋을 것만 같아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막 아래층으로 내려와 킬과 노인네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삼층의 창문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 딜런이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누나가 울어요!”
“헙!”
“뭐라? 이, 이 썩을 놈의 칼잡이야, 네가 감히 내 딸을 울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울리긴 누가 울렸다고 그래요? 울린다고 울 사람도 아닌데…”
덕분에 내내 말로만 싸우던 두사람이 정말로 무기(?)를 들고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책갈피 3.> ― <그는 실수라고 생각했다.>

이봐이봐, 그런 눈으로 볼 것 까지는 없잖아?
난 아무 잘못 없어. 그냥 작은 실수를 한 것 뿐이야. 솔직히 그 애가… 아니, 누구든 이름만 듣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더욱이 난 그 애 얼굴은커녕 이름 한번 들어본 적도 없어. 그냥 공부를 하러 멀리 떠나있다고만 했단 말이야.
물론 처음엔 장난이었지. 달걀을 금 한냥이나 주고 사는 눈 삔 놈이 정말 있을 줄은 몰랐거든. 강매? 절대 강매 아니야. 제발로 걸어와 ‘얼마예요?’하고 물었다고. 진짜라니까?

근데 왜 데려왔냐고? 그야 이쁘니까 그랬지. 내 이상형이랑 조금 비슷했거든. 키가 조금 더 크고 여자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꼬셨을텐데… 무지 아쉽더라. 그치만 술 마시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잠들었을 땐 그냥 칵 덮치고 싶은… 아니다. 못들은 걸로 해라.
휴우, 아무튼 녀석 때문에 조금 곤란하게 됐다. 목마를 태우고 시장을 달리게 해서 온갖 창피를 주질 않나, 알고 봤더니 그 사람 아들내미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질 않나. 하아, 하늘이 누렇구나. 엥? 문제가 뭐냐고? 글쎄, 너무 많아서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목걸이를 팔아버리는 게 아닌데. 값을 후하게 쳐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보통 목걸이 같지는 않았거든. 게다가 그 사람은 둘째 치고 형수가 성격이 보통이 아니야. 솔직히 무서워. 부디 들키지나 말아야 할 텐데.
아아, 젠장. 이링카를 찾아다니느라 돈을 많이 쓰지만 않았다면 무일푼으로 돌아오는 일도 없었을 거야. 뭐? 무슨 소리야? 모치즈 가의 상인들이 갑자기 이링카를 찾는다고? 왜? 집안의 누군가가 병에 걸렸다든? 설마 가주인 드레인 영감이? …아니야? 그럼 뭐 하러 그걸 찾는 거지? 갑자기 찾는 걸 보면 누군가가 의뢰를 한 것이 분명한데… 이런, 이러다 놓쳐버리는 것 아냐?

안되겠다. 어머니한테 도움을 청하든지 해야겠어. 벌써 몇 년째 한 고생인데 이렇게 어이없게 당할 순 없잖아. 나도 그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이봐, 근데 혹시 우리 애들 못봤냐? 대체, 그놈들은 어딜 싸돌아 다니길래 이렇게 소식 한 장 없는 거라냐? 또 어디가서 나 몰래 싸움판을 벌린 거 아냐? 나 빼고 하면 절단 낸다고 했는데. 으음, 용의주도한 놈들 같으니라고. 말 마라. 한달째 싸움이 없어서인지 온몸의 근육들이 근질거려 죽겠어. 오늘은 어디 가서 요란벅적지근한 싸움 한판 해봤으면 좋겠다. 이러다간 귀여운 내 칼이 녹슬고 말겠어. 캬캬캬, 에구 이쁜 놈.

어라라? 비웃냐? 그러다가 죽은 놈 여럿 된다. 조심해라. 그리고 이 근육이 그냥 만들어 진 게 아니야. 실전에서 완벽하게 다듬어진 놈들이라고. 게다가 돌아다니다가 배운 격투기로 더 단단해졌고. 아 참, 격투기 재미있더라. 가르쳐 줄까? 싫어? 쯧, 도전정신이 부족한 놈 같으니라고.
훗, 그 꼬맹이 말이다. 내 근육들을 보더니 눈이 동그래져서 탐욕스럽게 달라붙더라. 아아, 진짜 귀여웠는데 하필이면…

앙? 목걸이? 글쎄, 설마하니 벌써 알아냈으려고? …아, 가만. 그 형수 집안이 모치즈 가 아니었나? 상점? 그러고 보니 목걸이를 판 곳이 모치즈 가에서 운영하는 상점이었을지도… 허거거걱! 큰일 났다. 그럼 벌써 알아내 사람을 풀고도 남았잖아? 그 눈치라면 범인이 나라는 것도 금방 알아내고 말거야. 으윽, 당장 튀어야겠다. 어디로? 글쎄? 어디로 가야 안전할래나?
맞다!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다. 궁으로 들어가면 일단은 안심이야. 아, 근데 나 선물을 안 가져왔다. 어머니? 하긴, 어떤 어머니인데 준비를 안 하셨겠어? 나 대신 무언가를 준비해 두셨겠지. 하지만 아버지도 보통 눈치가 아니시거든. 어머니가 준비하셨다는 거 금방 알아보실 거야.

크크크, 좋은 생각이 났다. 이봐, 달걀 하나만 주라. 이쁘게 포장해서 줘. 그래도 보는 이목이 있는데 그냥 가져갈 순 없잖아? 나도 그 정도 예의는 있는 놈이라구. 응? 당연히 아버지 생신 선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