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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25화)
7장 적산 (2)


첩형부터 일개 위사에 이르기까지 뇌물을 밥 먹듯이 받았으며, 심지어는 관직까지 사고파는 일이 허다했다.
보통 동창 위사는 금의위에서 충원하게 되는데, 수많은 금의위들이 동창 위사가 되기 위해 제독이나 첩형에게 적지 않은 뇌물을 바쳤다.
하니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눈에 불을 켜고 재물을 끌어모으는 것이다.
당두의 표정변화를 눈치챈 황보영천이 고삐를 늦추지 않고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실 저 진 공자라는 분은 무림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무시무시한 고수입니다. 성격이 포악해서 조금만 거슬려도 사람을 우습게 죽입니다. 얼마 전에도 문지기가 웃었다는 이유로 문파 하나를 몰살시켰지요.”
동창의 당두가 찔끔한 표정으로 진운룡을 슬쩍 바라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무서운 것이 없어서 무림맹주, 마교 교주도 두 손 두 발 다들 정도지요. 송구스런 말이지만, 황제폐하의 명이라 해도 콧방귀도 안 뀔 인간입니다. 원체가 법이고 뭐고 없는 자이니,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 생각하시고 피하시는 편이 나으실 것입니다.”
“크, 크험! 아무리 그래도 어찌 황제폐하를 욕되게…….”
“대인께서 한 번 자비를 베푸신다면 황보세가에서는 그 은혜에 대한 보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황보영천이 은근히 한 번 더 보상을 강조하자 당두가 못 이기는 척 헛기침을 하며 물러섰다.
“커험!”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황보세가의 자제가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동창의 위사에게 이토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자신의 면도 섰고, 더불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이득이 남는 장사였다.
게다가 그는 황제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는 재물과 권력을 좋아하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비록 국법이 지엄하나, 무지한 백성들의 작은 실수까지 엄하게 다스리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 그렇다면 내 황보세가의 얼굴을 봐서 이번 한 번만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히 더 조심하도록 하게!”
당두가 짐짓 엄중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훈계를 했다.
진운룡은 황보영천과 당두가 하는 양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봤다.
이미 황보영천의 귓속말도 모두 들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별반 반응하지 않았다.
그 역시 동창 위사들과 척을 져서 귀찮음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헛기침을 몇 번하고는 진운룡을 노려본 당두와 위사들이 부상당한 위사를 부축해서 일행과 멀어졌다.
“한데, 동창이 왜 제남에 온 것일까요?”
황보영관이 의문 어린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글쎄…….”
일행은 멀어져가는 동창 위사들을 뒤로한 채 황보세가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일어난 진운룡의 안색이 굳었다.
“벌써 시작된 것인가?”
그의 시선은 자신의 손등을 향하고 있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지게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색깔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무척 진했다.
진운룡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짐승으로는 한계가 있어. 역시 방법은 그 아이밖에 없는 건가.”
무거운 마음으로 방을 나선 진운룡의 두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방 앞쪽 마당에 적산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 입었던 상처가 제법 깊었음을 말해 주듯 옆구리와 가슴, 복부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진운룡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평소와 다르게 비장한 얼굴로 적산이 말했다. 그답지 않게 말투도 제법 공손해져 있었다.
진운룡은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물끄러미 적산을 바라봤다.
“부탁드리오! 제발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쿵!
적산이 바닥에 이마를 부딪치며 다시 한 번 진운룡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진운룡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했다.
쿵!
“난 반드시 강해져야 하오! 제발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적산이 계속해서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를 지르자 소란을 듣고 황보세가 사람들과 접객원에 머물던 후기지수들이 몰려왔다.
“적 공자,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뭐하는 짓이오!”
황보영호가 얼른 와서 적산을 말렸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탁드리오!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다시 한 번 적산이 울먹이며 진운룡에게 애원했다.
그때, 드디어 진운룡의 입이 열렸다.
“내가 왜?”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너무도 무미건조하고 메말라 있었다.
“난 꼭 강해져야 할 이유가 있소! 부탁드리오! 제발 무공을 가르쳐 주시오!”
적산의 상처에서는 어느새 제법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건 그대 사정이고.”
그러나 여전히 진운룡의 대답은 전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쯧쯧, 하여간 사람이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요!”
어느새 나타난 소은설이 혀를 차며 진운룡을 책망했다.
진운룡은 못 들은 척 방을 나서 적산을 무시한 채 지나쳐 갔다.
덥석!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면 차라리 이대로 날 죽이시오!”
적산이 진운룡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순간, 진운룡의 눈썹이 꿈틀하는가 싶더니 그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콰아아앙!
갑자기 터져 나온 폭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어느새 진운룡이 적산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그의 육신을 담벼락에 처박고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담벼락은 무너질 것만 같이 움푹 파여 있었다.
“커헉!”
