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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긴 여정의 시작 (2)



푸슝.
소음기를 장착한 K2c1에서 단발의 총성이 울렸다.
소음의 크기는 작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다행히 지상의 좀비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흠. 두식이와 용칠이 높은 곳을 찾는 이유가 조금은 더 이해가 가네.’
시간이 있을 때 좀비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얻기 위한 성현의 테스트는 계속되고 있었다.
‘총구의 불빛도 보지 못할까? 놈들의 시력은 어느 정도지?’
좀비들에 대한 정보는 생존과 직결된다. 당장은 총탄을 앞세워 우위에 있지만 이건 무한한 것이 아니라 수량이 한정된 것이고 언젠가는 모두 소진할 것에 대비해야 했다.
두식과 용칠은 안절부절못했다.
괜한 일을 벌이는 성현이 못내 사고를 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다고 이를 대놓고 말하지도 못했다.
해미가 찌푸린 두식을 얼굴을 못마땅하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날씨 조-오타.”
두식이 뜬금없이 중얼거리며 먼 산을 봤다.
설령 마음에 안 든다고 완력을 행사하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강한 자에게 위축되기 마련이다.
‘흐음.’
지상을 향해 총구를 거둬들인 성현은 적외선 스코프만 내민 체 좀비들의 행동을 관찰했다.
크워어어!
약 150여 미터 떨어진 좀비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끌고 걷고 있다.
입으로 계속해서 괴성을 지르며, 자신을 상처 입힌 적을 찾는다.
‘동족의식이 있는 건가?’
다친 좀비 주위로 상당수의 좀비들이 다가와 입을 벌리고 ‘그르릉’ 거리며 서성인다.
‘어이없지만 묻고 답하는 그런 거 같기도 하네.’

-친구 좀비 : 너 어디 아파?
-다친 좀비 : 어, 아파.
-친구 좀비 : 그럼 다음에 보자.
-다친 좀비 : 어, 잘 가.

성현의 눈에는 딱 이 정도 수준으로 보였다.
다친 좀비 주위에 모여 있던 좀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제 갈 길로 갔다.
‘흐음. 종족의식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헷갈리네. 일단 관심은 있다고 봐야겠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에는 당장 확인할 방법이 너무 한정적이었다.
틱.
창고에서 섬광탄 1개를 꺼내든 성현은 다시 안전핀을 뽑고 안전손잡이에 짧은 테이프를 붙였다.
흠칫.
남들이 보기에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모습일 뿐이었다.
몰래 지켜보던 두식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지만, 성현은 개의치 않았다.
안다고 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킬 의무 따윈 없었다.
홰액.
섬광탄을 던졌다.
성현이 직접 힘껏 던졌다.
해미와 자신의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위함이었다.
전력으로 던진 섬광탄이 밤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퍼엉.
섬광탄에 내재된 마그네슘이 산소와 수소 그리고 합성 촉매와 만나면서 찰나의 순간 강력한 섬광을 발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뭐, 기대한 건 아니지만··· 고작 280m를 조금 넘다니. 그나저나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은데.’
카아아
쿠어어억
섬광탄이 터진 폭심지를 기준으로 가까이 있던 좀비들은 쓰러져 나뒹굴었고, 반경 30m 이내의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섬광탄이 터진 곳과 반대로 도망쳤다.
그리고 폭음을 듣고 달려오는 좀비들과 뒤엉키며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섬광탄을 마주한 좀비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시력에 문제가 있는 듯 벽에 부딪히고 다른 좀비들과 마구 뒤엉키며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효과는 인간 이상으로 보면 되겠다.’
섬광탄 자체가 대인 살상용이 아닌 일시적 저항불능 상태로 만들기 위한 무기였다.
폭압으로 인한 피해가 없지는 않지만, 피해는 경미하다고 보면 된다.
성현은 필요한 테스트를 모두 마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 * *

