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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1화)
1장 혈귀곡 (1)


“젠장! 진짜 끈질기네! 빌어먹을! 염병할 놈들!”
소은설은 연신 욕지기를 토해 내면서도 미친 듯이 내달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갓 열여덟, 아홉 쯤 되었을까. 귀엽고 앳된 얼굴과 달리 그녀의 입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주모의 그것처럼 거칠었다.
“놓치지 마라!”
몸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핏자국과 찢어진 옷가지가 그녀가 지금까지 겪은 고초를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뒤쪽에서 고함 소리와 풀이 스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이런! 벌써!”
소은설의 다급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으로 보아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따라잡히고 말 것이 분명했다.
번쩍! 콰르릉!
폭우가 쏟아지는 밤, 산길은 달리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다.
경공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그녀였지만, 질척해진 땅과 미끄러운 풀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게다가 추격자들의 무공이 상당히 높았다.
이곳 제녕에서 가장 돈이 많은 초가장 장주가 고르고 고른 이들.
그녀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들인 것이다.
소은설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상황의 발단은 모두 아버지의 실종부터였다.
아니, 어찌 보면 황포의원(黃袍醫院)의 화재가 최초의 발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 사라진 시체들이 분명해!’
화재 당시 황포의원의 원장이던 채복과 치료를 받던 백 명이 넘는 환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자신이 오늘 본 것이 그 환자들의 시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기에 놈들이 이렇듯 죽자 사자 달려드는 것일 터였다.
‘아버지의 실종도 놈들의 짓임이 분명해!’
하오문 제녕분타의 책임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황포의원 화재에 대해 조사하던 중 실종되었다.
그가 실종하기 전 집중적으로 정보를 모으던 곳이 바로 초가장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인 소진태가 점점 진실에 가까워지자 위협을 느낀 그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했다.
소은설의 눈동자에 분노가 일었다.
어떻게 해서든 놈들의 손에서 벗어나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큭!”
소은설이 신음을 토해 냈다.
무사들이 던진 비수에 상처 입은 어깨가 쑤셔 왔기 때문이다.
도망치느라 살펴볼 새가 없었는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 모양이었다.
“이쪽이다!”
그녀를 발견했는지 추격자들의 소리가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젠장! 이러다 잡히겠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조차 분간이 가질 않았다.
지금 소은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천지신명님! 부처님! 공자님! 제발 놈들을 따돌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소은설의 절실한 마음이 통했음일까.
갑자기 앞쪽으로 나무와 밧줄로 엮어 만든 좁은 다리가 나타났다.
소은설의 눈동자가 빛났다.
‘저 다리를 끊을 수만 있다면!’
다리를 건넌 뒤 밧줄을 끊을 수만 있다면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있을 터.
‘놈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해!’
소은설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신법을 펼쳤다.
“멈춰라!”
“저기다!”
그녀가 막 다리를 건넌 순간, 수풀 사이로 초가장의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 시간 추격으로 인해 모두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이런!”
소은설은 허겁지겁 비수를 뽑아 다리를 엮은 밧줄을 베었다.
사악!
타당!
한데 어이없게도 밧줄이 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비수가 뒤로 튕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게 대체!”
당황한 소은설이 밧줄과 비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놀랍게도 밧줄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마치 쇠줄을 때린 것처럼 비수를 잡은 오른 손목이 저릿저릿했다.
소은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라면 초가장 무사들이 다리를 건널 것이고, 그녀는 잡히고 말 것이다.
절망 어린 그녀의 시선이 다리 건너편으로 향했다.
‘응?’
문득 건너편을 바라본 소은설이 멍한 얼굴로 동작을 멈췄다.
초가장 무사들이 다리 앞에서 멈춰 선 채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은설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다리가 끊어질까 봐 지레 겁먹은 거야!’
다리를 묶은 밧줄이 얼마나 튼튼한지 저들이 알 리가 없었다.
아마도 저들은 소은설이 다리를 끊을까 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저 빌어먹을 녀석들은 밧줄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 리가 없지!’
속으로 쾌재를 부른 소은설이 비수를 들어올렸다.
“흥! 거기 그대로 있어! 한 발짝이라도 다리에 들여놓으면 이 밧줄을 끊어 버릴 테니까!”
소은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최대한 허세를 부려야 놈들이 다리를 건널 생각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무사들의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했다.
“저, 저런 미친년! 혈귀곡으로 들어가다니!”
“야, 이년아!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겨 들어가!”
“이년아, 당장 나와!”
초가장 무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혈귀곡?’
소은설의 미간에 내천 자가 그려졌다.
어쩐지 많이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가, 가만! 혈귀곡이라면!’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소은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의 시선에 다리 입구에 놓인 비석 하나가 들어왔다.
그곳에는 붉은색의 세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혈귀곡(血鬼谷)!

“이, 이런 빌어먹을!”
그녀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제야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림사대금지(武林四大禁地)!
무림에는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될 네 곳의 금지(禁地)가 있다.
해남의 지옥도(地獄島), 천산의 무저동(無低洞), 북해의 빙설지(氷雪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동 봉황산에 있다는 혈귀곡(血鬼谷)이 그곳들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비석으로 향했다.
결코, 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있는 지금 이곳이 바로 사대금지 중 하나인 혈귀곡이었던 것이다.
혈귀곡이 금지가 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 발을 디딘 자 치고, 지금껏 살아 나온 이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 약초꾼, 사냥꾼을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혈귀곡에 발을 들였다가 실종되거나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간혹 발견되는 실종자들의 시신이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목내이 상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혈귀가 살고 있어 인간의 피를 빨아 먹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붙게 된 이름이 바로 혈귀곡이었다.
소은설에게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이대로 머물면 혈귀의 제물이 될 것이고, 다시 돌아가면 초가장의 무사들에게 잡힐 게 빤했다.
“야 이 미친년아! 얼른 안 튀어나와!”
“이 빌어먹을 년아! 그렇게 병신처럼 뒈질 바에야 차라리 아까 뒈져 버리지 왜 예까지 와서 생고생을 시켜! 썅!”
무사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욕지기를 토해 내는데,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제지했다.
“조용!”
우두머리가 얼굴에 억지스런 미소를 머금고 소은설을 바라봤다.
“소저. 우리가 서로 오해가 있었던 듯하니, 무모한 짓 말고 이리 나와서 대화로 풀도록 하세. 소저도 혈귀곡에 대해서 들어 봤겠지? 아직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함부로 버릴 셈인가?”
우두머리가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은설을 달랬다.
‘흥!’
소은설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직 어린 그녀였으나, 하오문이라는 특성상 적지 않은 세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우두머리의 말에 속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치부를 목격한 이상 초가장 무사들에게 잡히게 되면 살아나기는 힘들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온갖 고문을 당하고, 능욕을 당한 후 처참하게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더러운 꼴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혈귀한테 피를 빨리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혈귀곡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소은설이 몸을 돌려 막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스스스스스!
갑자기 계곡으로부터 운무가 솟아올라 다리 주변을 감쌌다.
“엇! 모, 모두 뒤로 물러서라!”
놀란 초가장 무사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후우우우욱!
소은설의 신형은 순식간에 운무에 삼켜졌다.
“이런 젠장!”
추격대의 책임자인 진화가 욕지기를 토해 냈다.
“대장, 어찌할까요?”
대원의 물음에 진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확실히 하려면 소은설을 잡아 혹시 배후가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혈귀곡으로 따라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주변을 수색하면서 이곳에서 대기한다.”
지금으로서는 혹시라도 시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