신음과 함께 적산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네놈은 떼를 쓰기만 하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느냐?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놈의 어리광을 받아 줄 만큼 내가 물러 보였더냐?”
진운룡의 온몸에서 광폭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싼 후기지수들과 황보세가 사람들까지 몸을 떨 정도로 두렵고 서늘한 기운이었다.
소은설이나 후기지수들은 진운룡의 새로운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다.
“크으윽…….”
“네놈이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내가 이루어 주지!”
진운룡이 천천히 손에 힘을 주기 시작하자 적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커, 커어억!”
적산은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한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 진 공자 그만하시지요!”
황보영천이 다급히 진운룡을 말리려 했으나, 그의 서슬에 질려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끄으으…….”
시간이 흐르며 적산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고,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었다.
소은설을 비롯한 후기지수들이 도저히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었다.
“사, 살려 주시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적산이 애원했다.
“나,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소…….”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적산이 중얼거렸다.
“해, 해야 할 일이……. 야, 약속이…….”
순간, 진운룡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쿨럭! 나, 난 살고 싶소! 아, 아직은 살아야 하오……. 쿨럭!”
연신 피를 토해 내며 적산이 중얼거렸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놈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놈이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날뛴다면 더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진운룡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크흐흐흑! 내, 내가 어리석었소! 부탁이오, 앞으로는 절대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겠소. 그러니 제발 내게 기회를 주시오!”
적산이 풀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내가 너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다면 넌 내게 무얼 줄 수 있느냐?”
진운룡이 깊게 침잠된 눈으로 적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적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운룡을 바라봤다.
그는 순간 마음속에 묵직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진운룡의 두 눈을 바라보던 적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한 가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 모든 것을 주군께 바치겠습니다!”
적산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애써 일으켜 진운룡 앞에 부복했다.
“좋다. 넌 지금부터 나의 종이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며, 손과 발. 이제부터 너에게 생각과 의문은 없다. 단지 내가 생각하면 너는 움직이고, 그대로 따르면 된다. 대신 나는 나의 재산을 지키고, 만일 훔치거나 흠집 내려는 자들이 있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그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진운룡의 말 하나하나가 적산과 지켜보는 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 비장한 언약의 맹세 앞에서 누구 하나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존명.”
적산이 무거운 목소리로 읍을 한 후 그대로 기절했다.
진운룡은 의식을 잃은 적산을 어깨에 들쳐 메고 자신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 * *

적산과의 사건 이후로 그 누구도 진운룡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두려움을 느껴 슬슬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반대인 이들도 있었다.
황보영천과 모용주란이 그들이었다.
황보영천은 특유의 털털함으로 진운룡과 친해지려 애썼다.
모용주란 역시 진운룡의 진면모를 본 이후로는 수시로 그의 숙소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어떻게든 관심을 끌어 보려는 그녀의 노력에도 진운룡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느새 예의 심드렁하고 무심한 모습으로 돌아온 진운룡은 적산과 소은설에게만 신경을 썼다.
소은설은 하오문 제남분타를 방문해 아버지 소진태를 찾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소진혁이 미리 언질을 해 두었던지라 다행히도 제남분타주는 자신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겠다 약속했다.
그렇게 소진태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사흘째 날 밤 진운룡이 갑자기 소은설의 숙소를 찾아왔다.
소은설은 진운룡의 갑작스런 방문에 다소 놀란 얼굴로 그를 맞았다.
“무, 무슨 일이에요? 이런 늦은 시간에?”
거의 삼경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소은설을 바라보는 진운룡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소은설은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아니나 다를까 진운룡의 입에서 그녀에게 가장 두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받기로 한 대가를 받으러 왔는데?”
소은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 대가요? 지금요?”
진운룡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준비는 되었나?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진운룡이 천천히 소은설에게 다가왔다.
“그, 그게 아직 마, 마음의 준비가…….”
소은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딱히 준비랄 것도 없는데……. 물론, 처음에는 잠시 따끔 하겠지만, 그 뒤로는 전혀 아프지 않거든.”
소은설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 이런 식으로 순결을 잃는 것은 싫어…….’
최소한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싶었다.
그때 진운룡이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얼굴에 갈등이 일었다.
“싫다면 지금이라도 거절해도 된다.”
진운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쯤은…….’
그녀는 이를 악문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도저히 눈을 뜨고는 이 상황을 버텨 내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사내에게 당하는 것 보단 나을지도……. 이런!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순간, 진운룡의 입김이 그녀의 볼에 느껴졌다.
“흐읍!”
“근데, 내가 무얼 달라는 것인지 알고는 있나?”
문득 들려오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소은설이 감았던 눈을 떴다.
진운룡의 눈동자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진운룡의 눈동자는 신비스런 노란 빛이 감돌고 있었다.
“무, 무엇을 달라는 거죠?”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킨 소은설이 물었다.
“난…….”
진운룡의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너의…… 피가 필요해.”
순간, 소은설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