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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3화)
1. 새끼고양이를 줍다 (3)/

집에서 꼭 한번 워프를 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인적이 드문 한 시골 도시의 외곽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 마차였다. 그래서 나는 킬군의 집이 그곳에서 꽤 가까운 곳일 줄 알았는데 웬걸? 조금만 가면 금방 나온다던 그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벌써 사흘째 마차를 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대답은 여전히 조금만 가면 나온 다라니… 이 얼마나 코가 막히고 숨이 안 쉬어질 일이란 말인가.
‘사나이의 로망은 뭐니 뭐니 해도 말을 타고 모험을 즐기는 거라고 양아빠가 그랬었는데…’
여자처럼 치렁치렁하게 차려입고 지겹기 짝이 없는 마차를 사흘씩이나 타고 있는 내 신세가 갑자기 너무 우습게 느껴지고 있었다. 차라리 말을 타고 달리는 거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 견딜 수없이 양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그라면 분명 마차보다는 말을 선택해 줬을 테니까.
“휴우…”
“응? 웬 한숨이냐, 아들아?”
“지겨워서…요. 아직도 멀었나…요?”
“허허, 이제 다 왔단다. 저기 큰 모퉁이만 돌면 금방일 게다. 그나저나 저 녀석이 아직 깨어나지 않는 것이 걱정이구나. 벌써 사흘째 저러고 있으니…”
킬군은 그야말로 감쪽같이 연기를 잘 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진짜 내 아버지인줄만 알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나는 못 견디게 어색하고 낯설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그에게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그만 혀를 깨물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무튼, 이런 내 심정과는 달리 연극을 시작한 그는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아직도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꼬맹이를 바라보며 짐짓 안됐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아아, 그 끝없는 가증스러움이라니. 닭살이 전신에서 요란하게 파도를 친다.
‘하도 많이 해봐서 드디어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게 틀림없어.’
사흘 전만 해도 당장 내다 버리자고 소리를 질러댔던 주제에 이제는 아주 연기에 몰입을 해서 선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짓게 된 그를 나는 진정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나 같으면 정말 하라고 등을 떠밀어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과 함께.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픈 곳은 없으니 이제 곧 깨어날 게야. 허허…”
“도련님께서 그 아이를 주우신 겁니까, 왕야?”
“그렇다, 제제. 파비안은 인정이 많아 작은 짐승들을 곧잘 주워오곤 했거든. 하지만 사람을 주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나.”
그래, 워낙 잘 주워서 드래곤도 한 마리 주웠었지. 그 드래곤은 지금 내 앞에 앉아서 아버지 노릇을 하려 들고 있는 상태고. 그런 사실을 모르는 제제는 능청맞은 킬군의 말에 감동해 생긋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다우실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고운 분이시군요. 과연 왕야의 아드님이십니다.”
“하하하, 네가 보기에도 과연 그러하냐, 제제? 하긴, 척 보기만 해도 내 아들내미라고 써있는 얼굴이긴 하다만 네 보는 눈도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그렇습니까? 제가 원래 사람 보는 눈 하나 만큼은 정확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왕야. 하하…”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사이좋게 웃어젖혔다. 갑자기 엄청 화기애애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했다.
‘나 아무래도 무서운 인간들을 만나 버린 것같아아…!’
그들의 웃음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마차는 어느덧 대로를 지나 대문이 높은 어느 저택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섰다. 그리고 대문에서부터 무려 세 시간 이상을 달린 후 나타난 저택. 그것은… 정말 왕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건물에 물처럼 파란 지붕과 뾰족한 몇 개의 탑. 그리고 무리지어 오가고 있는 기사들. 시할룸과 흡사하면서도 또 다른 모습의 그것은 군데군데 놓여져 있는 조각상과 커다란 분수대 너머에서 햇살을 받으며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가 좋아할 것들을 많이 준비해 두었단다.”
입을 쩍 벌린 채로 앉아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킬은 자랑스럽게 속삭였다. 대체 무얼 준비해 놓았다는 거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에서 내려서자 저택내의 하인과 하녀들이 모조리 나와 길게 늘어서 있다가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또 무슨 짓들이라지? 나는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내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내 아들이 돌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아들이니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 눈 밖에 나는 짓을 하거나 해를 입혔을 때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왕야.”
아아, 쪽 팔려. 킬 군은 양아빠도 안하던 짓을 과감하고 간단하게 해치우고 있었다. 설마 팔불출 짓에서도 그를 능가하게 된 것은 아니겠지? 슬며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함에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 다음에 나타난 사람이 한 짓에 비하면 그야말로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막 앞으로 한발을 내딛기도 전에 은색 드레스 자락을 펄럭이면서 달려 나오고 있었는데 킬군 앞에 서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가차 없이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내 아기가 돌아왔구나!”
반짝이는 은발 머리에 같은 색 눈동자. 서늘하면서도 동시에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카이의 엄마.
