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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화)/

<프롤로그>

나는… 겨울이 싫다.
“네 아비는 죽었다.”
유독 춥다고 느끼는 날엔 항상 무언가를 잃는다.
“오갈 데 없는 것들을 거두어 주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감히 둘째 도련님을 죽이려 들다니… 흥, 짐승만도 못한 것들.”
“그 착한 분을 해하려 했으니 죽어도 싸지, 싸.”
무언가 슬픈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부터 시작된 삶의 기억… 그 기억이 이어져온 내내 내 곁엔 아비가 있었다. 찰싹찰싹!
“꼬마가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놓고 이곳을 샅샅이 뒤져라.”
머물 곳이 없어 떠돌거나 굶주려 쓰려지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아비는 웃었다. 하나 뿐인 아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데도 늘 그렇게 웃기만 했다. 바보같이….
“녹슨 단검 한 자루와 동전 몇 개 그리고 누렇게 바랜 종이 두루마리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해독약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분명 그놈이 한 짓이 틀림없거늘… 설마 해독약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아비는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바보였다. 그런 그가 백작가의 둘째 도련님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은 바로 어제 밤의 일이었다. 내 곁에서 곤히 자다가 끌려 나간 뒤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독약을 찾아야 한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님.”
“응? 무슨 소리냐?”
“신의 눈물이라 불리는 <이링카>가 있지 않습니까?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그 <이링카> 말입니다.”
“으음,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숲에 있다고 들었는데….”
얼어붙은 땅바닥에 누워 싸늘하게 식은 아비를 내려다보는 내게 노백작은 죽음의 숲으로 들어가 이링카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아비와 같이 죽여야 하지만 이링카 때문에 살려둔다며 만일을 위해 내가 가진 목걸이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것은 아비가 내 목숨 다음으로 소중히 여기던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나는 그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로 아비가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일까?
“아버지….”
물어보려다 말고 나는 그냥 돌아섰다.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살아 있어도 대답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비는 벙어리였으니까.

1. 새끼고양이를 줍다 (1)

<곤히 자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다친 새끼고양이 한마리가 찾아왔어. 그건, 쪼그맣고 아주 조금 귀엽고 또오 말도 없는데다가…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닮은 것도 같은 이상한 녀석이었거든? 근데 척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녀석이 맘에 드는 거야. 별다른 이유는 없었는데… 아니, 사실은. 울면서 노려보는 강한 눈빛이… 이상하게 널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 고집도 무지 세 보이는 것이 정말로 그랬어. 저기, 이런 말하면 또 화낼지도 모르지만 이타야… 그때는, 정말 넌 줄 알았어. 그래서…>