아직 해가 뜨려면 조금은 이른 시간. 동녘 하늘이 차츰 어둠을 몰아내고 짙푸른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5시가 조금 지났나?”
성현은 느지막이 잠이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특성을 각성하고 게이머가 되고부터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면에서 월등해진 탓에 적은 수면으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아저씨, 언제 일어났어요?”
군용 텐트에서 해미가 나와 성현을 알은체했다.
옥상에는 모두 3개의 A 텐트가 펼쳐져 있었고, 성현과 해미가 각 하나씩 쓰고 두식과 용칠이 같은 텐트를 썼다.
남아도는 게 군용 물품인 탓에 두식과 용칠에게 너무 박하게 굴지는 않았다.
“일어났니? 좀 더 쉬지 않고.”
“헤에. 사실 일어난 지는 꽤 되었어요. 와 아침 공기 정말 좋아요. 후 아-.”
해미는 폐 속 깊이 숨을 들이쉬고,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 폰을 꺼내 본다.
지하에서 정신을 차리면서부터 수시로 확인했지만 현재까지 전화는 물론 무선통신망 모두가 불통이었다. 하다못해 GPS까지 뜨지 않았다.
습관처럼 스마트 폰을 한번 본 해미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만끽했다.
“그러게.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닌 거 같다. 이런 날이 올 거라 상상도 못 했는데··· 차차 익숙해지겠지.”
기계화 산업화의 폐해인 공해가 없는 서울. 두렵고 낯설지만, 이제는 친숙해져야만 했다.
“어머! 좀비들이 그새 모두 사라졌네요.”
“그래.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라지더라.”
“그 많던 좀비들이 다 어디로 간 걸까요?”
“모두 보지는 못했지만, 저기 대방역으로 가장 많이 몰렸고, 나머지는 작은 단위로 쪼개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성현의 손짓에 해미는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고, 두 분 모두 일찍 일어나셨군요. 덕분에 어제는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두식과 용칠도 잠에서 깨어 텐트에서 나왔다. 인사하는 폼이 여간 지극정성이지 않았다.
“저, 선생님. 제가 호칭을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선생님들하고 어찌 되었든 청계산 까지 동행할 텐데, 저희가 이름만 부르기는 좀 그렇습니다.”
두식은 양손은 가지런히 모으고 덩치에 맞지 않게 조근 조근 이야기했고, 옆에 붙은 용칠은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냥 편하게 부르세요.”
성현 딴에는 선택지를 준거고, 호칭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고. 그럼 제가 나이도 어리고 아랫사람이기도 하니 형님으로······.”
“그건 빼죠. 호적에도 없는 동생 만들 일은 없습니다. 호칭은 알아서 대충 부르시고 아침 들고 내려갑시다.”
성현은 두식의 형님 소리에 문득 해외파병 간 최동원 상사가 떠올랐다.
‘동원이 이놈은 어떻게 살아 는 있는지······.’
“아하하. 그, 그렇죠. 이제 하루 지난 사이에 그건 좀··· 제가 앞서갔습니다.”
성현이 34살이고 두식의 나이가 그보다 어린 31살, 용칠은 28살이었다. 조금 더 친근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두식이 ‘형님’이라고 하려다 성현이 싫은 티를 내자 대충 얼버무린다.
무안해진 두식을 뒤로하고 성현은 해미를 바라봤다.
“해미야. 아침거리 좀 꺼내고, 큰 가방 두 개만 꺼내서 저 사람들한테 내줘라. 자신들이 쓸 물건이나 필요한 건 가져가게 하고, 우리가 쓴 건 다시 챙겨 넣으렴.”
성현은 저들이 쓸 물건을 다시 보관하고 꺼내주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자신이나 해미를 계속해서 의지하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선의로 행한 일을 권리로 착각하는 일 자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짐승이나 사람이나 길을 어찌 들이느냐에 따라 변한다.
간단히 전투식량으로 아침을 때운 성현 일행은 머물던 건물에서 내려왔다.
건물 아래 살짝 비탈진 내리막을 내려가자 편도 5차선의 올림픽대로에 올라설 수 있었다.
“아저씨! 제가 앞서서 가볼게요.”
“그래. 조심하고 이상한 게 보이면 바로 알려주고.”
“네에-.”
해미는 곧바로 차량들 위로 올라서 일행보다 앞서서 나아갔다.
“내가 뒤에서 살피면서 갈 테니 우리와 보조를 맞춰갑시다.”
“예. 박 선생님. 폐 끼치지 않게 잘 따라가겠습니다.”
두식은 성현의 성을 따서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사회 때도 깨나 선생님 호칭을 많이 불렀는지 입에 붙은 두식이었다.
“용칠아 가자. 저기 이 선생님 안 놓치게 서두르자.”
해미도 얼떨결에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이들을 탓할 수도 없던 터라 성현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어리다고 야자 하는 건 더 볼 수 없기도 했고, 해미는 이미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 있는 내 사람이었다.
“근데 형님 저 두 분 정말 사람 맞나요? 마술도 아니고 막 공중에서 이것저것 꺼내는데.”
“쉿! 저기 이 선생이 어떤 내용인지 알게 되면 죽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너 그 입조심해. 우린 그냥 입 닫고 선생님들 따라 목숨 부지하면 그만이다.”
해미는 ‘많이 알면 다칠 텐데.’라며 에둘러 이야기한 걸 당사자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들렸나 보다.
두식의 표정이 자못 심각한 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용칠은 손으로 입 지퍼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고, 무슨 일이 있어도 비밀은 지키리라 마음먹었다.
누구나 목숨은 소중한 법이다.
‘차량을 쓸 수 있다면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성현은 차량 사이를 건너뛰며 다시 한 번 쓸데없이 시간을 축내는 게 아까웠다.
하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재주가 있다 한들, 꽉 막힌 차도를 어떻게 할 방법까진 없었다.
체력이 남아도는 자신과 해미는 달려가면 그나마 시간이 절약될 텐데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일행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버리고 갈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몰라도··· 그나마 착한 사람들 같으니,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해보자.’
원래 성현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거나 불이익을 감수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과 해미한테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저 두 사람은 목적지로 정한 청계산에 절대 다다르지 못할 것이었다.
나쁘지 않은 사람. 성현의 기준에 부합하는 그런 사람은 살리고 싶었다.