“스… 칼라?!”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무방비 상태로 멍하니 서있는 내게 달려와 와락 끌어안고는 잠시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다음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보고 싶었다는 둥,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는 둥, 엄마라고 불러보라는 등등의 갖은 수선을 떠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말은커녕 입도 한번 벙긋 해보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무언가 상당히 억울한 기분이 들고 슬며시 화도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뽀드득 이를 갈며 킬군에게 속삭였다.
“키일? 나랑 얘기 좀 해야겠어. 단 둘이서.”
“하하, 먼 길을 왔는데 피곤하지 않냐? 우리 푹 쉰 다음에 얘기하자앙?”
“키이이일…!”
“어허, 애들 듣는다. 아빠라고 불러야지.”
“커허허헉!”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바르르 떨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얌전히 방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이리봐도 번쩍! 저리 봐도 번쩍! 앉으나 서나 번쩍번쩍!
“으윽, 눈부셔.”
세공술이 발달했다는 말은 과연 틀린 말이 아니었나보다. 내 방이랍시고 킬군이 데려다 놓은 곳은 그야말로 황금 밭이었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부터 침대는 물론이고 탁자며 굴러다니는 쿠션과 늘어져있는 휘장 그리고 하다못해 벽지까지도 온통 황금색 천지였다. 마치 황금 광산에 굴을 파고 들어가 집을 지은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천장은 또 어떠한가. 그곳엔 수많은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있는 정원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게 글쎄 전부다 황금이었다. 한마디로 번쩍여도 너무 번쩍이는 방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나, 돌아갈래.”
…무서워서 냉큼 돌아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랬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모두 널 위해 어렵게 준비한 것들인 걸?”
당장이라도 돌아갈 듯 방을 나서는 내게 스칼라는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킬군이랑 달리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유희를 나오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깨어난 나와 함께 있기 위해서 일부러 유희를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처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카이가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아, 어찌나 속이 뜨끔거리던지… 결국 죄책감에 못이긴 나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 두 손 놓고 얌전히 끌려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잘 들어라, 파비안. 우선 아빠는 제국의 다섯 번째 왕야인 동시에 이름 높은 기사란다. 기사단을 거느리고 전쟁터도 다녀왔고…”
저녁 무렵. 스칼라는 내게 금실 자수가 들어간 흰색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혀놓고 집안 내력(?)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 가짜 입안의 내력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킬군과 그녀가 꼭 알아야 한다며 반강제로 나를 붙잡아 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의 어거지로 듣게 집안 내력이라는 것은…
“엄마는 제국 제일의 상인인 모치즈 가의 외동딸이란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지만 사실 모치즈 가는 스칼라가 오래전에 일으킨 집안이지. 지금은 여러 척의 큰 배를 가지고 있는 대상단으로 발전했는데 대륙 곳곳에 거래 점을 트고 있어서 벌이가 꽤 좋은 편이야. 그 상단 덕분에 네 방을 그렇게 꾸밀 수 있었던 거란다. 사실 나머지 방들은 다 평범하거든.”
“부러우면 당장 바꿔줄게.”
사실, 그 번쩍거리는 방에서 자면 나 또한 어느새 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엄청 두려운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나였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냉큼 바꿔주겠다고 나섰더니 당장 스칼라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방은 그녀가 자그마치 십년에 걸쳐 꾸며놓은 엄청난 방이었던 것이다. 그런 것도 모르고 대뜸 맘에 안 든다고 했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겠는가? 그리하여 더더욱 죄책감에 사로잡힌 나는 당분간 그녀의 말을 잘 들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지은 죄를 수습하는 데는 늘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말이다.
“근데 이 나라는 어느 쪽에 있는 나라지? 크샤인 제국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어?”
“아?!”
“…”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는 내내 궁금해 하던 일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얘기해 줄때까지 참아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나오지 않아서 결국 먼저 얘기를 꺼내본 것이다.
“많이 변했을까? 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지나면 원치 않아도 그곳에 대한 기억과 함께 가슴을 메우고 있는 이 막연한 그리움도 조금씩 옅어질 것이었다. 그러니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쯤에서 한번은 그곳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슴을 두근거리며 물은 내 질문에 킬군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마…
“…머, 멀어.”
“멀어? 얼마나?”
“그게… 대륙의 반대편이지, 아마? 마법으로 가도 대충 몇 달은 더 걸릴 거야.”
“그, 그렇게 멀어?”
나는 입을 쩌억 벌렸다. 어쩐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 와 있다고 했더니 결국 내 고향과 반대편이었단 말인가. 마법으로 가도 몇 달씩이나 거리는 먼 거리라고? 조금 실망스럽고 조금 안타깝고 그리고 뭔가가 개운치 않아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포크로 앞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쿡쿡 찔러댔다. 그러자 자신이 생각해 봐도 꽤 미안했던지 킬군은 슬며시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너무 그러지 마라. 언제 한번 시간 내서 다녀오면 돼지 뭐.”
“그래, 다녀오면…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내 집으로 가서 파란에 있는 레녹스가로 워프하면 되는데…”
“헉!”