땡그랑… 땡그랑…
‘응? 으음, 시끄러워.’
언제부턴가 들려오기 시작한 맑은 풍경소리에 몽롱하던 의식이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다할 꿈도 꾸지 않은 채 한참 잘 자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야말로 난데없이 그 소리가 시작돼서 나는 잠결에도 적잖이 짜증이 나있는 참이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그놈의 풍경을 떼어내 바닥에 내던진 다음 발로 꾹 밝아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다.
근데 이상하기도 하지? 집안에는 풍경도 없고 소리를 낼만한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이렇게 끈질기게 소리가 나는 것일까?
‘핫! 혹시… 또 누가 찾아온 거 아닐까?’
한순간 노예 문서를 손에 든 누군가가 집안까지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 퍼뜩 놀라 긴장하다가 문득 킬군이 만들어 놓은 결계를 생각하고는 도로 마음을 놓았다. 그가 만든 결계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문에 손을 대기만 해도 거두절미하고 불을 뿜어 당장에 숯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초강력 화염 마법진의 변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킬군을 움직이게 하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즉,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들어오려고 든다면 그때는 킬군이 본체로 문 앞에 떡 버티고 서서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을 거라는 뜻이다. 물론 그전에 이곳까지 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상황이 그러하자 나는 또다시 의문투성이인 그 소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 누가, 왜 흔들어대는 풍경인가 하고 말이다.
‘가볼까? 으음, 아니야. 졸려서 눈 뜨기도 귀찮은 걸? 그리고 조금만 있으면 저절로 그칠지도 모르잖아?’
조금 안일한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이니까. 그런데…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채고 반항을 하는 것인지 소리는 더 요란하게 울리면서 잔뜩 곤두서있는 내 신경을 자꾸만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런 짓을 할 만큼 간 큰 인간은 이타라 밖에 없는데… 아니, 녀석이라면 당장 대문부터 부셔놓았을 거야. 에? 그럼 누구지?’
결국 소리에 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 나는 뒤척거림을 멈추고 드디어 기나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다.
“하아품… 누군지 찾기만 하면 가만 안 둘텨!”
몽롱한 정신으로 몸을 일으키며 나는 입이 찢어지도록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은 상태로 미끄러지듯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진 다음 시체처럼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탓에 정신은 물론이고 몸의 감각까지도 아직 상당히 무뎌져있는 나였다. 그래서 흐릿한 시선으로 시린 돌바닥을 맨발로 지나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는 대문 밖으로 멀쩡히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구우우우… 쏴아아아…!
한손으로 슬쩍 대문을 밀자마자 요란한 빗소리가 왁 하고 덮쳐와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아직 한밤중임을 증명하는 새카만 어둠과 그 어둠을 적시는 거센 빗줄기 사이로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기둥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인간들이 날 위한 신전이랍시고 지어놓은 건물이 분명했다. 흐릿한 눈으로 봐도 여전히 볼품이 없어 보이는 그 흰색의 대리석 건물. 아니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회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우중충한 폐가. 음, 눈 버렸다. 언젠가 하루 시간 내서 부셔버려야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나는 몇 번인가 을씨년스럽고 온통 새카맣기만 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웅, 아무것도 없잖아? 하아품.”
귀찮음을 무릅쓰고 어렵사리 나왔는데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니… 자다가 날벼락을 맞아도 이보다는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다시 들어가 자야 하나 아니면 방금 전에 뚝 그쳐버린 그 소리가 들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하나를 놓고 고민하다가 비를 맞기 싫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해 내고는 냉큼 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땡그랑!’ 하고 들려오는 그 맑고 고운 소리.
“응?!”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도 않았지만 그 소리는… 분명 신전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정말로 누군가가 이곳에 들어왔다는 말?
‘말도 안돼. 그렇게 함정을 준비해놓고 애완동물도 풀어놓고 길까지 죄다 막아놨는데 누가 올 수 있다는 거야? 하아품.’
몽롱한 와중에도 나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워낙 준비해놓은 게 많아 잠들면서도 흐뭇해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 흔한 것이 또 예외라는 말이고 그걸 생각하면 이 소리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의심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애완동물들은 아닐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까지는 오지 말라고 명령했으니까. 그들이 아니라면, 정말 누가 오긴 온 걸지도 몰라. 하아품. 설마 또 소원을 빌러 온 사람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는 진정 독한 인간이라고 불려도 할말이 없을 거다. 숲을 통과해 여기까지 왔을 때에는 틀림없이 말로는 못할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치렀을 테니까.
“하아품. 아앙, 졸려 죽겠는데…”
흔들흔들…
나는 몽롱한 눈을 두 손으로 비비곤 흐느적거리며 신전 쪽으로 걸어갔다. 서늘한 빗줄기에 몸이 금세 홀딱 젖어버렸지만 지금은 그딴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머릿속엔 오직 빨리 확인을 하고 돌아가 다시 잠을 자야한다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계속 신경을 자극하는 그 끈질긴 풍경소리를 그만 그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그러나 음침하고 어두운 정원을 지나 신전에 이르러서도 나는 문제의 소리가 시작된 곳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령처럼 소리 없이 신전 안을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막 입구 쪽으로 나섰을 때 드디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추어 서게 되었다. 비록 그 뭔가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보기 좋게 앞으로 고꾸라질 뻔 하긴 했지만.
“우에에엑?! 뭐, 뭐야?”
“…!”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저 아래 시커먼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한 쌍의 독기 어린 눈동자.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누구지? 고집 세고 여리면서도 동시에 시리도록 차고 독한 눈빛. 이런 눈빛을 가진 것은 누구였더라? 나는 몽롱한 눈으로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현재의 위치와 내 기억을 결합해 내린 결론은…
“아항, 이타라 구나…?”
아아, 이 얼마나 끈질긴 녀석이란 말인가. 내 비록 말도 없이 떠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목숨까지 걸고 잡으러 오다니… 게다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독기가 풀풀 풍기는 눈으로 노려보기까지 하고. 전에는 그런 적 없었으면서. 고얀 녀석 같으니라고.
“이타라, 네 이놈. 내가 아무리… 엥?”
스르르… 털썩!
“이타라? 뭐야, 자는 거냐?”
내가 한발 다가서기가 무섭게 눈동자가 풀리더니 금세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떨어뜨리는 녀석. 나는 잠결에도 놀라 화다닥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혼자 여기까지 왔으니 얼마나 지치고 피곤할 것인가.’ 라고 내 맘대로 생각을 한 다음, 친절하게 녀석의 한쪽 팔을 잡아 짐짝처럼 질질 끌고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걱정 마, 이타야. 하룻밤 잘 자고나면… 하아품… 금방 나아. 근데 너 못 본 사이에 엄청 젊어진 것 같다? 또 이상한 약 만들어 먹었니?”
정신을 잃은 녀석에게 두서도 없는 잠꼬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온 길을 되짚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늘어진 녀석을 곁에 눕히고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 쿠울…
“잘 자, 이타야…”
아아, 너무도 달콤한 잠이었다. 이래서 난 그대를 거부할 수 없는 거야.