* * *

성현 일행은 올림픽 대로를 타고 동진 중이었다. 일반적인 걷는 속도보다 조금 빠른 탓에 현재는 동작대교 인근에 다다르고 있었다.
“후욱, 후욱.”
“헥··· 헥··· 헥······.”
두식과 용칠은 숨을 헐떡였다.
날은 초여름 날씨에 내려 쬐는 태양은 살을 태우듯이 뜨거웠고, 거기에 성현과 해미의 속도에 맞추려니 힘에 부치는 건 당연했다.
처음에는 등에 멘 가방이 가벼웠는데 가면 갈수록 천근만근이다.
숨이 목 끝에서 왔다 갔다 하니 죽을 지경이었다.
“저기 다리 밑에서 잠시 쉬어 갑시다. 해미야, 다리에서 잠시 쉬자.”
“네, 아저씨.”
성현의 작은 배려에 두식과 용칠은 고마움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들도 모르지 않았다.
성현과 해미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고,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쉬어간다는 건 자신들을 위해 배려했음을 잘 알았다.
“아저씨. 저기 좀비 있어요.”
해미가 차량을 짓밟고, 빠르게 돌아오며 소리친다.
“그래, 알았다.”
성현은 대답과 동시에 차량을 건너뛰며, 다리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는 트레일러 차량 위에 멈춰 섰다.
스코프의 줌을 조정하고 다리 아래의 좀비들을 확인했다.
좀비 8마리가 다리 아래 구석에 움직임을 최소화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최대한 빛을 멀리하려는 행동으로 이해했다.
[좀비 Lv.3]
“3레벨 8마리라······.”
성현은 자동소총을 단단히 고정하고 조준선 정렬이 잘못돼 시차가 어긋나는 것을 방지했다.