포크를 집어던지며 벌떡 일어서서 소리치자 킬군은 괜히 화들짝 놀라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냥 놀란 것도 아니고 안색마저 변한 것이 어디 한군데가 상당히 안 좋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 아니. 그게 말야…”
“휴우, 그냥 사실대로 말해줘요. 무작정 숨긴다고 해서 좋은 일만은 아니야. 이제 곧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그때 가서 알면 오히려 충격만 더 받아.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잖아.”
“무슨… 소리야?”
스칼라의 말에 나는 문득 불길한 무언가가 가슴을 쿵 들이받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생각을 하기는 싫지만 설마 그곳에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대답을 재촉하듯 킬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어딘지 비장하기까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데리고 저택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곳에 올라가서도 그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창밖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로 한참 동안을…
“킬?”
“휴우,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간들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하다가도 이런 일을 만날 때면 당황하게 돼. 전 같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행동했을 텐데… 지금은 네 걱정이 먼저 앞서서… ”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아. 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뭐야?”
근심스러운 빛이 가득한 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가슴이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 난 더 이상 약하지 않아.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그런 내 생각을 알아본 것인지 이윽고 킬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충격을 넘어서 고통마저 주는 그 참담한 역사를 내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백칠십년전 크샤인 제국은 내분으로 인한 분열과 바드니 왕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멸망했다.”
쿠궁!!!
“제국은 십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나뉘어졌고 나뉘어져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분쟁에 시달렸지. 그 사이 다른 제국들도 발전과 퇴락을 거듭하며 변해갔고 지금은 그나마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 타마르 제국은… 옛 아벨 제국 너머의 드바인 제국으로 주변국인 나바 왕국과 아벨 제국 그리고 카난 제국의 일부를 정복해서 흡수했다. 덕분에 지금은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지. 옛 크샤인 제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 그럴 수가… 멸망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아. 믿을 수 없어. 화이트 문이 있었어. 모두스 가의 마법사들이… 아니, 그들은 어떻게 된 거야?”
넋이 빠진 듯 멍하니 중얼거리다 퍼뜩 그들이 떠올라 나는 킬에게 매달렸다. 자신이 있었는데… 어떤 말을 듣더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그것은 단지 마음뿐이었던가 보다. 나는 놀라서 파랗게 질린 얼굴로 킬에게 매달려 부들부들 떨었고 그는 그런 나를 꽉 끌어안고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사라졌다.”
“…!!!”
“내가 깨어났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 전쟁 때문인지 내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하지. 크샤인 제국은 바드니 왕국과의 전쟁 때 모두스 가의 마법사들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것.”
“아아… 아아…”
신이여, 당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나는 망연자실하게 굳어져서 힘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사라졌을까? 사라졌다면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 살아있기는 한 것일까? 무수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그 생각들 중 어느 한가지의 답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을 앉자 킬군은 날 번쩍 들어 안고 다시 탑을 내려갔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내게 말했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인간들의 역사에 대해서 배워라. 네가 잠든 사이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알아야 해. 그러면 사라진 그들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지도 몰라.”
“…”
“모르긴 몰라도 그 끈질긴 놈의 자손이라면 쉽게 죽거나 하지 않았을 거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야. 화이트 문의 식솔들도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을 테니 역시 살아있다고 봐야 하고… 원한다면, 상단을 이용해서 찾아봐 주마. 하지만 부디 너무 속상해 하지는 하지 말아다오. 긴 삶을 살아야 하는 네게 역사란 그저 하룻밤에 꾼 꿈과 같은 것이니까.”
이때만 해도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진 자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까맣게 애를 태우고 있었을 뿐.
참담한 심정으로 탑에서 내려와 방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먼 길을 달려온 피곤함과 갑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킬군에게 안긴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시종인 제제가 달려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소년이 깨어났습니다, 왕야.”
“아, 그런가? 그럼 내일쯤… 어? 파비안!”
소년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소년! 그렇다. 소년은 이타라가 만든 그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는 모두스가와 연관이 되어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사라진 그들에 대한 일을 알고 있지 않을까?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아, 하인들이 기거하는 별채에…”
“당장 안내해.”
재빨리 킬군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제제를 닦달해 당장 소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우리가 지내는 저택 뒤쪽에 위치한 이층짜리의 작은 건물이었는데 제제는 그곳의 맨 끝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깨어나 막 식사를 마쳤습니다만… 아직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상관없어.”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나는 방문 앞에서 한차례 심호흡을 한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소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울었는지 아직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모습… 그 물에 젖은 다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눈에 익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걸음을 옮겨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은 초조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넌… 누구지?”
“…”
“누구길래 나에게로 온 것이지?”
“…나, 너 모른다. 죽음의 숲… 이링카…”
더듬거리며 털어놓은 것은… 열다섯 소년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어눌한 말 몇 마디였다. 마치 말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의 그것 같은 말투. 단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가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먼저 이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