양아빠는 말을 타고 있었다.
안장도 없이 그 시커먼 몸을 번들거리며 오만한 눈으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있는 놈… 뻑군이었다. 놈의 등위에 올라타면서 그는 내게 물었다.
“이놈의 이름이 뭐더라?”
“뻑… 이예요.”
“음, 어째서 그런 이름을 붙였지?”
올라타자마자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팩 찌푸리는 뻑군을 내려다보며 묻는 말에 나는 마주 인상을 쓰며 말했다.
“뻑하면… 사람을 떨어뜨리거든요.”
“아, 그렇구나.”
“히이이이잉…!!!”
대답과 동시에 그가 내 발치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성난 뻑군이 다가와 나를… 바늘로 찌르기 시작했다.

따끔따끔… 파지지직…
“히끅.”
“…아, 아들아, 아들아! 어서 눈 좀 떠보라니까!”
다시 잠든 이후, 무언가 엄청나게 복잡한 꿈이 나를 괴롭히더니 이젠 꼭두새벽부터 찾아온 킬군이 필사적으로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며 나를 심히 괴롭히고 있었다. 따끔따끔… 연속적으로 피부를 자극하는 이 따끔한 통증. 가위에 눌리고 있는 나를 그는 마나를 쏘아대는 방법으로 깨우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여전히 반쯤은 맛 간 눈을 하고 있자 참지 못하고 드디어 직접 손을 쓰기에 이른 것이었다.
“빨리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지 않으면… 이 아빠는 널 위해 당장 자장가를 부를 수밖에 없을 거란다, 아들아!”
“히끅히끅.”
아아, 이쯤 되면 난 더 이상 버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 나이에 자장가라니… 게다가 양아빠도 아니고 하워드 경도 아닌 킬군의 자장가… 그걸 듣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직접 관을 짜고 그 안에 들어가 눕고야 말리라. 발딱!
“…나, 잠 다 깼어.”
결국 나는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말짱한 눈으로 벌떡 일어나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는 킬군의 허연 얼굴을 지그시 바라봐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양손으로 내 볼을 감싸 쥔 채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말했다.
“휴우, 다행이다. 말짱한 거 맞지? 네가 다친 거 아니지?”
“다쳐? 그게 무슨 소리야?”
웬 헛소리냐고 묻는 내게 그는 말없이 내 옆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헉! 이, 이건…”
대문에서부터 침대까지 이어진 두 줄의 붉은 물길, 온통 새빨갛게 물든 이불,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 그리고… 시체 같은 푸르뎅뎅한 얼굴로 옆에 누워있는 정체모를 웬 꼬맹이 하나. 뭘까, 이 기가 막힌 상황은?
“주, 죽은 거야?”
너무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묻자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어디선가 기다란 막대기를 찾아와 꼬맹이를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마치 지저분한 쓰레기의 처분을 놓고 고민하는 궁상맞은 아줌마처럼.
“…아… 아버…지…”
“흡! 살아있다.”
“헉, 말도 했어.”
시커멓게 죽은 입술 사이로 희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우리는 화들짝 놀라 난리를 쳤다. 딱 시체몰골을 하고 있는 꼬맹이는 기가 막히게도 아직 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생각만 해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그 이름. 그때까지 나는 내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녀석이 흘려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문득 가슴이 뜨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라…
‘아버지와 함께 들어온 걸까? 그렇다면 지금은 왜 혼자인 거지?’
어떻게 내 집에 들어왔느냐 하는 문제보다 나는 그것이 더 궁금했다. 그래서 새삼 꼬맹이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꼬맹이는 잘 봐줘야 이제 갓 열다섯 살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골격은 단단하지만 꽤 말라서 체구도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고 제멋대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은 피에 흠뻑 젖어서 어깨를 덮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귀여운 인상을 주는 얼굴도 온통 피투성이였고 마르고 갈라진 입술 부근부터 목 아래로는 시커멓게 피가 말라붙어 있어 보기가 매우 흉했다. 몸 구석구석 피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밖으로 드러난 팔의 상처만 봐도 대강 상태를 짐작할 만 했다.
“이 정도의 상처를 가지고도 죽지 않았다니… 거참, 신기한 놈일세? 아, 더러우니까 가까이 오지 마라, 아들아.”
막대기를 움직여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킬군이 신기한 놈을 다 봤다는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뒤 멍청하게 서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이 놈이 어떻게 여기에 누워있는 거냐, 아들아?”
“아앙? 그게… 나도 몰라.”
“그래? 이상하네? 결계가 있는 상태에서 죽지도 않고 나 몰래 여기까지 들어올 만한 인간은 없을 텐데… 으음, 수상한 냄새가 나는 놈이군.”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긴 했다. 꼬맹이는 대체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와 내 옆에 누워있을 수 있었던 것일까?
“가만, 근데 너 왜 갑자기 깨어난 거냐, 아들아?”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킬군은 흠칫 놀라 소리쳤다. 잘 자고 있던 나를 깨운 것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놈은? 그 멍청한 오리발식 물음에 어이가 없어서 나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